경기도/양평군

양평...상원사

임병기(선과) 2009. 4. 20. 07:43
728x90
728x90

 

 

 

지평리 석탑 뵈러 가는 길.동선에 포함 되어 있던 상원사 이정표가 보여 건너 뛸수가 없더라. 제법 긴 산길을 돌아 올라갔다. 이런 가람은 혼자서 찾고픈 그런 분위기지만 어울림도 싫지는 않다. 좁은 중정을  전부 차지한 석탑은 먼훗날에는 상원사를 빛낼 고색창연한 보물이될지언정 지금은 낯설다.

 

상원사의 창건 시기와 창건주에 대해서는 알려진 사실이 전혀 없다.  "太古和尙語錄附錄에 상원사에 대하여 짧게 기록하고 있는 것이 지금까지 알려진 상원사에 대한 가장 이른 시기의 기록이다. 이에 의하면 고려 충숙왕17(1330)년 普愚 화상이 이곳에 들어와 관음보살에게 예배하고 고행 정진하면서 12가지 서원을 세웠다고 한다.

 

보우화상(1301~1382년)은 옛 양근현, 즉 현재의 양평군 대원리에서 태어났으며, 공민왕16(1367)년에 용문산에 들어와 사나사를 중건하였고 우왕8(1382)년에 용문산 小雪庵에서 입적하는 등 용문산과 밀접한 관련을 지니고 있다. 또한 용문산에는 菩提寺(10세기 창건)를 비롯하여 용문사(913년 창건), 사나사(923년 창건) 등이 모두 10세기경에 번성하여 경영되고 있었으며, 상원사는 용문사와 보리사 및 사나사를 잇는 교통로상에 위치하고 있다.

 

또한 고려 말 조선 초 대문호였던 목은 이색이 1379년 5월에 지은「砥平縣彌智山竹杖菴重營記」에도 상원사라는 이름이 등장한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볼 때 상원사는 적어도 고려 말인 14세기에는 법등을 이어가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봉은본말사지」에 의하면 상원사는 창건은 알 수 없으며, 조선 태조7(1398)년에 祖眼 화상이 중건하였다고 한다. 이후 조선시대 초기에는 왕실과의 관계로 인해 「조선왕조실록」에 기록이 보이고 있다. 우선「世宗實錄」 세종32(1450)년 1월 24일 기록에는“少尹 鄭孝康을 용문산의 上院寺에 보내 救病水陸齋를 베풀게 하다. 임금이 佛頂心·難哩를 베껴 써서 중들로 하여금 讀誦케 하려고 하니, ……(이하생략)”라 하여 이곳 상원사에서 救病水陸齋를 지냈다는 사실로 미루어 사세를 어느 정도 짐작해볼 수 있다.

 

「端宗實錄」에는 端宗 즉위(1452)년 령대군이 상원사 인근에 있는 자신의 별장에서 공장을 모아 종을 주조하는 중이었으며, 이것을 상원사에 봉안하려 하자 사헌부에서 저지하여 궁중에 두고 내리지 않았음을 기록하고 있다. 제작된 종을 상원사에 보시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효령대군은 상원사 아래 마을에 별장을 짓고 자주 이곳을 이용하였기 때문에 상원사는 효령대군의 願刹이 되었고, 그 사실이 「世祖實錄」에 기록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觀音現相記」(규장각6611·6612)에는 세조7(1462)년에 상원사에 관음이 나타난 이적을 기록되어 있으며, 같은 내용이 「한국사찰전서」에도 수록되어 있다. 특히 「觀音現相記」에는 글과 함께 당시 상원사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는 그림이 그려져 있어 주목된다. 비교적 높은 축대 위에 회랑을 돌렸으며, 그 안쪽으로는 마당을 중심으로 여러 전각을 배치하였다. 이러한 사찰의 모습은 고려 후기부터 산속에 위치한 소규모 사찰에서 나타나기 시작한 배치형식이다. 기록에는 曇華殿 위에 흰 구름이 위로 솟으면서 백의관세음보살로 변하였다는 내용이 있다. 그림의 중심에 도리통 3간 규모의 중층건물 뒤로 구름 위에 선 관세음보살상이 그려져 있는 것으로 보아 중층건물이 바로 담화전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세조8(1463)년에는 왕이 직접 상원사에 들른 바 있다. 한편 「世祖實錄」에는 세조9(1463)년 상원사의 승려가 관음보살이 현신하신 곳에 나아가서 이미 불전을 지었으나 불상을 만들지 못하였음을 아뢰었으나 세조는 자금 지원을 거절하고 있다. 이후 불상을 조성하였는지의 여부는 알 수 없다. 「明宗實錄」에는 명종8(1555)년 내수사에서 상원사 주변의 토지를 측량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이때까지도 상원사는 상당한 사세를 형성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1530년에 간행된 「新增東國輿地勝覽」 卷之八 砥平縣 <佛宇>條에서도 “上元寺 在彌智山 世祖嘗幸于此”라고 하는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시대 후기 상원사의 상황은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효종2(1656)년에 편찬된 「東國輿地志」를 비롯하여 18세기에 편찬된 「輿地圖書」와 「伽藍攷」 등의 문헌에서도 상원사가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적어도 18세기까지는 법등이 계속 이어지고 있었던 사실은 알 수 있다. 한편 이들 기록과 앞서의 기록을 통하여 상원사는 주로 ‘上元寺’로 표기되었고 현재처럼 ‘上院寺’로 표기되는 경우는 많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재월당. 소쇄원 광풍각 처럼 정자 또는 사랑채 당호. 양반집 현판으로 널리 애용되지만 사찰에서는 처음보았다. 요사 건물인 듯 인기척에 파란눈의 스님이 문을 열었다.

 

재월은 광풍제월 (光風霽月)에서 인용하였으며, "빛나는 바람과 비온 뒤 맑은 달"의 뜻으로 의역하면 가슴 속에 맑은 인품을 지닌 사람을 말한다. 황정견이 애련설의 저자 주돈이의 인품을 광풍재월로 표현하였으며 조선시대에 널리 회자되었다.

 

 

청운당. 재월당을 맞보고 있는 선방으로 상원사 위치와 잘 어울린다.

 

석불 대좌?

 

 

참 힘들어 보인다.

 

여러 부재의 조합이지만 고통에서 벗어 났으면.

 

 

 

처사님 말씀에 의하면 땅속에서 발견되었다고 한다.

 

굵은 꼬리꽁지가 시각적인 즐거움 이다.

 

석등. 석탑의 간주석 보다는 법당 기단위에 조성되었던 사자 같다.

 

사진...침향님

 

인기척에 요사를 나온 파란눈의 스님. 우리나라에 온지 3년 우리말이 유창했다.

 

그보다

 

철불을 찾아왔다는 말에 선방에 모셔진 불상이 개금한 철불로 보이지만

 

선원원장님이 출타중이라 보여줄 수 없다면 미안해 하셨다.

 

 

출처:양평군청

 

인연 맺지 못한 철불상. "불상의 양손은 개금시 나무로 만들어 끼워놓았으며, 전체 45cm인 금동불상으로 불신에 비하여 큰 머리를 가지고 있다. 특히 높이 솟은 육계는 조선 전기에 유행한 모습으로 육계위에 커다란 둥근 계주를 얹어 놓았는데 과장된 느낌을 주고 있다.

양눈은 중국 명대 불상에서 볼 수 있듯이 눈두덩이가 깊이 들어가고, 눈 꼬리가 많이 올라가 있다. 오뚝한 코, 미소를 머금은 입, 삼도의 표현을 볼 수 있다. 법의는 양어깨를 덮은 통견으로 오른쪽 어깨에 반원형의 주름이 표현되어 있으며, 전체적으로 조선전기의 양식을 띠고 있다."

 

 

 용문산 상원사

 

아직도

 

난 그 곳에 머물고 있는 듯하다.

 

가을이 깊을 즈음 들어가 삼동을 눈속에 묻혀 지내고 싶은데...

 

2009.03.16 

728x90
728x90

'경기도 > 양평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양평...파사성 마애불  (0) 2013.06.11
양평...불곡리 미륵불  (0) 2009.04.22
양평...지평리 삼층탑  (0) 2009.04.21
양평...사나사  (0) 2009.04.19
양평...옥천리 석탑. 당간지주  (0) 2009.04.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