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기사에서 용주사는 지호지간이었다. 하지만 창원에서 출발 어젯밤을 수원에서 보내고 수원화성 투어중인 유현과 약속 시간을 당겨 잡아 마음이 조급했다. 천왕문 앞에서 도킹하여 허기를 채우기 위해 식당을 찾았지만 용주사 근처에는 음식점이 없었다. 앎의 허기짐 보다 더 감내하기 힘든 인간적인 배고픔이건만 발길은 용주사를 들어서고 있었다.
사찰정보에서 창건 내력를 살펴보자. "용주사(龍珠寺)는 조선 제22대 임금인 정조(正祖)가 부친 사도세자(思悼世子, 1735~1762)의 능인 현륭원(顯隆園)의 능사(陵寺)로서 1790년에 건립하였는데, 이것이 실질적 창건이라고 할 만하다. 절이 세워진 자리는 신라 때 창건된 갈양사(葛陽寺)의 옛터였다.
용주사 천왕문은 가장 일반적인 배치로 사찰측에서 보아 좌측부터 비파-동방 지국천. 칼-남방 증장천. 용과 여의주-서방 광목천. 삼지창과 탑 -북방 다문천이 외호하고 있다. 천왕문부터 외삼문까지의 공간이 가장 낮은 권역이며 효행박물관이 들어서있다.
효행박물관 앞 오층석탑. 위치로 미루어 이건되어 온 석탑으로 2기단, 오층탑으로 고려시대 석탑으로 알려져 있다. 두어기 석탑의 조합으로 보이며 5층은 복원된 듯하다.
하기단에는 네면에 안상과 귀꽃이 피어있으며 상기단에도 문비(?)가 보인다.
옥개받침은 1~3층은 4단, 4~5층은 2단이다.
1층 몸돌 앞뒤면에 문비와 자물쇠를 양각하여 이채롭다
홍살문
용주사는 산지 중정의 영남지방 사찰. 평지 가람의 호남사찰에 익숙한 객에게는 혼돈을 초래하기에 충분한 구조로 효행박물관을 나와 외삼문으로 방향을 잡으면 향교. 서원. 사당처럼 홍살문이 마주한다.
홍살은 쉽게 만날 수 있지만 용주사 홍살문은 신성공간이라는 의미 외에 아버지 사도세자의 명복을 빌기위해 용주사를 창건하고 호성전에 사도세자 위패를 모셨기 정조의 원찰이라는 상징성을 함축하고 있다.
용주사 자료에 의하면 용주사에서는 사도세자와 경의황후(혜경궁홍씨), 정조대왕과 효의왕후의 위패를 모시고 일 년에 여섯 번의 재를 모셔 왔다 한다. 그러나 1907년을 끝으로 일제강점기 이후로 중단되어 왔다. 100년 만에 사도세자 제246주기 제향을 모시면서 홍살문을 복원하였다고 한다.
외삼문의 죽농 안순환의 용주사 현판
외삼문
용주사에서는 향교나 대가집 솟을삼문처럼 사찰에 유례가 없는 외삼문과 옆으로 길게 행랑이 달려있다. 이런 독특한 구조는 사도세자의 재궁(齋宮), 즉 능사(陵寺)로 지어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재미 있는 것은 삼문 양편에 두 마리의 해태상이 자리하고 있다. 물론 화재 예방이라는 비보책으로 조성되었겠지만 익살스러운 표정이다.
외삼문에 천보루로 이어지는 용주사 가람배치의 두번째 단 천보루 앞 석탑. 역시 제위치인지 의아스럽다.사이에 있다. 단층 기단의 오층석탑은 전하는 바에 따르면 1702년에 성정(性淨) 스님이 사리 2과를 사리병에 담아 석탑에 안치하였다고 한다. 몸돌에는 우주가 보이고 상륜에는 노반.복발,앙화.보주가 남아 있다.
천보루.하늘이 보호한다는 루대이다. 대웅전으로 누하 진입 공간으로 다른 사찰과 달리 석주이며, 용마루 뿐만 아니라 합각마루에도 용두를 올려 다른 사찰과 차별를 염두에 둔듯한 구성으로 왕실과 관련성을 함축한다고 보여진다. 그러나 이층루 바깥쪽에 쪽마루를 설치한 것은 사찰에서 쉽게 볼 수 없는 구조이다.
천보루 좌우 전각은 나유타료(승방) 및 만수리실(선당)로 알려져 있으며 천보루 용마루 용두 처럼 장방형의 네벌기단을 사용 일반민가와 차별화 되었다. 천보루와 좌우 건물은 대웅전에서 바라보면 산지가람 口자 배치의 전형이다.
천보루 좌측 나유타료의 장방형 네벌 기단
대웅전 계단의 소맷돌
용주사의 세번째 대웅보전 구역. 다른 사찰과 달리 기단위 좌우에 노주석이 설치되어 있다. 1790년에 조성한 전각으로 정측면 3*3칸 겹처마 다포계 팔작지붕으로 천보루와 같이 합각마루에도 용두로 장식했다. 다른사찰과 달리 좌우에 단칸전각속에 법고와 범종을 설치하였다.
대웅보전과 법고각(앞)과 멀리 범종각
용주사 답사 동선에서 놓칠 수 없는 포인트가 대웅보전 후불 탱화이다. 하지만 오늘은 제를 주관하시는 스님의 염불 대문에 감히 법당에 출입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문화재청 자료를 가져오니 우리님들 답사시에 참고하길 바란다.
문화재청 사진
조선 정조(正祖)가 아버지 사도세자(思悼世子)의 능사(陵寺)로 중창한 용주사의 대웅전에 후불탱화(불상 뒤에 모셔두는 불화)로 봉안되어 있는 이 그림은 단원 김홍도(檀園 金弘道)(1745∼?)가 그렸다고 구전되어온 것이다. 정조 14년(1790)에 전국 각지에서 각 분야별로 이름난 명장(名匠)들을 불러모았는데『본사제반서화조작등제인방어(本寺諸般書畵造作等諸人芳御)』에는 '대웅전보탑불탱삼세여래체화원정풍현감김홍도(大雄殿寶榻佛幀三世如來體畵員廷豊縣監金弘道)'라고 하여 이 후불탱화가 당시 연풍현감인 김홍도의 작품임을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이 그림의 밑단에는 일반적인 불화의 형식과는 달리 이례적으로 화기(畵記)가 적혀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양식적으로도 김홍도의 화풍과 차이가 커 김홍도의 진작(眞作)으로 단정하기는 어렵다.
채색은 삼세불의 법의(法衣)와 석가의 광배(부처나 보살의 머리나 몸에서 나오는 빛을 조형화한 것으로 두광과 신광이 있다)에 홍색을 칠하고 대좌(부처·보살·천인·승려 등이 앉거나 서는 자리를 말하는데, 일반적으로 불상을 안치한다)는 청연화(靑蓮花)로 표현해 청홍(靑紅)의 대비를 보인다. 인물들의 얼굴과 드러난 신체 부분에는 갈색빛이 감도는 살색을 썼는데, 코를 비롯한 앞으로 나온 부분은 백색으로 처리했고, 두광에는 어두운 녹색을, 기타 부분에는 간간이 흑색과 백색을 섞어 썼다.
필선(筆線)은 비교적 딱딱한 편이나, 모든 존상의 얼굴과 손에 서양화의 음영법(陰影法)을 구사했는데, 이렇듯 조선 후기 불화로서 독특한 음영법을 구사한 경우는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걸쳐 보이는 특징으로 주로 이 시기에 경기 지역에서 활동한 화파(畵派)의 작품들에 보이는 표현수법이다. 또한 용주사 대웅전에도 똑같은 수법으로 그려진 칠성탱화가 봉안되어 있다.
용주사 범종.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신라시대 동종인 에밀래종.상원사종의 계보를 잇는 고려 초기의 범종으로 볼록한 유두로 미루어 상원사 계열으로 보인다. 상.하대가 분명하고 종신에는 전 후에 비천을 새겼고 그 사이에 연화대좌 위에 삼존불을 모셨다.
용통이 보이고 용뉴는 용이 여의주를 물고 두 발로 힘차게 몸을 들어 올리는 형상이다. 종신에는 주조연대(854년)를 새겼으나 854년은 신라 문성왕 재위기간으로 종을 제작 후 후대에 새긴 명문으로 알려져 있다.
부모은중경 탑으로 효행박물관과 더불어 정조의 효행을 기린 탑이다.
정조대왕이 사도세자의 제각으로 세운 호성전 내부 위패. 호성전에는 사도세자, 정조대왕, 경의황후(혜경궁 홍씨), 효의왕후 김씨(정조의 왕비) 위패다.
지장전 현판은 왜 세로일까?
시방칠등각. 독특한 전각으로 삼성각처럼 산신.칠성.나반존자를 모셨다. 시방(十方)은 동·서·남·북, 동북·동남·서남·서북, 상,하이며, 칠등(七燈)은 칠성, 즉 북두 칠성을 의미하여 결국 칠성각의 다른 이름이라 하겠다.
전강선사부도비. 전강선사(田岡禪師, 1898~1975)는 현대 한국의 대표적 고승이자 용주사의 정신적 지주이다. 입적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용주사 대중들에게 크게 추앙 받고 있는 것을 보면 그의 영향력이 어느 정도인가를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정조대왕의 효심이 가득한 가람 용주사. 우리님들도 향을 가슴에 품고 부모은중경을 음미해보길 빈다.
<< 첫째는, 아이를 잉태하고 지키고 보호해 주신 은혜 >> 2009.03.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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