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지 않은 하루해도 지칠 무렵 우리는 일사천리로 석남사에 도착했다. 방향 감각을 잃은 우리에게 진영숙님은 서운산 자락이며 청룡사 뒷쪽이라고 간단명료하게 설명하셨다. 지금은 카페 활동이 뜸한 수원에 거주하시는 회원께서 내가 두 번이나 안성 답사를 했지만 석남사가 미답처라는 이야기에 다음에는 꼭 놓치지 말라던 말씀이 새롭다.
경남 언양의 석남사 이미지 때문에 단촐한 전각과 비구니 가람일거라는 선입견이 있었지만 예상보다 기품과 격이 배여 있는 가람으로 느껴졌다. 언양 석남사가 아기자기한 여성적인 정갈한 멋이라면 안성 석남사는 부드러움을 간직하면서도 남성적인 직선의 미와 위계질서가 느껴졌다. 주지 스님께서 부재중이셨지만 순례객에게 차를 권하시는 분이라고 하신다.
루하에서 바라본 대웅전과 영산전
"석남사의 역사를 적은 『석남사사기(石南寺事記)』에 따르면, 석남사는 신라 문무왕 27년 고승 담화(曇華)가 처음 지었다고 한다. 복연지지(福緣之地)를 찾고 있었는데 담화는 이곳에 서린 상서로운 기운을 보고 사찰을 조성하였다고 한다. 그는 공중에 백무지개가 금광성의 용지를 둘러싼 광경을 목격하고 옥석이 반반한 곳을 찾아 3년 만에 대찰을 창건하였다. 이후 왕과 대신들이 존경하며 불교에 귀의하였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
오층탑 2기
중정에서 대웅전으로 오르는 길 영산전 영역에 오층탑 2기가 위치 한다. 경주 지역 화강암과 달리 회색이 진하며 두 탑 모두 탑신의 비례가 맞지 않고 부재도 완전 하지 않다. 고려말 조선초 탑으로 알려져 있다. 탑의 위치로 미루어 영산전과 어울리지 않으며 후에 이건한 상위 영역의 대웅전과 어울린다.
영산전 앞의 탑은 지대석 위에 1기단. 기단의 폭이 좁아 갑석이 어색해보이며 옥개석과 몸돌 하나가 멸실되었다. 조층 몸돌에는 감실을 두었으며 옥개 받침은 삼단, 상륜에는 노반과 복발이 보인다.
보물 제823호 영산전. 얕은 기단, 주초에는그랭이질도 보이고 , 고막이는 통으로 마감했다. 정면 3칸, 측면 2칸, 다포, 겹처마 팔작지붕이다. 공포가 조선중ㅇ기 특징을 가지고 있는 17세기에 지은 전각이라고 하지만 날렵하면서도 가벼워 보이지 않는 까닭이 균형감 때문일까 라는 생각외에는 건축의미에 대해서는 화중지병이건만 동행한 노을누리는 미를 찾아 분주하다.
멀리 보이는 대웅전. 인공적인 조형에도 불구하고 거만하거나 사치롭지 않다. 한 계단 한 계단 정이 느껴진다. 영조 1년(1725)에 해원선사가 대웅전과 영산전의 기와를 갈았다고 전해지고 있으며「雍正 四(三)年 乙巳 三月日 造成」이라고 쓰여진 대웅전 숫기와가 발견되어 1725년에 대웅전이 지어졌음을 알 수 있으며, 1978년에 영산전 앞에 있었던 것을 현 위치로 옮겼다고 한다.
측면을 영산전과 달리 3칸으로 구성한 것도 그런 이유일까? 아무튼 남도 절집 부도 순례시에도 회자 되는 동선이 여기서도 유효한 모앙이다.
대웅전 삼존불. 석가모니불과 좌우 협시보살의 보현, 문수보살
보고 또 보아도 정겹다
마애불. 석남사 입구 왼쪽 편에 위치해 있다.
질감이 약한 마애불은 연화대좌위에 서 있으며 광배는 두광과 신광을 갖춘 거신광이며 두광과 신광은 3중 원으로 표현 하였다. 소발에 육계. 이목구비가 비교적 작으며, 삼도,법의 통견, 승각기에 띠 매듭의 매무새가 곱다.
법의는 복부까지 'U'자로 표현하고, 무릎에는 타원형으로 주름을 표현하였다. 수인은 아미타 수인으로 보인다. 손이 너무 작게 표현되어 문득 우리 마누라의 작은 손이 생각나더라. 봉안 시기는 고려초기 또는 통일신라 후기로 보는 견해도 있다.
갈 길은 멀건만 발길은 떨어지지 않는다.
觀水洗心
2009.03.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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