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광역시/대구시

고모령을 아시나요?

임병기(선과) 2009. 3. 12. 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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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한국인에게 애창되는 트로트의 한 곡인 '비내리는 고모령'은 많은 사람들은 알고 있으며, 한 소절 정도는 누구나 흥얼거린 경험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고모령이 대구 근교의 작은 고개임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나 처럼 돈 안되고 무용한 추억과 볼거리에 관심 많은 중생들은 익히 알고 있지만. 시간이 되면 나들이 한 번 해보길 바란다.

 

고모령은 망우공원. 즉 대구 만촌동 파크호텔 뒷편에서 팔현마을로 넘어가는 고개다. 현재로 과거를 짚을 수 없지만 지금은 얕은 언덕길에 불과하다. 그나마 휘황찬란과 호텔과 경부선 철로를 사이에 두고 옹색하기 그지없었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2군사령부에서 시작하여 고산 까지 도로공사가 진행중이다.

 

고모령과 고모역 사이의 개발의 변방이었던 팔현마을 마져 소음으로 요란하다. 고향. 어머니와 이별 하며 눈물 뿌리던 지난날  처럼 건너 금호강 습지를 찾아들던 철새도 길을 잃지 않을런지......

 

비 내리는 고모령...호동아 작사.박시춘 작곡

 

1.어머님의 손을 놓고 돌아설 때엔
  부엉새도 울었다오 나도 울었소
  가랑잎이 휘날리는 산마루턱을
  넘어 오던 그 날 밤이 그리웁고나

2.맨드라미 피고 지고 몇 해이던가
  물방앗간 뒷전에서 맺은 사랑아
  어이해서 못 잊느냐 망향초 신세
  비 내리던 고모령을 언제 넘느냐

3.눈물어린 인생고개 몇 고개이더냐
  장명등이 깜박이는 주막집에서
  손바닥에  써인 하소 적어가면서
  오늘 밤도 불러본다 망향의 노래

  

비내리는 고모령 노래비...출처(http://blog.daum.net/ohhsok/15637805)

 

다음 백과사전에 글을 가져왔다. "현인과 함께 히트작을 많이 낸 유호와 박시춘 콤비의 작품이다. 유호의 필명인 호동아 작사, 박시춘 작곡의 〈비나리는 고모령〉이라는 제목으로 1948년에 발표되었다.노래의 배경은 대구 수성구 만촌동에 있는 고개인 고모령(顧母嶺)이다.

 

일제 강점기에 이 곳이 진병이나 징용으로 멀리 떠나는 자식과 어머니가 이별하던 장소였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별의 사연을 담은 노래를 만들었다는 설을 비롯해 유래에 대해 여러 일화가 전한다. 발표 당시에는 이 지역이 경북 경산군이었으며, 인근에는 경부선 철도역인 고모역이 있다.

 

가사는 "어머님의 손을 놓고 돌아설 때엔 부엉새도 울었다오 나도 울었소"라는 슬픈 내용으로 시작하여, 고모령에서 어머니와 헤어진 화자가 오랫동안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고 그리워하는 심정을 서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노래 속의 고모령은 한 맺힌 이별의 장소로 그려지며 "눈물 어린 인생고개"로 은유되기도 한다.

 

이 곡은 "어머니의 존재를 녹여 당시 대중들의 가슴을 울"린 민중적인 노래였다는 해석이 있다. 스스로를 "망향초 신세"라 자조하면서 비통하게 향수를 달래는 내용은 태평양 전쟁과 한국전쟁으로 많은 사람들이 오랫동안 고향을 떠나거나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져야 했던 격동기의 시대 상황과 잘 어우러졌고, 이후 오랫동안 애창되었다. 1969년에는 임권택 연출로 이 노래의 제목을 딴 동명의 멜로 영화가 제작되기도 했다.

 

한국방송의 성인가요 프로그램인 《가요무대》가 2005년에 방송 20돌을 맞아 이 프로그램을 통해 가장 많이 방송된 노래를 발표했을 때, 〈울고 넘는 박달재〉와 〈찔레꽃〉에 이어 전체 순위 3위를 차지하여 꾸준한 인기를 입증했다. 2001년에는 노래의 무대인 고모령에 노래비가 세워졌다. 앞면에는 노래의 가사가, 뒷면에는 이 노래가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어머니를 향한 영원한 사모곡(思母曲)으로 널리 애창되기를 바란다"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서글픈 현실. 기차도 서지 않고. 대합실은 폐쇄되었으며 고모역은 철망에 갇혀 버렸다.

 

갇힌 역. 무너져 내린 정

 

이제 역사가 된 이별이 소설로 영화로 살아 났으면 좋으련만

 

 

우린

 

너무 많이 잃고,버리고 살지 않는가?

 

후손들은 간이역, 나이 든 역장. 가을 간이역 코스모스의 느낌을 살릴 수 있을까?

 

 

고모역에 가면... 박해수

고모역에 가면
옛날 어머니의 눈물이
모여 산다

뒤돌아보면 옛 역은 스러지고
시래기 줄에 얽혀 살던
허기진 시절의
허기진 가족들

 

아, 바스라지고 부서진 옛 기억들
부엉새 소리만 녹슨다


논두렁 사라진
달빛, 화물열차는 몸 무거워
달빛까지 함께 싣고
쉬어 가던 역이다


고모역에 가면
어머니의 손재봉틀처럼
덜커덩. 덜커덩거리는 화물열차만
꽁지 빠진 새처럼
검은 물새 떼처럼
허기지게 날아가는


그 옛날, 고모역 선로 위에서
아, 이즈러진 저 달이
아, 이즈러진 저 달이


머니의 눈물처럼 그렁그렁
옛 달처럼 덩그러니 걸려 있구나


옛 달처럼 덩그라니 걸려 있는
슬픔처럼 비껴 서 있는
그 옛날 고모역에서,...

 

 

무엇이 저리 바쁜지 나같은 놈 보기 싫다는 듯, 광속(?)으로 통과하는 열차.그옛날을  되돌리고 접어 조선 일보 기사를 들추어 보았다.

 

"고모역은 1925년 11월 1일 간이역으로 출발했다. 공교롭게도 문을 닫는 날이 생일이다. 승객이 증가하면서 1931년 보통역으로 개편됐으며 70년대에는 연 5만4,000여명이 이용할 정도로 붐볐다. 당시 아침에는 주민들이 완행열차로 대구역에서 내려 인근 번개시장과 칠성시장에서 채소를 팔았고, 밤에는 군부대 전세열차에서 내린 신병들을 보기 위해 부모들이 먼 발치에서 발을 구르는 풍경이 일상사였다. 주민들은 "고모역 주변에 군부대가 많아 각종 교육과 훈련을 위한 병력이동이 잦았는데 부모들이 자식 얼굴 한번 보려고 역 인근에서 진을 쳤다"고 회상했다.

고모역은 또 잦은 열차사고로도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다. 81년 5월14일에는 부산을 출발, 경산역을 통과한 특급열차가 건널목을 지나던 오토바이와 부딪힌 후 사고처리를 위해 후진하던 중 뒤따라오던 보통급행열차와 충돌, 50여명이 숨지고 240여명이 다쳤다. 또 2003년 8월8일에는 하행선 무궁화호 열차가 고모역 통과직후 정차중인 화물열차를 추돌, 2명이 숨지고 90여명이 다치는 등 크고 작은 사고가 끊이지 않았다.

91년 9월27일에는 한국일보 사진부 김문호(당시 29세) 기자가 고모령을 취재하다 뒤쪽에서 달려오는 열차에 부딪혀 숨지기도 했다. 지금도 인터불고호텔 진입로 사거리에는 '이곳 경부선 철길은 그가 달려간 마지막 현장이다'고 새겨진 '김문호 기자 불망비'가 '비내리는 고모령' 노래비와 함께 서있다. 고모역 바로 맞은편에서 '고모상점'을 운영하고 있는 최정열(57ㆍ여)씨는 "사고 당일 끓여준 라면이 이 청년의 마지막 식사가 될 줄은 몰랐다"며 "가끔 꽃 한송이에 소주 한잔 올린다"며 안타까워 했다."

 

 

고모역...대구 광역시 수성구 고모동 384 - 1

 

  1925.  11.  01.  역사 신축 착공

  1931.  06.  05.  보통역으로 승격

  1949.  11.  12.  역사 소실

  1957.  09.  29.  역사 신축 준공

  2004.  07.  15.  여객취급 중지

  2006.  11.  01.  고모역 폐쇄

 

 

 이기와 보존

 

철로 처럼 영원한 평행선일까? 

 

2009.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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