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상주시

상주...운흥리 석탑. 용호리 석탑

임병기(선과) 2009. 1. 30. 07:57
728x90
728x90

 

 

미타사 석축

 

행정구역은 상주시 화북면 운흥리지만 괴산 청전. 문경 농암. 속리산과 이웃한 상주의 최북단이었다. 답사매니아에게는 익숙한 상오리 탑을 지나 청전방향으로 제법 길을 더해야한다. 큰길에서도 좁고 높은 산길을 한 눈 팔지 않고 오르면 절골에 미타사가 위치하고 있다.

 

신라시대 이곳에 용화사라는 사찰이 있었다고 전해오며, 미타사는 용화사 산내 암자가 있었던 터로 추정하고 있다. "이곳은 조선 팔도명산중의 하나로 황용도강혈이라 용이 번쩍이면 구름이 인다하여 절이름은 용화(용화는 운흥중벌을 통칭하기도 함) 마을 이름은 운흥으로 명명되었다."고 한다. 

 

 

거추장스런 울타리도 필요없는, 바람도 넘나들고, 산새도 쉬어가는 골깊은 산내 암자 미타사. 소박하고 천연한 꾸밈없는 절집이다. 화려하지 않고 드러나지 않은 단청과 조용한 분위기지만 기품이 느껴진다. 그래서일까? 추운 겨울 깊은 산골에 찾아온 객의 인기척에도 적막강산인 요사를 향해 따뜻한 물 한잔 청하기도 쉽지 않았다.

 

 

산신각. 스님을 만났더라면 여쭈어 보았겠지만, 단청 재료가 천연 재료 처럼 보인다. 요즈음 절집 단청에는 화학안료가 주로 사용되어 전남 광양 중흥사 스님은 차라리 단청을 하지 않는다는 말씀이 떠올랐다. 차분한 단청의 절집 분위기로는 비구니 스님이 주석하는 듯 정갈하기 그지 없었다.

 

 

문화유적 총람에 기술한 내용과 현재 부재는 서로 상이하다.

 

"미타사 내에 있는 운흥 리 오층석탑은 원래 이곳 사지에 있었던 것으로 1970년경에 옮긴 것이라 한다.현재의 석탑은 4층옥신(四層屋身)과 옥개(屋蓋), 5층옥개(五層屋蓋), 그리고 노반(露盤)만 남아 있다. 4층옥신의 각 면에는 양 우주(隅注)가 각출(刻出)되었다. 오층 옥개 위에는 방 형(方形)의 노반이 5층옥개와 한 석재로 만들어져 올려 있다. 탑의 조성형태와 양식은 고려시대의 것으로 추정된다."

 

 

또다른 석탑 부재. 색상이 위의 탑 부재와 어울리지 않는다.

 

부도

 

부도의 주인공 혜일선사 일화를 상주시청 홈에서 가져왔다. "창건주인 혜일선사(비구니)는 1896년 제천에서 출생하여 평범한 한 여인으로 세속에 일찍 출가하여 남편과 자녀를 가진 아녀자였다. 나이 삼십에 이르러 인생의 보다 높은 길을 생각한 것이 수도의 길이였다. 그러나 한 가정의 지어미가 된 아녀자로 그 길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리하여 부군에게 구도의 길을 부탁하니 도를 닦겠다는 사람을 막아서 되겠느냐는 것이었다. 남편의 말씀을 듣고보니 감격과 비애가 엇갈렸다.


그것은 남편의 너무나 고마우신 뜻과 자식과 남편의 뒷날을 생각하면 그 허락만으로는 쉽게 출가의 길에 오를 수 없었다. 그래서 당시의 명문대가의 젊은 새댁이 행상인을 가장하여 방방곡곡을 다니면서 규수를 고르는 매파가 되어 문경의 백씨문중에 한처녀를 중매하여 부군의 새아내로 맞이하였다. 요즘말로 하면 속아서 멀쩡한 처녀가 남의 첩이된 격이었으나 불가(佛家)의 말로 전생인연이었던지 세사람은 조금도 불편한 삶이 없었다고 한다.


그후 그는 재가 수도인으로 남편과 새 새댁의 도움으로 십여년 수도하다가 44세가 되어 입산의 길에 올랐다. 천성이 관후하고 자심이 돈독한 그는 마음껏 정진하고 싶어 그후 미타사를 지었다. 그의 수도 행각은 지면에 낱낱이 열거할 수 없고 여기서 맺으려 한다. 출가하여 승랍(승려나이)이 16년, 수도생활 총28년, 1966년 세수 71세의 나이로 입적하였다. 다비(화장)하니 전신이 사리로 뭉쳐있었다."

 

 미타사 중정에서 바라본 전경

 

 

예전 답사길에 들렸던 신봉리 관음보살을 뵙고 상룡리 석불을 수소문했지만 도난당했다는 주민의 말씀에 씁쓸하기 그지 없었다. 언제까지 한심한 작태가 되풀이 될런지 모르겠다. 화서 반송도 두번째지만 동행한 님들을 위해 들렸으며 글은 문화재청에서 가져왔다.

 

"반송(盤松)은 소나무의 한 품종으로 소나무와 비슷하지만 밑동에서부터 여러갈래로 갈라져서 원줄기와 가지의 구별이 없고, 전체적으로 우산의 모습을 하고 있다.  마을 건너편 논 가운데에서 자라고 있는 이 반송의 나이는 500년 정도로 추정되며, 높이가 15.3m, 둘레는 5.17m∼2.23m정도이다. 밑동부터 크게 둘로 갈라져 있어서 바라보는 장소에 따라서 한 그루 같기도 하고, 두 그루처럼 보이기도 하며 나무의 모양이 탑같이 보인다고 해서 탑송(塔松)이라고도 한다.

마을사람들은 이 나무를 매우 신성하게 여겨 나무를 다치게 하는 것은 물론 낙엽만 긁어 가도 천벌을 받는다고 믿었고, 매년 정월 대보름에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비는 제사를 지내며 이 나무를 소중히 보호하고 있다. "

 

 

네비의 안내로 일사천리로 달려 탑골 안내문을 따라 모동면 용호리 석탑을 찾았다. 문화재 총람에서 자료를 옮겨 왔다.

 

"이 곳 주민들에 의하면 자화산 동쪽에 용문지(龍門址)가 있는데, 용 호리 삼층석탑은 거기서 옮기어 온 것이라 전한다. 현지에는 아직도 석재가 잔존하고 있다. 석탑은 완전한 상태가 아니며 기단부의 상층면석과 탑신부의 삼층옥신 이상이 결실되어 있다. 이 탑은 기 단부의 구조나 하대면석의 안상(眼象)과 삼산형(三山形) 귀꽃 등이 고려 시대의 형식을 잘 나타내고 있다. 양식과 각부의 수법으로 보 아 고려 중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높이 1.93m ,지대석 길이 1.47m이다."

 

 

상기단 면석이 멸실되었으며 갑석과 한 돌인 초층 몸돌받침이 유난히 높다. 안상속의 삼산형 귀꽃 사진은 어디로 갔는지?

 

 

청도 장연사지 쌍탑이 감나무닢이 떨어져 노란 감이 주렁주렁 달린 만추가 제맛이라면, 용호리 석탑은 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포도가 절정인 여름날이 제격일 것 같다. 그즈음 용호리 석탑을 멀리서 바라보면망망대해 같은 파란 포도밭을 해치며 바람에 갈 길을 맡긴 일엽편주의 돛대처럼 보이지 않겠는가? 

 

2009.01.10 

728x90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