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상주시

상주...오대동 석불. 낙서리 석불

임병기(선과) 2009. 1. 24. 0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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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지정 문화재 찾는 길은 모랫속 바늘 찾기 만큼 어렵다. 우선 비지정 목록을 여러 경로를 조사해야만 알 수 있다. 문화재청이든 지자체는 변변한 자료가 없기 때문이다. 우여곡절 끝엔 근처에 와서도 수소문 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아 심지어는 발길 돌리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오대동 석불좌상을 만나기위해 마을 입구에 와서도 빙빙 맴돌다가 마을 표시석에 부치골(?) 이란 지명을 발견하여 마을 안골목으로 들어섰지만 묘소만 보인다. 묘소? 얕은 방형 봉분에 토담이 둘러져 있어 호기심을 자극했다. 담너머 보이는 묘 앞의 상석이 탑 옥개석이라 석불이 지근에 있음을 알려준다.

 

봉분은 무덤이 아니라 단소(壇所)로 무덤이 없는 분을 위해 마련한 제단으로 일반 민가의 사당, 향교 대성전, 서원의 제향공간처럼 성스런 공간임을 상징하여 낮은 담과 대문을 조성하였다. 정확히는 모르지만 동행한 님이 답사후 알려준 바로는 "전주 이씨 원천군 단소"라고 한다.

 

 

추운 날씨에 마을사람은 아랫목에서 두문불출하여 마을을 훔쳐가도 모를 만큼 적막강산이다. 어렵게 수소문하여 마을 뒤를 오르니 멀리 정자가 보인다. '가운정" 여름날에는 마을 사람들의 휴식공간으로 손색이 없어 보이지만 예전에는 전주 이씨(?)집안의 자랑이었을 것이다.

 

생각해 보라. 가운(駕雲)이라는 정자명이 보통 이름과는 사뭇 다르지 않는가?  문득 의성 고운사 가운루가 생각난다. 구름위에 걸터 앉은......

 

 

지금은 많이 퇴색하였지만 고풍스럽고 격조 높은 가운정 옆 시멘트 브록 속 석불. 그래도 웃음 지으신다. 이렇게라도 지키고 있으니 가운정을 찾는 답사객은 없어도 나를 만나러 오는 자네들이 있지 않은가 라고 말을 건낸듯 하다.

 

마을 뒷산 중턱에 절이 있었는데 수해로 인하여 절은 유실되고 불상이 떠내려오다가 땅속에 묻혀 있는 것을 안전한 지대로 옮겨 놓았으며  이 석조미륵이 있다하여 부처골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좌대와 불상이 부조화로 다른 부재의 조합으로 보인다. 동리 할머니들의 초, 향, 음식공양의 흔적이 보여 고마운 마음이 든다. 할머니 어머니에게 석불은 관청의 관심 유무, 먹물군상들의 야릇한 시각과 상관 없이 생로병사와 사후 세계를 보장하는 미륵이기 때문에 늘 동행하는 분이다.

 

좌대에는 복련이 고운 하대석, 삼산관 모양이 귀꽃이 안상에 보여 고려초기 이후로 판단된다. 항마촉지 수인. 승각기 위의 법의는 통견이다. 비교적 완벽한 불상으로 역시 상주시에서 지정 문화재 등록 노력이 필요한 문화재다.

 

 

문경에서 혼자 출발하여 오랫동안 기다리던 가인강산님을 만나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처음이라도 십년지기 처럼 편안한 나이.성별. 지위와 무관하게 우리문화 유산을 사랑하는 망형우(忘形友) 들이다.

 

내서면 낙서리.상락(상주)의 서쪽이 되므로 낙서리라 이름하였다. 미럭뜸마을은 미륵이 있다 하여 불리워지게 된 마을 앞에 불상은 계신다.

 

 

지방자치에서 비지정 문화재에 전각을 지어줄 만큼 예산, 관심이 없을 텐데..., 마을 사람들이 십시일반 추렴하여 오랜 세월 마을의 안녕과 무병을 지켜준 미륵불에 집을 마련했을 것 같다. 불상과 주형 거신광배가 한 돌이며. 모래성분이 많은 석질 때문에 마멸이 심하여 구분이 어렵다.

 

 

망가져 형태를 몰라도 이자리에 계셔야 합니다. 부모님들이 소풍을 마친 고향지만 출향민들의 노스탤져의 원형질이 바로 미륵불이기 때문 입니다.  우리사회는 너무도 많은 원형질을 망각해 가고 있습니다. 모든 사회악의 근원이 가슴 저변에 흐르는 원형, 기본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우리가 지켜야 합니다. 더이상 잃기전에...

 

2009.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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