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고령군

대가야...고령향교.지산동 당간지주

임병기(선과) 2009. 1. 5. 20:15
728x90

 

 

고령향교보다는 뒷편 연조 공원의 석탑.불상 부재를 만나기 위해 올랐었다. 부재는 없었다. 모르긴해도 박물관 개관과 더불어 옮긴 듯 하다. 2004.02.28일 연조공원에 들렸던 글을 가져온다. 향교와 당간지주글은 문화재청에서 가져왔다.

 

고령읍의 답사 의미를 해인사 원당암의 탑과 같은재질 모양의 반룡사 다층 석탑을 보기위한 여정이었음에도 결국 친견치 못할 것 같은 불안감이 엄습해온다. 반룡사에서 만난 스님도 사찰에 주석하신지가 불과 이틀 전이라며 소재를 알 수 없다고 하시어 깨구리님의 조언을 참고로 고령박물관의 위치를 수배했지만 그마저 아시는 분을 만날 수가 없다.

발길을 돌려 지산동의 통일신라의 잘 생긴 당간지주를 들렸지만 언제나 그러하듯 공해에 찌들고, 세파에 오염된 당간 앞에서 이제는 사찰이름도 알 수 없어 옛 영화마저 망각한 듯한 당간의 지친 모습을 보며, 나마져 지쳐가건만 아들놈은 지애비의 얼굴표정은 아랑곳 않고 군것질을 즐기며 행복한 모습이다.

토욜 늦은 오후라 군청에도 사람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 어렵게 만난 분에게 문의하여 새로 개관한 대가야 박물관을 소개 받아 들렸더니, 제기럴 아직 미개관이라 별 수 없이 왕릉박물관으로 발길 옮겼건만,상세 설명에도 불구하고 알아낸 것은 반룡사의 동종만 지하 수장고에 보관 중이라는 것과, 고령박물관의 유물을 대부분 대가야 박물관으로 옮겼으나 다층탑의 소재는 모르며 향교 앞 연조 공원을 소개해주신다.

문 닫힌 향교는 고령읍내를 굽어보는 높은 지역에 위치하고 있지만 크게 경사진 자리가 아님에도 향교배치의 전형과 달리 명륜당이 앞에 있는 이른바 전학후묘의 구조로,배치보다는 낮은 흙담 너머로 한가로이 내부를 조망할 수 있어 마음 넉넉해진다.

연조공원
고령지역에 흩어진 석조물을 수집 전시한 야외공원으로 멋대로 생겨 거부감을 주지 않는 비신과 이수가 멸실된 3기의 투박하고 작은 귀부,신라 전형과는 많이 략화되었지만 신라전형 이라는 안내문이 있는 2기의 3층탑(본디 2기단이나 하기단은 멸실되었고,그나마 1기는 2,3층 옥개석만 있다),

그리고 제짝이 아닌 광배를 갖춘 4기의 석불중 2기는 각각 왼손,오른손이 다른 지권인의 비로자나불이고,1기는 두상도 사라지고 없어 애처롭지만,나머지 2기의 석불에 대한 안내문을 읽고서는 고개가 갸웃거려진다.

"항마촉지 수인의 아미타불"이란다. 물론, 군위 제2 석굴암의 본존불도 항마촉지의 수인임에도 협시불로 인해 아미타불로 해석 하지만,협시불도 없음에도 이곳의 석불은 왜? 석가여래가 아님을 단정할 수 있을까?

흩어진 여러기의 석등 하대석 가운데 기단,팔각원등의 간주가 큼직한 화사석은 제짝이 아닌 석등이 눈에 들어오지만, 반룡사 다층탑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그럼,어디에 모셔져 있나? 이렇게 나를 거부하는 이유는 뭘까?

2004.02.28

 

고령향교.

 

향교는 공자와 여러 성현께 제사를 지내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해 나라에서 세운 교육기관이다.
고령향교는 처음 세운 자리와 연대를 정확히 알 수 없다. 또한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진 후 자리를 옮겨 다시 지었다고 전하는데 그 위치와 다시 지은 시기도 확실하지 않다. 다만 숙종 28년(1702)에 지금 있는 자리에 자리잡게 되었다고 한다. 지금의 향교터에는 절에서 사용한 듯한 석재가 많이 있어 향교를 짓기 전에는 절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지금 남아있는 건물로는 제사 공간인 5칸의 대성전과 동무·서무, 교육 기능을 수행하는 강당인 명륜당, 손님이 머무는 곳인 빈흥재, 내삼문, 외삼문 등이다.

 

 

제사지내는 공간 안에 빈흥재가 있고 학생들의 기숙사인 동재·서재가 없어 다른 향교와 차이를 보이고 있다. 대성전 안에는 공자를 비롯한 그 제자와 우리나라 성현들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나라에서 토지와 노비·책 등을 지원받아 학생들을 가르쳤으나 지금은 교육 기능은 없어지고 제사 기능만 남아 있다.

 

 

참 정겹다.

 

 

고령읍내 시장거리에 있다.

 

 

 당간지주는 동서쪽으로 서로 마주보고 서 있다. 안쪽 면에는 아무런 조각을 두지 않고, 바깥쪽 면에 양 모서리를 줄인 후 가장자리와 가운데에 세로띠를 도드라지게 새겨두었는데 그 모습이 장식적이고 화려하다.

 

 

앞뒤 두 면은 윗부분에 안상(眼象)모양으로 움푹 들어가게 새겨 놓았다. 꼭대기는 바깥으로 내려오면서 둥글게 깎여져 있으며, 3단으로 굴곡을 두었다. 안쪽 면의 아래위에는 당간을 고정시키기 위한 2개의 홈을 파놓았는데, 직사각형의 모습이다. 현재 아래부분은 묻혀 있어 받침의 모습을 알 수 없다.

단아한 조각솜씨와 그 수법에서 아름다움이 느껴지는 작품으로, 통일신라 중기인 8세기쯤에 만들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2008.12.25

728x90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