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고령군

대가야...가야조선소지, 상무사 기념관, 가야 벽화 고분

임병기(선과) 2009. 1. 6. 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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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행한 님에게 넌지시 물어 보았다. 내부에 들어 갈 수는 없지만 가야 유일의 고분벽화가 발견된 고분과 조선소터에 가 볼까?라는 말에 희미하게 미소만 짓는다.

 

不敢請이언정固所願이렸다!!

 

 

대가야 조선소지.여기서 건조된 목선이 회천, 낙동강을 건너 남해항로를 거쳐 중국으로 진출했을 것이다. 그러니 대가야의 해상 문물교류의 출발점이며 중국상단이 활보하는 교역의 중심가 였을가?

 

금관가야의 쇠퇴 이후 급격히 부상한 대가야가 신라 이사부에게 패배 멸망하기 전까지는 경남 하동, 남해는 물론, 여수,광양 등 해상 루트 주변지역을 장악하여 왜,중국으로 향하기 위해서는 우수한 선박이 절실히 요구되었고,  당시의 탁월한 노동력과 첨단 테크놀러지가 집약된 조선소가 바로 여긴 모양이다.

 

나의 대가야 역사에 일천한 상식으로 더이상 전개하지도 못하지만, 성공적인 관광 육성책으로 자주 회자되는 고령군청 홈페이지 어디에도 조선소지에 대한 자료가 없어 안타까울뿐이다.

 

 

 

고아동 벽화고분으로 오르는 얕은 산길. 주산에서 시작된 대가야 고분 등산로의 종착지라고 말하지만 출발지가 오히려 적절한 표현 아닌가? 처음부터 절정으로 시작되는 코스 보다는 서서히 크라이 막스를 향하는 전개가 극의 충실도를 높힌다는 믿음 때문에 그렇게 생각한다.

 

가야고분

 

"먼저 석실구조는 장축이 남북방향인 'ㄱ'자형 석실로서 연도는 현실 동벽의 연장선상에 있다. 현실과 연도의 벽은 할석으로 축조되었으며, 현실의 천정은 동·서 두 장벽을 상부에서 내경시켜 그 위에 4매의 개석을 덮은 터널형으로 만들었다. 연도는 현실보다 벽체를 낮게 수직으로 쌓고 7매의 개석을 덮어 편천정을 만들었다.

 

현실의 규모는 남북 길이 3.75m·동서 너비 2.82m·높이 3.12m. 연도는 남북 길이 4.82m·동서 너비 1.48m·높이 1.64m이다. 현실 바닥에는 남북방향으로 2개의 관대가 사이를 띄우고 같은 길이로 높이 9㎝ 가량 바닥 보다 높게 설치되어 있는데, 너비는 서쪽의 관대가 동쪽의 관대보다 약 40㎝ 가량 더 넓다."

 

 

고분벽화는 연화문을 그린 것으로 불교의 연화화생을 의미 한다면 가야의 남방불교도래설과 관련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개될텐데, 그건 나의 몫이 아니기에 그만 접겠다. 철문으로 출입을 차단한 고분 입구는 마치 석빙고의 날개벽 같다. 

 

고분 천장벽화...문화재청

 

"벽화는 현재 대부분의 회벽이 박락되었으나 현실 천정과 연도 천정의 개석에 희미하게 남아 있어 벽화의 내용이나 기법을 일부 살필 수 있다. 현실 및 연도 천정개석에는 회칠을 한 위에 적색, 녹색, 갈색의 안료로 연화문을 그리고 있다. 연화문은 화방을 중심으로 8판의 대소 2종의 연화를 겹친 복합연화이며 화판과 화판 사이에 꽃술이 하나씩 배치되어 있다.

 

화방은 녹색, 화판은 주연부 윤곽을 밝은 적색, 꽃술은 갈색으로 칠했고 중심부는 백색으로 남겨두었다. 이러한 모양의 연화는 현실 천정에는 5개 이상, 연도 천정에는 11개 정도 그려져 있는데, 대부분 지워져 윤곽만을 볼 수 있다. 현실과 연도 벽면 전체에도 두껍게 회벽을 바른 위에 벽화가 그려져 있었으나 대부분 박락되고 일부 흔적만 남아 있다."

 

 

조선소터에서 보이는 상무사기념관. 근자에 조성한 모양이다.

 

 

다음에서 검색(세계일보, blog.segye.com/koh )한 자료이다. "18세기 후반 전국적 상업망이 형성되면서 부보상은 조선시대의 또 다른 상인인 객주, 여각과 함께 향시에서 이뤄지는 상거래의 주역으로 발전했다. 고령상무사는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바탕으로 조선시대 고령장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조선부보상단을 일컬으며 1899년 상무사가 설립, 지금까지 그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부상 또는 보상이라는 명칭 대신 좌사, 우사라고 쓰게 된 것은 조선조 부보상단이 한때 부상단은 좌사, 보상단은 우사로 불리어진 것에 기인한다. 부상은 부피가 크고, 값이 싼 물품을 지게에 지고 다니며 생선, 소금, 목기, 토기, 무쇠, 미역, 무쇠그릇, 담배, 누룩, 대나무제품, 삿자리, 꿀 등을 팔았고, 보상은 부피가 작고 가벼우며 값진 배, 명주, 비단, 모시제품, 면화, 금, 은, 구리, 담비, 수달피, 가죽 등을 팔아 이를 구분해 취급했다.

 

 

고령 좌사계는 1886년 상단으로 정비 됐으며 우사계는 이보다 30여년 늦은 1899년 정부가 상무사를 설립하던 해에 결성됐다. 고령군은 이같은 상무사의 역사를 잇기 위해 지금까지 분리돼 오던 좌․우사를 통합, ‘오늘을 살아가는 전통상인 단체’로 거듭 태어나게 됐다."

 

 

상무사기념관에는 중요민속자료 30호로 지정된 전적, 나팔, 물금장, 인장 등 부보상 유품이 전시되어 있다. 추운데 들어와서 보라시던 상무사를 지키시는 어르신은 따뜻한 마음에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2008.12.25

*** 인용문은 문화재청에서 가져왔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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