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사 금당암(선원) 동서삼층탑 (08년 상반기 문화재청 답사기 입선작입니다.복사 및 스크랩 금합니다)
초파일만 산문을 개방하는 문경 봉암사, 은해사 백흥암도 답사했지만 동화사 금당선원은 출입할 기회가 없었다. 그러던 중에 전국 보물급 이상 탑을 직접 답사하고 사진을 촬영한 동호회원으로 부터 금당선원 동서탑이 보고 싶다는 부탁을 받고 지인을 통해 어렵게 출입을 허락 받았다. 사찰 사진을 주로 찍는 지인과 우리일행은 종무소에 인사드린 후 동화사 재무국장 법진 스님의 안내로 대웅전 건너편 계곡 너머에 위치한 금당선원으로 향했다. 동화사는 크게 대웅전, 비로암 그리고 금당선원 영역으로 구분되며 금당선원은 수행 공간이어서 출입이 자유롭지 못하다. 금당선원은 한국불교의 선맥을 지켜오는 도량으로 원래 금당암이 있던 곳이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신라 때 진표 율사로부터 팔간자를 전해 받은 심지 왕사가 이를 팔공산에 던져 떨어진 자리에 절을 지었으며 그곳이 바로 금당선원 자리라고 한다. 현재 당간지주 위치와 ‘금당(金堂)’이라는 명칭으로 미루어 보아 창건 당시에는 금당선원 영역이 사찰의 중심영역이었을 것이다.
옷깃을 여미며 들어가는 선원 초입에 만추의 서경을 가득 머금은 부도가 먼저 반긴다. 이곳에 옮기기 전에는 동화사 아랫마을에 있었던 팔각원당형의 고려 초 부도로 안상을 새긴 방형 지대석, 기단 상대석에는 앙련이 피어 있고 위로 받침을 갖춘 팔각몸돌과 골이 깊은 지붕돌을 올렸다.
금당선원의 출입문은 일반 민가 사랑채에서 별채로 통하는 작은 쪽문처럼 어떤 기교도 멋도 부리지 않고 찾는 사람을 맞이한다.
계단을 통해 들어서면 극락전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동화사에는 특이하게도 대웅전 중정에도 배례석이 있었지만, 극락전 중정에도 보인다. 일반적으로 배례석은 석탑, 석등 전면에 위치하여 공양물을 올리거나 올라서서 예를 갖추는 기능이다. 하지만 이 배례석은 극락전 중정에 있어 흥미롭다.
정면 5칸, 측면 3칸 극락전은 조선중기 목조건물의 형태도 간직하고 있지만 소위 가구식 기단이라 불리는 고식을 지녔다. 기단은 한 벌 지대석을 깔고 위에 면석을 세웠으며 탑기단처럼 우주와 탱주를 새기고 갑석으로 마무리했다.
갑석의 모퉁이는 탑 지대석이나 옥개석 모서리와 같이 면과 면이 만나는 곳을ㄱ자형으로 만들고 꺾이는 곳에 물매를 주었다. 책에서만 읽었던 고건축의 향기가 솔솔 풍기는 듯해서 발길이 쉬 떨어지지 않았다.
신라시대 건축 흔적이라고 하는 가구식 기단은 극락전 외에 문경 대승사, 월출산 도갑사 해탈문에서 보았다. 이곳에서 가까운 가창 남지장사 대웅전 기단에도 기단에 탱주가 보였었는데 작년 복원하면서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극락전은 기둥아래 초석, 바로 옆 나무주초, 신방목을 받쳤던 신방석, 문얼굴 하인방을 지탱하였던 고맥이돌까지 뚜렷하게 남아 있어 살펴보는 재미가 여간 즐거운 것이 아니다.
극락전 불단에는 1700년대에 조성한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을 주불로, 관세음보살입상, 대세지보살입상을 협시불로 봉안하였다. 탱화 없는 후벽이 오늘따라 허전하게 다가온다. 문화재는 제자리를 지킬 때가 가장 귀하고 성스러우며 아름다운 것이기에 국립박물관에 소장중인 후불탱화도 태어난 고향으로 귀향했으면 좋겠다. 금당암 동서탑(보물 248호)위치가 불변하였다는 가정 하에 극락전과 비교하여 재미있는 이야기를 전개해 보겠다. 금당을 중심에 두고 탑이 좌우에 조성된 사례가 있었던가? 만약에 극락전과 뒤편 수마제전 사이 빈 공간에 최초에 극락전이 있었다고 가정하면 현재 공간배치 의문점이 쉽게 풀리지 않을까?
정확하게 신라전형 1금당 쌍탑(보물 248호)의 충실한 가람배치가 된다. 금당, 쌍탑 사이의 거리는 물론 극락전 중정 배례석도 현재 동탑 옆에 모호하게 자리한 석등의 배례석 자리가 아닐까? 또한 창건당시에는 극락전이 아니라 다른 전각이었다면 수마제전으로 인하여 한 사찰에서 아마타불을 두 곳에 봉안한 미스터리가 풀릴 실마리가 될 것이다.
이런 가정이 성립하려면 극락전이 화재, 자연 재해 등으로 본래 위치에서 앞으로 이건 된 사적과 석등도 옮겼다는 기록이 있어야하겠지만 지금으로서는 탈고 안 될 소설에 불과하다. 법진 스님 말씀에 의하면 기울어진 극락전을 조만간 보수한다고 했다. 옛 기단을 활용하라는 말씀은 전했지만, 서두르지 말고 이번 기회에 극락전의 원래 위치를 포함하여 각계 전문가의 토론과 검증 고증을 거쳐 충분한 심의 후에 극락전을 복원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서탑 천년을 넘어 금당암과 영욕을 공유했을 서탑은 말이 없고, 늦가을의 단풍, 철 이르게 찾아 온 겨우살이와 오순도순 정겹게 이야기 나누며 짧은 만추의 햇볕을 즐기고 있는 듯하다.
서탑은 이중기단으로 상기단에는 탱주를 새겼으며, 상륜에는 노반과 찰주가 보이지만, 왠지 깔끔한 도회적인 느낌은 나만의 생각일까? 1957년 해체 보수할 때 1층 탑신석 윗면의 사리공에서 99개의 소탑을 비롯한 사리장치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동탑 동탑도 이중기단에 상기단, 하기단, 몸돌에는 우주와 탱주를 새겼다. 옥개석 받침은 4단이며 노반, 복발, 보륜, 보주가 남아있지만 20세기 초 보수로 인해 원형을 잃고 기형이 되어 버렸다.
즉 동탑 상기단 면석. 우주와 탱주를 터무니없게 대나무 마디처럼 모각하였다. 서탑을 복원 모델로 하였다면 원형을 간직했을 것이다. 동화사는 봉황의 자리이며 봉황은 오동나무에 둥지를 틀고 대나무 열매만 먹기 때문에 그래서 이렇게 복원했는가? 어처구니가 없다고 스님에게 말씀드렸더니 후일 전문가의 고증을 거쳐 복원하겠다고 했다.
동탑 배례석도 지나치게 높게 조성하였으며 면석에는 석탑 기단 갑석처럼 대나무 모양의 탱주를 모각하였다. 상기단 면석 역시 보수하면서 폭을 줄여 복원하여 신라탑의 안정감을 송두리째 앗아 가버렸다. 동탑에서 발견된 사리 1440과를 서탑에 나누어 모셨더니 밤중에 서탑 사리가 동탑으로 옮겨 갔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며 재미지게 너털웃음 지으며 말씀하셨다.
동탑 옆 석등은 화사석만 없다면 신라 전형 팔각원당형 석등이다. 역시 복원하면서 화창을 지나치게 비대하게 조성 복부가 비만하여 바지춤 밖으로 삐쳐 나온 뱃살처럼 보인다.
위치 또한 애매하여 금당 앞도 아니요 석탑 사이도 아니며 석탑 전후에도 자리하지 않았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처음에는 극락전 배례석 앞에 자리했었다는 믿음이 강하게 든다.
수마제전은 1702년에 창건된 건물로 전해지는 단아한 새색시 분위기의 전각이다. ‘수마제(須摩提)’는 서방극락을 칭하는 별명으로 ‘묘의· 호의’로 번역하며 수마제전 또한 극락전이라고 한다. 동화사 금당선원 영역 짧은 거리에 두 개의 극락전이 조성된 사실도 위에서 언급한 상상의 나래에 힘을 실어 준다.
수마제전 아미타불은 처음 본 순간 볼록하게 솟은 유두가 눈에 들어 왔다면 불경죄를 범하는 것인가? 백호, 나발, 계주가 표현되고 목에는 삼도가 뚜렷하며 법의는 통견이다. 가슴 아래에는 매듭 된 내의가 보이고 수인은 중품중생(?)의 아미타 수인이다.
금당선원 답사는 여러 번 다녀온 동화사 답사의 화룡점정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라 여기며 우리문화유산 공부를 꾸준히 계속하겠다고 다짐해본다. 귀한 자리 허락해주신 법진 스님께 거듭 감사드리며 동행한 동호회원과 함께 누린 짧은 늦가을 긴 여운을 남긴 답사로 오래 기억될 것 같다.
2007.11.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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