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북도/진안군

[스크랩] 진안...마이산 금당사 삼층탑. 강정리 오층탑

임병기(선과) 2008. 11. 30.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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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또는 답사로 마이산을 찾지 않은 분은 잘 없을거다. 나역시 아이들과 두어차례 다녀간 경험이 있다. 지금 이장면에서 촬영한 사진도 보관하고 있다."마이산(馬耳山)은 암마이봉(686.0m)과 숫마이봉(679.9m)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두 산봉우리가 서 있는 모양이 말의 귀 모양을 하고 있어 마이산으로 명명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마이산 산봉과 유사한 역암으로 된 탑 모양 또는 돔상의 지형은 마이산 동남쪽 약 2㎞ 지점에까지 10여 개소가 분포하는데 광대봉, 마두봉, 관암봉, 비룡대, 나옹암 등이 줄지어 있다.

마이산은 백악기의 마이산 역암으로 되어 있으며 그의 산체는 탑처럼 우뚝 솟은 모양을 이루는 것이 특징이다. 그리고 그의 풍화 표면에는 수 많은 풍화혈(tafoni)이 발달하고 있어 학술적인 가치도 매우 크며, 빙정의 쐐기작용에 의하여 생성된 것이다. 한편 마이산 부근에는 진안 평지리의 이팝나무(천연기념물 제214호)와 마이산의 줄사철나무 군락지(천연기념물 제380호)도 있어 식물상에도 다종다양함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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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산 금당사 일주문을 지나면서 오래전에 들었던  우리 나라 여러 사찰의 전설처럼 기우제와 괘불탱화에 대한 이야기를 떠올려 본다.

"옛날 이곳에서 수도하던 수도승의 생활은 신선과 같았고 부처님의 높은 도를 깨우친 분이었다고한다.
어느해 늦은 봄이었다. 매우 가뭄이 심하여 사람들은 금당사에서 수도하는 스님에게 찾아가 애원
하였다. 스님은 정색을 하며 기우제를 드리자고 하고 밤이되자 스님은 호랑이 등을 타고 어디론가
가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그 곳을 백자만 파라고 하였다. 처음에는 모두들 주저하였으나 스님의 말대로 파기 시작했고
드디어 백자가되는 땅속에서 부처님이 그려진 한 폭의 괘불이 나왔다. 이 괘불을 절에 걸고 기우제를
올리자 기다리던 비가 오기 시작하였다."


금당사 괘불탱 ..문화재청

 

일주문을 지나 고기 굽는 냄새 진동하는 사하촌 입구에서 대판 싸움이 벌어졌다. 사찰 관람료를 지불하라는 사람과 공원에 가기 때문에 사찰 입장료 낼 수 없다는 일단의 관광객과의 몸싸움이이었다. 결국에는 육두 문자가 난무하고 주먹이 오고가는 지경이었다. 보시 하듯이 생각하면 좋을텐데...


"지금도 가뭄이 심할때면 금당사에서 괘불을 걸어놓고 기우제를 지내면 틀림없이 비가 온다고 한다.

어느 날 스님의 제자 여럿이 스님의 도술을 시험해 보기로 하고 달걀을 개어 떡을 구워놓고 스님에게
살아있는 병아리를 만들어 보이라고 하였다. 스님은 경을 외며 조용히 꿇어 앉아 살아 있는 병아리로
만들어 보이었다. 상좌들과 마을사람들은 스님의 도술에 크게 탄복하여 더욱 존경하게 되었다. 이
스님이 바로 공민왕때의 고승 나옹스님이다.

금당에서 북쪽으로 500m거리에는 나옹대사가 크게 대각을 얻었다는 고금당이 있다. 도 이곳에서는

동학 혁명의 주체인 녹두 전봉준장군의 딸이 10년간 피난했다는 일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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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당사(金塘寺)는 진안군 마령면 동촌리 41번지 마이산에 자리잡고 있다.


절의 창건은 650년(백제 의자왕 10) 고구려에서 백제로 건너온 보덕(普德) 스님의 11제자 가운데 한 분인 무상(無上) 스님이 그의 제자인 금취(金趣) 등과 함께 세 웠다고 전한다. 그리고 『삼국유사』와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에 보이는 보덕 스님의 행장을 통 해 절의 창건 과정을 확인할 수 있다. 보덕 스님은 고구려 후기의 스님으로서 고구 려에서 열반종을 널리 알인 개조(開祖)이기도 하다.

 

그러나 고구려 보장왕(재위 642~668) 이 중국에서 도교를 들여와 받들뿐 불교를 신봉하지 않자 왕에게 도교만 믿고 불교를 멀리하면 나라가 위태해질 것임을 여러 차례 건의하였다. 그러나 왕이 끝내 그의 말 을 듣지 않자 스님은 650년(보장왕 9) 제자 11명과 함께 백제의 완산주(完山州)로 내 려와 고대산(孤大山)에 경복사를 지어 『열반경』을 강의하였고, 함께 온 11명의 제자 역시 절을 짓고 포교하였다고 한다.

금당사의 창건주인 무상 스님 역시 그 11명의 제자 가운데 한 분인데, 나머지 제자 중 적멸(寂滅)과 의융(義融)은 지금의 임실에 진구사(珍丘寺)를, 지수(智數)는 경상북도 문경 사불산에 대승사(大乘寺)를, 대원(大原)ㆍ일승(一乘)ㆍ심정(心正)은 전주 모악산 에 대원사(大原寺)를, 수정(水淨)은 정읍 칠보에 유마사(維摩寺)를, 사대(四大)는 제 자인 계육(契肉)과 함께 진안 성수산에 중대사(中臺寺)를, 개원(開原)은 충청북도 단 양 금수산에 개원사(開原寺)를, 명덕(明德)은 연구사(燕口寺)를 각각 지었다고 한다.

 

이와 같이 창건된 당시의 절은 지금의 위치에서 악 1.5㎞ 가량 떨어진 곳이었다고 한 다. 그래서 예전 자리를 고금당(古金塘), 혹은 자연동굴을 법당으로 삼았으므로 혈암 사(穴巖寺) 또는 금동사(金洞寺)로 불렀다. 절이 지금의 자리로 옮겨온 것은 1675년( 숙종 1)의 일이다.
한편 또다른 창건설로는 814년(현덕왕 6) 또는 876년(헌강왕 2)에 중국인 혜감(慧鑑) 스님이 창건하였다는 말도 전하는데, 문헌의 기록이 없어 확인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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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나무로 조성한 목조여래는 사각형의 평판화된 얼굴에 비교적 당당한 체구이며, 양 손을 들어서 엄지와 약지를 맞대고 있어 아미타불을 형상화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둥글게 움추리고 있는 어깨와, 도식화된 옷자락 표현에서 조선 후기 불상의 특징이 잘 드러나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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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당사 경내에 있는 탑으로, 기단의 구성이 참 재미있다. 두터운 지대석위에 기단을 탑신 처럼 2기단으로 올렸다. 처음보는 순간 잘못된 복원이 아닐까라는 의문이 짙게 들었지만 회사리 탑을 보는 순간 지방색으로 이해 했다.

하기단 면석은 복원하였고 옥개받침은 3단이다. 3층 옥개석과 4층 몸돌이 한개돌로 구성되어 본래는 5층탑이라는 생각이 든다. 고려시대탑으로 전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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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정리 오층탑

 

마을초입에서 보흥사를 수소문하여 마을을 지나 길이 막힌 좁은 곳에 위치했다. 큰 은행나무에서 떨어진 은행알이 지천이건만 장난치는 아이 두서넛만 객에게 눈길을 준다. 물끄르미 탑을 바라보는 나에게 비속비승의 님이 다가와 이런저런 질문과 탑에 관한 말씀을 하셨다.

 

1000년이 된 탑이 왜 보물급으로 지정되지 않는지를 물었지만 답을 드릴만한 지식은 내게 없다. 다만 옮겨왔거나 무너진 탑을 복원하지 않았냐고 물으니 그럴리가 없다고 강하게 부정하신다. 심지어 어느정권시절에는 보물급 지정을 조건으로 금품을 요구한 사례도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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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층기단, 초층탑신에 비해 상층은 낮으며 우주가 흐미하다. 탑신과 옥개석은 한 돌이며 옥개받침은 4단이다. 낙수면 경사가 급하며, 추녀의 반전도 보인다. 상륜에는 노반과 복발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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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단의 기단 몸돌 받침은 흔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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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개석 우동 아래에 굷고 정연하게 사래처럼 길게 돋을 새김하였다.

 

이런 유형은 처은 접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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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운면 물레방아 보러 가는 길에 또 한컷!

 

2008.10.04

 

*** 인용 부분은 문화재청과 금당사 홈페지를 참조했습니다.***

 

 

출처 : 저 산길 끝에는 옛님의 숨결
글쓴이 : 선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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