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도/장성군

[스크랩] 장성...백양사

임병기(선과) 2008. 11. 27. 0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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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장사 입구에서 백양사 16KM 입간판을 따라 구절양장 같은 길을 달렸다. 안개는 더욱 짙어져 오리무중이건만 덤프트럭은 경광등, 경고음을 요란하게 울리며 초행길 객을 자극한다. 이른아침 산사가 좋은점은? 입장료가 없다는 것 아닌가? 이런이런 늘 보시하는 기분으로 살려고 마음먹고 있으면서...

 

백양사. 지금도 가끔 만나는 스님이 백양사에서 출가하여 이따금 백양사 이야기를 들려주시곤 한다. 그러고 보니 다녀온 후 전화도 못드렸군. 우리카페 어느님이 자주 가는 낮질못 근처에 칩거중이신데 가을이 더 깊어지기 전에 다녀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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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양사 산문을 통과하면 여느 사찰처럼 숲이 좌우로 울울하다. 다른 가람과 달리 나무에 이름표를 붙여두었고 생태환경 관련 문구들이 자주 보인다.

 

근자에 사찰 생태기행을 주제로 하는 동호회도 여럿 구성되어 왕성한 활동을 전개중이지만 이제는 사찰에서도 적극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대처하였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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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양사의 유래는 백양사는 백제 무왕때 세워졌다고 전해지는 명찰로 본래 이름은 백암사였고, 1034년 중연선사가 크게 보수한 뒤 정토사로 불려졌다. 조선 선조때 환양선사가 영천암에서 금강경을 설법하는데 수많은 사람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고 한다.

 

법회가 3일째 되던 날 하얀 양이 내려와 스님의 설법을 들었고, 7일간 계속되는 법회가 끝난 날 밤 스님의 꿈에 흰 양이 나타나 '나는 천상에서 죄를 짓고 양으로 변했는데 이제 스님의 설법을 듣고 다시 환생하여 천국으로 가게 되었다'고 절을 하였다 한다. 이튿날 영천암 아래에 흰 양이 죽어 있었으며 그 이후 절 이름을 백양사라고 고쳐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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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작가들의 단골메뉴인 백양사 상계루. 1370년에 붕괴된 이후 1377년에 복구되었으며 이 과정에 정도전, 이색 등이 기문을 남겼다. 특히 1381년에 작성된 이색의 '백암산정토사쌍계루기'에 따르면 이 곳에서 두 계곡의 물이 합쳐지므로 '쌍계루'라 이름하였음을 알 수 있다.

 

기제쌍계루(寄題雙溪樓)...정포은

 

 시를 요구한 백암사 스님을 지금 뵈니
붓을 잡고 읊조려도 글이 안되어 부끄럽네
청수가 누각을 세워 이름이 중해지고
목옹이 기문을 지어 가치가 더 보태졌다네


노을빛이 아득하여 저문 산이 붉어지고
달빛이 배회하니 가을물이 맑아지는데
오랫동안 속세에서 부대껴 왔거니와
옷깃을 떨치고 언제나 그대와 올라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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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암대종사 이뭣고비

 

"근대 백양사의 제2대 주지로 부임했던 만암 종헌스님은 백양사 전체 역사를 통해 가장 돋보이는 불사를 일구어 냈던 인물이다. 뿐만 아니라 스님은 한국 근대 불교사에서도 매우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백양사는 아직까지 만암스님의 가풍에 의해 이끌어져 오고 있다는 평가를 하여도 무방할 정도로 절에 끼친 스님의 영향력은 실로 대단하다고 볼 수 있다. 스님의 속성은 송(宋)씨로 전라북도 고창 출신이고, 1876년 부친 송의환(宋義換)의 3남으로 태어났으며 만암은 스님의 법호이며, 법명은 종헌이고 또는 목양산인(牧羊山人)으로도 불린다.

4세 때에 아버지를 11세 때에는 어머니를 여의고 고아의 처지가 되나 어려서부터 영특함을 널리 보이던 스님은 11세의 나이로 백양사의 취운도진(翠雲道珍)스님을 은사로 모시고 불문(佛門)의 길에 들어서게 된다. 이어 16세 때는 구암사(龜巖寺)의 전문 강원에 들어가 당대의 대강백 한영(漢永) 스님의 가르침을 받는다. 훗날 백양사를 거점으로 불교교육 분야에 심혈을 기울였던 스님의 사상은 이 때부터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스님은 운주암에 거주하던 백양사의 환응스님을 찾아가 수학하기도 했다.
10여 년 가까이 경전 연구에 몰두하던 만암스님은 환응스님에게 전강(傳講)을 받고 이후부터 강의와 후학 양성에 전념하였다.

1905년부터 청류암 , 백련암 , 천진암 , 해인사 강원 등에서 강의했는데, 특히 해인사에서의 특강 때는 전국에서 스님의 명성을 듣고 몰려온 학인이 상당한 수에 달했다고 한다.


이후 1910년 한일합방으로 민족 전체가 나라를 잃은 슬픔에 빠져 있을 때 스님은 출가도량인 백양사로 돌아와 교육사업에 매진하게 된다. 백양사 청류암에 광성의숙(廣成義塾)을 설립하고 종래의 강원제도를 혁신한 불교 교육을 전개해나갔던 것이다. 이 때의 광성의숙을 통한 교육은 당시 불교계 상황 속에서는 매우 혁신적인 것으로 평가할 수 있는데, 약 100여 명의 학인들이 모여 선과 교, 율 등을 공부하며 외전(外典)에 대한 교육도 병행하였다.

 

특히 학인들의 교육을 위해 출간했던 역사· 지리관계 교재는 민족정신을 고취시킬 수 있다는 이유로 일제의 심한 감시를 받았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때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백양사를 출입하였다는 사실도 만암스님의 이 같은 사상과 연계될 수 있을 것이다.

만암스님은 1917년부터 10여년에 걸친 중창불사에 착수한다. 현재의 가람 규모가 이 때의 불사를 통해 완성된 것이다. 특히 스님의 중창 불사는 철저하게 사찰의 자급자족을 주장하는 속에서 이루어졌다는 점이 주목된다. 만암스님은 양봉(養峰) 또는 죽기(竹器)를 통해 불사 자금을 조달해 나감으로써 훗날 '반선반농(半禪半農)'의 실천자로 추앙받았던 것이다.

중창불사를 회향한 이후 스님은 불교 교육사업에 더욱 큰 정열을 쏟게 되는데, 1928년부터 3년간 동국대학교의 전신인 중앙불교전문학교 초대 교장직을 역임하였으며, 1947년에는 광주 정광중학교를 설립하여 7년간 교장직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백양사 중창 불사와 교육사업에 온 힘을 다했던 만암스님은 1940년대 후반부터 이른바 '불교정화운동'에 깊은 관여를 한다. 한영 스님에 이어 조계종 제2대 교정(敎正)으로 취임하면서 본격적 불교 정화운동을 전개해 나갔던 것이다. 한국 불교의 정화운동사는 아직도 재정리해야 할 부분이 많이 남아있는 상태지만, 만암스님의 이 무렵 행보는 비구파(比丘派) 내에서도 점진적 개혁을 추구했던 계파에 속한다.

 

 1954년 선학원에서 개최된 '전국 비구승대표자회의'에서 종정(宗正)에 임명되었던 만암스님은 비구승단을 이끌며 대처승단과의 타협을 시도해 나가나 스님의 타협 노력은 무산되고 말았으며, 이 과정에서 비구승단 내의 강경파와 마찰이 생기게 되자 스님은 정화운동에서 손을 떼고 백양사로 내려왔다.

정화운동에 끼친 만암스님의 영향에 대한 평가는 앞으로도 계속 연구되어야 할 과제이지만, 여하튼 스님은 백양사로 돌아온 이후 후학 양성에 몰두하다가 1957년 세속 나이 81세, 법람 71세의 일기로 열반에 드셨다.   

 

이뭣고란? 불교에서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 선을 참구하는데 의제로 하는 것을 화두라 하고 화두는 천칠백가지가 있다고 한다.. 그중 부모미생전 본래면목 시심마라는 것이 있는데, 이뜻은 부모에게서 태어나기전에 나의 "참"모습은 무엇인가라는 의제를 의심하기 위하여 "이뭣고"하며 골똘히 참구하면 본래면목 즉 참 나를 깨달아 생사를 해탈하게 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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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천왕문

 

"총림(叢林)의 뜻은 범어 vindhyavana의 번역으로 빈타파나(貧陀婆那)라 음역하며, 단림(檀林)이라고도 번역합니다. 승속(僧俗)이 화합하여 한 곳에 머무름이(一處住) 마치 수목이 우거진 숲과 같다고 하여 이렇게 부르는 것입니다. 특히 선찰(禪刹)의 경우 이름으로 공덕총림(功德叢林)이라고도 합니다.

지도론 삼(智度論 三)에 의하면 '승가(僧伽)는 중(衆, 무리의 뜻)의 뜻이니 많은 비구가 한 곳에 화합하여 머무는 것을 승가라고 한다. 마치 큰 나무들이 숲을 이룬 것을 林이라 함과 같으니, 승취(僧聚)가 모여 사는 곳이므로 총림이라 한다.'고 하고 있습니다. 즉 지금의 선원(禪院), 선림(禪林), 승당(僧堂), 전문도량(專門道場) 등 다수의 승려대중이 모여 수행하는 곳을 총칭하여 총림(叢林)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총림이 되기 위해서는 승려들의 참선수행 전문도량인 선원(禪院)과 경전 교육기관인 강원(講院), 계율 전문교육기관인 율원(律院) 을 모두 갖춘 사찰을 지칭하는 말로 우리나라는 "해인사, 통도사, 송광사, 수덕사, 백양사" 5대 총림이 있습니다. 고불총림 백양사는 1996년 3월 총림으로 공식 승격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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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각과 우화루

 

점점 상승하는 산지중정과 달리 백양사도 산지 가람임에도 천왕문, 단층 루대, 전각이 평지가람 처럼 전개된다. 백제계 가람 배치의 영향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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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화루.

 

단층 루대로 누하진입은 불가하며 우회진입동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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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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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웅전 현판이 눈에 익다.  동국진체의 완성자 원교 이광사의 글씨 같다. 1917년 송만암(宋曼庵) 대종사가 백양사를 5중창하면서 건립하였다. 

"정면 5칸, 측면 3칸의 대형 법당으로, 건축양식은 겹처마에 단층 팔작지붕 다포집이다. 2단의 장대석으로 쌓은 기단에 중앙으로 계단을 두었고, 자연석 주초를 놓았다. 기둥은 민흘림이 있는 두리기둥을 세웠다. 기둥머리에 창방과 평방을 결구하고, 그 위에 간포 2조씩의 공포를 짜 올렸다. 공포는 안쪽이 3출목, 바깥쪽이 2출목으로 구성되어 있다.

내부는 우물마루를 깔았고, 내진칸과 외진칸에는 높이를 달리한 우물천장을 설치하였다. 툇간에는 용모양의 퇴량을 걸쳤다. 지붕의 4모서리에는 원형의 활주가 세워져 있다. 창호는 전면은 모두 4분합 빗살문을 달았고, 측면은 3칸 모두 2분합 띠살문을 달았다.

후면의 어칸에도 2분합 띠살문을 달았다. 주간포는 전면에 2구씩 배치되었고 양측면에는 중앙칸은 1구, 앞칸은 2구, 뒤칸은 2구를 놓을 자리에 1구만 배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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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물천장. 용과 새가 천상을 날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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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가모니불이 중앙에, 협시인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좌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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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락보전. 백양사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조선사찰사료(朝鮮寺刹史料)>에 따르면 백양사 극락전불 양계서의‘문정왕후빈향축열서(文定王后賓香祝列書)’라는 기록으로 보아, 당시 건물을 짓는 데 문정왕후가 참여하였음을 알 수 있다고 한다.

현판도 동국진체라 여겨진다. 극락보전 안에 봉안된 후불탱화도 진경풍속화의 사실성을 가진 우수한 탱화이다. 이로 보아 조선 영조 · 정조 때의 작품으로 추정할 수 있다. 화기(畵記)에 '건륭 사십 몇 년'이라 손상된 채 적혀 있는 것으로 보아, 건륭 40년대인 1775년에서 1784년 사이에 제작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재미있는 사실은 극락보전 한쪽(사진에 문이 열린 부분)에 산신을 모신 산신각과 한 전각안에 있다는 것이다. 유례가 없는 일이라 몹시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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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영각

 

극락보전과 산신각처럼 한지붕 아래에 칠성전과 진영각이 함께 있다. 중앙에는 절의 개창자인 여환선사와 중창 및 3창자로 알려진 중연스님, 각진국사 등 세 분의 진영이 함께 모셔져 있어 눈길을 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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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웅전 뒤편에 우뚝 솟아 있는 이 탑은 1925년에 조성되었다. 팔정도(八正道)를 상징하기 위해 팔각 8층으로 조성된 석탑이며 내부에 부처님의 진신사리 1과를 봉안하였다.

특히 이 진신사리는 인연을 따라 중국을 거쳐 오랫동안 여러 고승들에게 보존 소장되어 오다가 우리나라에 와서는 수월 큰스님이 보관하다가 뒤이어 근대 불교계의 지도자였던 용성(龍城) 스님이 비장하고 있던 것인데, 스님의 소원에 따라 만암 스님이 이곳에 봉안한 것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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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전 준비없이 들려 충분한 답사가 되질 못했다.무엇보다도 소요대사의 부도를 뵙지 못해 아쉽다. 하지만 이른 아침 절집을 찾아든 낯선 객에게 따뜻한 차 한잔 권하시든 보살님을 잊을 수 없을 듯하다.

 

2008.10.04

 

인용 부분은 백양사 홈페이지에서 가져 왔습니다.

출처 : 저 산길 끝에는 옛님의 숨결
글쓴이 : 선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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