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북도/정읍시

[스크랩] 정읍...무성리 탑, 피향정

임병기(선과) 2008. 11. 11. 08:48
300x250
300x250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무성리 탑

 

답사 동선을 수립하면서도 정읍 칠보면 무성리에 대한 기대가 컸다. 지금의 행정단위와 비교되지 않겠지만 서원 철폐령에도 훼철되지 않은 무성서원,선비 박물관이 소재하고 있어 과거시절 만만치 않은 고을으로 짐작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는 날이 장날인지 공사중인 무성서원은 문이 닫혔고 선비 자료관 역시 외출중이란 안내문만 출입문에 걸려 있었다. 자주 올 수 없는 기회지만 어쩌겠는가? 설상가상으로 무성리 불상도 개인사찰에 봉안되어 주인이 외출시에는 감금(?)되어 답사객에게는 화중지병었다.

 

그러니 답사전에 꿈꾸었던 茂盛한 기대는 일장춘몽 처럼 無成이 되어버린 武城里 답사였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무성리탑도 우여곡절 끝에 찾았다. 문화재청 자료에는 높은 토축위에 자리한 것으로 표기되어 무성리 탑이 아닌 줄 알았다. 이런 오류도 중앙정부의 무성의도 문제지만 정읍시도 문화재청에 수정을 요구하여야 한다.

 

지대석, 1층 기단, 1층 몸돌이 2.3층에 비해 과장되었다. 기단과 몸돌에는 우주가 양각 되었고,옥개받침은 3단이다. 옥개석은 얇고 모서리에서 약간 반전이 보인다. 상륜에는 노반 앙화가 남아있다. 고려시대 탑으로 추정한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무성리탑 이력과 관련 기념비문을 정읍시 홈페에지에서 옮겨온다.

 

"유구한 세월을 내려오다 근세(近世)에 와서 1935년 올해(乙亥)에 때마침 칠보면 주재소(七寶面 駐在所) 신축비(新築費) 부족액(額) 500량(五百兩)을 충당하려고, 본 삼층석탑 (本 三層石塔)을 일본인(日本人)에게 매각(賣却)하여 바야흐로 해채(解體)할 즈음에 본 면 시산리(詩山里) 남양후인(南陽后人) 홍순석(洪淳錫)씨가 경작답(耕作沓) 삼두락(三斗落)을 당시 칠보 금융조합(金融組合)에 저당(抵當)하여 금 오백량(金五百兩)으로 이를 환퇴(還退)하였으니 이제 우리는 그 숭고한 민족정신(民族精神)을 새삼 추모(追慕)하는 바이다.

1975년 을묘(乙卯) 7월에 한때, 칠보국민학교(七寶國民學校) 교정(校庭)으로 이건(移建) 했었으나, 향토문화유산(鄕土文化遺産)을 원형(原形)으로 보호(保護)하자는 중의(衆議)에 따라 1981년 신유(辛酉) 12월에 일본국 동경거주 무성리 출신(日本國 東京居住 武城里 出身) 도강후인 김진섭(道康后人 金鎭燮) 창섭(昌燮) 석공(錫公) 삼형제(三兄弟)가 사재(私財)를 들여, 이에 원위치(原位置)로 복원(復元)하여 영구(永久)히 존립(存立)하게 되었으니, 그 높은 뜻을 새겨 기념(紀念)하는 바이다." 

 

사진 출처: http://blog.daum.net/danpoongsanjang/6928914

 

문닫힌 개인사찰 전각속에 모셔진 무성리 불상이다. 자료는 정읍시 홈페이지에서 가져오니 비록 나는 뵙지 못했지만 우리님들 답사시에 참고하길 바란다.

 

"불상은 요사를 겸한 법당 안에 자리하고 있으며 불상의 하부에는 불단이 만들어져 있다. 원래는 서 있는 부처인데, 허리 아래는 땅에 묻혀 있다.
전체적으로는 장대하면서도 중후한 양식으로 약간 앞으로 기울어진 하나의 자연석을 이용하여 뒷면은 다듬지 않고, 앞면만 조각하였다. 머리부분은 소발로서 두견을 쓴 것처럼 표현되었고, 장타원형에 가까운 상호에 비하여 코는 크지 않고 입은 윗부분이 볼통하게 표현되어 있다.

짧은 목에는 이도만이 가슴부분에 표현되었고, 납의는 통견으로써 가슴부분에서 크게 U자 형을 이루고 있다.
더욱 다리 이하 대좌(臺座)는 요사채의 마루밑에 있어 확인이 가능하지 않다. 지금의 높이는 355㎝이고, 가슴 둘레 250㎝이다. 오른 손은 가슴에 올리고, 좌측손 아래로 뻗어 촉지인을 짓는다. 의습은 원고문을 새겨 단조로우나 조각은 중후한 느낌을 준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피향정 하마석. 정자에도 하마석을 세우는가?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피향정은 호남 제일의 정자라고 하는데, 호남제일의 루원은 광한루원인가? 피향(披香)은 여름날 상·하연지(上·下蓮池)에 연꽃이 만발하면 향기가 정자에 가득하여 피향정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신라 최치원 선생이 태산군수로 재임중에 연지 주변을 소요하며 풍월을 읊었다는 전설이 전해오고 있어 창건이 오래된 정자임을 추측할 수 있다.

현재의 정자는 조선 중기 건물로 정면 5칸, 측면 4칸의 사면이 개방된 팔작지붕이다. 2층에는 계자난간이 둘러져 있다. 피향정 내부와 더불어 태인향교 등을 답사하려 했지만 태인 읍내 전체가 체육대회(?) 때문에 소란함의 극치라. 벗어나고픈 마음밖에 들지 않았다.

 

피향정을 찾던중 농로에서 만나  나의 여러 질문에 친절하게  답해준 경찰관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2008.10.03

출처 : 저 산길 끝에는 옛님의 숨결
글쓴이 : 선과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