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북도/임실군

[스크랩] 임실...의견비, 오수리 석불

임병기(선과) 2008. 11. 6.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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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수 지명 유래비

 

그렇다 분명 이길을 지나갔었다. 우리아이들 여름방학 진안 마이산 다녀온 길이 었나? 연결되지 않은 추억의 자욱들이 스쳐 간다. 그렇더라도 10년 겨우 지났는데 나의 기억력이 이렇게 떨어졌는가?

 

오수 지명과 관련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다. "지금부터 1천년 전 신라시대 거령현, 오늘날의 지사면 영천리에 김개인(金蓋仁)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는 개 한 마리를 기르고 있었는데 개를 몹시 사랑하였으며 어디를 다닐 때면 항상 데리고 다녔다. 먹을 때도 같이 먹고 그림자처럼 함께 다니면서 생활하였고 그 개 역시 그를 충성으로 따랐다.


그러던 어느 해 이른 봄 그는 개를 데리고 장이 선 오수로 놀러 나갔다. 그런데 그는 너무나 술을 좋아하여 친구들과 한잔두잔 기울이다가 그만 날이 저물어 버렸다. 그는 몹시 취한 채 집으로 가다가 몸을 가누지 못하여 그만 잔디밭에 쓰러져 깊은 잠에 빠지고 말았다. 개는 주인이 잠에서 깨어나기만 기다리며 쪼그리고 않아 주위를 살피면서 지키고 있었다. 때마침 부근에서 들불이 일어나 부근에 번지고 있었다. 개는 주인을 입으로 물고 밀면서 깨우려고 온갖 지혜를 다 짜냈다. 그러나 술에 취해 잠이든 주인은 주위의 불길도 아랑곳없이 깨어날 줄 모르고 있었다.

 

뜨거운 불길이 점점 주인의 옆에까지 번져오자 개는 불을 끌 수 없음을 깨닫고 가까운 냇물로 쏜살같이 달려가 온몸에 물을 흠뻑 묻혀와 잔디를 적시기 시작했다. 수십 수백번을 이렇게 왔다 갔다하여 잔디는 물에 젖고 싸늘함을 느낀 주인은 잠에서 깨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힘이 쑥 빠진 개는 주인의 옆에서 쓰러져 죽고 말았다. 주위를 둘러본 후 사건의 전말을 알게 된 김개인은 ,몸을 바쳐 자기를 구해준 개를 부여안고 크게 원통해 하였다. 주인은 개를 장사지낸 뒤 이곳을 잊지 않기 위해 개의 무덤 앞에 평소 자기가 지니고 다니던 지팡이를 꽂아 두고 그 자리를 떠났다.


얼마 후 지팡이에 싹이 돋기 시작하더니 하늘을 찌를 듯한 느티나무가 됐고 그 때부터 그 나무를 오수라 하였고 그것이 이 고장 이름으로 정착되었다. 그 개의 충성심을 길이 기리기 위해 건립했던 의견비는 문자마저 마멸돼버려 1955년에 다시 세웠고 이 뜻을 전국에 알리기 위해 면의 명칭도 둔남면에서 오수면으로 1992년 8월 10일 바뀌게 되었다. 1994년 4월 3일 춘향도로 국도변에 김개인과 의견상을 건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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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수면 소재지 원동산공원의 의견상. "오수의 지명이 전해주듯 이곳은 충심있는 개의 이야기로 유명하고 이 이야기는 교과서에 수록될 정도이다. 본래 오수 의견비 이야기는 구전으로 내려와 심병국씨가 유래를 찾았다. 언론인 백남혁씨가 고려 악부의 견문곡과 보한비의 의견비에서 나타난 이야기가 바로 오수와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음으로 알아내고 가람 이병기 박사로부터 고증을 받음으로써 이 마을 이「보은(報恩)의 개」마을이었음이 밝혀졌다. 지금도 오수리 시장내 원동산 공원에는 의견비가 서있어 주인을 위해 죽어간 개의 충절을 위로하고 있다."

 

오수에서는 지역사회 개발과 지역민의 일체감을 조성하고 희생과 충성이 담긴 의견의 넋을 위로하고 의로운 정신을 길이 보존 시키며, 명견명소로 인정을 받고 지역을 널리 알리고자 매년 4월에 다채로운 의견문화제 행사를 실시하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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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수리 원동산 공원 의견 비각. 대단한 민족성이다. 우리 폄하하지 말자. 조선놈이라는  비열한 말 이제는 종식 시켜야 한다. 우리의 정체성은 우리가 길러야 하지 않겠나? 세상에 의견비를 세우는 민족이 또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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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수리 미륵불. "관월부락 뒤에는 약 삼백년 전부터 석불이 우뚝 서 마을의 수호신처럼 이 마을을 굽어보고 우뚝 서 있다. 한 아낙네가 어느 날 뒤쪽 산을 바라보니 큰 집 채 만한 바위덩어리가 걸어 내려오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 저것 좀 보라고 큰소리를 치니 이 아낙네가 외치는 소리를 들은 바위가 그만 그 자리에 우뚝 멈추어 서버렸다는 것이다.

 

마을 사람들은 이 바위가 석불인 것을 알고 난 후부터는 서로 불공을 드리고 관리에 정성을 쏟아오고 있는데 석불이 마을 뒤 산 쪽에 안좌하지 않고 마을 앞까지 나와 안좌(정좌)했더라면 이 마을이 더욱 융성하고 자손이 오래도록 부귀영화를 누렸을 것이라 전한다.

 

그 후 1백년이나 눈, 비, 바람을 맞고 외로이 서있는 석불을 이 마을 최경태씨가 움막 같은 집을 만들어 주었으며 다시 약 80년전 진안 마이산에 거주하는 고 이갑용처사가 꿈에 이 석불이 나타나 「내가 옷을 벗고 있으니 집을 지어 달라」는 부탁을 하므로 다시 개축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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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배와 석불이 하나의 돌이다. "상의 조각된 면은 약간 볼록하게 솟았고, 미륵불 이외엔 직선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전·후면에서 보면 이것이 완만한 타원상의 원추형을 이루고 있는데, 높이는 350㎝이다. 이 암석의 앞면에 미륵불을 볼록하게 조각하였다. 광배(光背)는 평면상에 두광(頭光)과 신광(身光) 그리고 화염문(火焰紋)을 조각하였다.

 

이 미륵석불은 입상(立像)으로서 현재 하체부분은 땅속에 묻혀 있다. 두부에는 육계(肉계)가있고, 상호(相好)는 역삼각형이며, 눈은 개안(開眼)이고, 목에 삼도(三道)가 있다. 양귀는 길고 코는 이등변삼각형으로 볼록하고 평평하게 표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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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身部)는 어깨에서부터 아래로 내려갈수록 조금씩 체감되었는데, 어깨폭은 140㎝이고, 땅에 접한 부분의 폭은 100㎝이며, 상의 높이는 240㎝이다. 법의(法衣)는 통견(通肩)으로 양쪽 어깨에서부터 가슴을 거쳐 아래로 결을 이루며 내려오다가 가슴 밑부분에서 만나 역삼각형을 이루고 있다.

 

그 밑으로 거의 수평을 이루며 표현된 소매자락이 있고, 그 속으로 두손을 넣고 있어 실제 외형상의 손은 표현이 되어 있지 않다. 약간 볼록하게 표현된 소매자락은 법의(法衣)와 어울려 계속해서 결을 이루며 밑으로 내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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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에서 바라본 석불. 왜 여기에 조성했는지 한눈에 들어온다.

 

종교적 대상은 물론이고 마을 수호신이며. 민초들의 우상이었다.

 

민초들에게는 기다림이었다.

 

2008.10.03

 

 인용한 글은 임실군청, 문화재청에서 가져왔습니다.

출처 : 저 산길 끝에는 옛님의 숨결
글쓴이 : 선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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