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북도/충주시

[스크랩] 충주...원평리 미륵불.삼층탑.숭선사지 당간지주

임병기(선과) 2008. 9. 29. 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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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하게도 문화재 이정표가 없어 헤매이다 만났다. 마을이름도 미륵댕이로 예전에 사찰이 있었음을 알 수 있으며, 신라 법흥왕때 창건한 ‘선조사(宣朝寺)’라는 유명한 사찰이 있었던 곳이라 전해온다. 현재는 미륵불과 석탑을 모시는 작은 사찰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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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련(覆蓮)의 연꽃대좌(臺座) 위에 8각형(八角形)의 갓을 얹고 서 있는 이 거대한 석불입상(石佛立像)은 고려시대(高麗時代)의 경기(京畿), 충청(忠淸) 일대(一帶)에 유행하던 석불입상의 형식을 잘 따르고 있다. 이 불상은 조각수법(彫刻手法)이 특히 뛰어나서 그 당시의 대표적인 걸작으로 생각된다.

 

큼직한 육계(肉계), 이목구비(耳目口鼻)가 뚜렷한 풍만한 얼굴, 양감(量感) 넘치는 어깨와 떡 버틴 하체(下體), 그리고 통견(通肩)의 묵중한 불의(佛衣) 등에서 이 불상의 특징이 잘 드러나고 있으며 이러한 특징은 이 불상의 격을 높여주고 있다."

 

불상 앞에는 화사석이 멸실된 팔각 원당형 석등부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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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 9월 갑오 농민 전쟁  농민군 2차봉기에 반대하던 최시형 휘하 손병희 부대와 봉기를 촉구하던 서정옥 부대가 화해 연합군을 결성한 곳이 바로 여기라고 한다. 그날의 분위기를 그대로 간직하고 계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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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탑은 옥개석의 낙수면 전각(轉角)의 경쾌함과 탑신의 단아함 등에서 볼 때 신라 석탑 양식을 따른 고려시대의 수작(秀作)으로 기단 면석에 부조한 향로와 탑신에 사자(獅子)의 형상으로 여겨지는 조식은 찾아 볼 수 없는 희귀한 양식이다.

 

네모꼴의 자연석 위에 기단을 조성하였고 기단의 남북 면석에 우주를 표현하였다.옥개석의 층급받침은 3단이며 추녀의 모습이 단아하고 상륜부에는 노반만 남아 있으며 3층 옥개석은 현재 없다. 탑신괴임을 마련하고 옥개석 추녀의 시원스런 표현 등 신라석탑 양식을 따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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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층 탑신 네 면에 사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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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단 남북면 중앙의 세발 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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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피는 재미에 젖어 시간 가는 줄 모르겠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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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선사지 당간 지주

 

"숭선사 터는 숭선마을 뒤쪽 수리산 아래의 분지에 남향하여 자리잡고 있으며 절터의 동쪽으로는 절의 수원으로 이용되었을 내(川)가 흐르고 있다. 전하는 이야기로는 이 절에 승려들이 많아 한 때 식사 준비를 위해 씻는 쌀 뜨물이 약 8km 떨어진 주덕까지 뻗쳤다고 하는데 절의 규모를 짐작하게 하는 말이다   

 

이곳은 일찍부터 알려진 절터로 1980년대 초 숭선마을에서 ‘숭선사’라고 적힌 기와가 발견되어 주목받기 시작하여 1995년 예성동호회(현 예성문화연구회)에서 지표조사를 하였으며, 1998년 충북대학교 중원문화연구소 및 충청대학 박물관에서 3차(2000~2003)에 걸친 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출토된 유물로는 '숭선사(崇善寺)'라고 씌여진 기와, 금동보살두, 동탁, 모정(기와고정못), 분청사기장군, 청자완, 백자완, 귀면와, 치미, 용두, 와당 등으로 이들 유물은 대부분 고려시대의 것으로 사지(寺址)와 유물이 일치된다.   

1차 발굴조사에서 출토된 금동보살상과 철지금동장와정은 표면에 두터운 흙과 부식물이 덮여 있어 정확한 형태와 재질을 파악할 수 없는 상태였으나 2001년 9월부터 2003년 7월에 걸쳐 실시된 보존처리가 완료되어 원형이 복원되었다.  

절터의 제일 밑 점토층에서 출토된  금동보살상은 보살두 1점과 2개체 분의 동체부 파편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금동불두는 높이 8㎝로 머리에는   보관을 쓰고 있으며 원만한 얼굴에 살며시 내려 감은 눈, 살짝 위로 치켜 올라간 눈꼬리, 오똑한 콧날과 굳게 다문 입술이 아름답다.동체부는 어깨에 천의(天衣)를 표현하였고 합장인(合掌印)을 하고 있다.  

 

철지금동장와정(鐵地金銅裝瓦釘)은 기와를 고정하는데 쓰이는 못으로 길이 23. 2㎝와 25. 4㎝의 두 부분으로 절단된 채 출토되었다. 기와에 꽂히는 아래 부분이 철제인 반면 위의 연봉 장식은 철제 바탕 위에 얇은 금동판을 덧씌우는 기법으로 제작되었다.

 

철지금동장와정은 아직 출토된 예가 없어 당시 금속공예 기술의 일면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사원배치는 전형적인 고려시대의 양식으로 남문지, 탑지, 금당지, 영당지, 회랑지,동문지 등의 건물지가 확인되며, 건물의 세부적인 유구는 건물 기단부의 화강암 석축기단, 주초석, 적심석, 석축배수로, 전돌포장, 답도, 탑의 적심, 우물, 온돌 등이 원래의 모습으로 보존되고 있어 건축사 사료로서 매우 큰 가치를 지닌다.  

 

고려 광종은 재위 2년에 아버지인 太祖를 위하여 개성의 남쪽에 대봉은사(大奉恩寺)를 세워 태조원당(太祖願堂)으로 하였으며, 또한, 동쪽 교외에 불일사(佛日寺)를 세워서 어머니인 선비유씨(先?劉氏)의 원당으로 삼았다. 그런데 개경의 불일사가 있는데도 3년 뒤인 954년(광종 5)에 다시 모후(母后 : 神明順成王后)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충주에 숭선사를 창건하였다.   

 

이처럼 충주지역에 숭선사를 창건하게 된 이유는 중부내륙지방의 대표적인 호족세력이 유긍달(劉兢達)로 대표되는 충주유씨(忠州劉氏)이며, 어머니 또한 충주유씨 가문이었던 것이 주된 원인이라 생각된다.

 

충주 유씨는 고려 초에는 외척세력으로 중앙정계에 진출하였고, 정종과 광종의 왕위계승에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이들은 충주시 동량면 하천리에 있는 정토사법경대사자등탑비(淨土寺法鏡大師慈燈塔碑)를 통하여 볼 때 왕실과의 관계 뿐 만 아니라 불교계에서의 역할도 매우 컸던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광종과 충주 유씨와의 관련성 속에서 어머니의 고향인 충주에 어머니를 위한 원찰(願刹)로서 숭선사를 창건하면서 영당을 조성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이상에서 살펴본 숭선사의 창건 배경과 파악된 건물지 규모 등을 종합해 볼 때 이 건물은 신명순성태후의 영당으로 고려 광종 5년(954년)에 조성되었고 1182년(고려 명종 12)과 1579년(조선 선조 12)에 대대적인 중수를 하였으며 18세기까지는 사찰의 경영이 계속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출토되는 萬曆年間 己卯年銘 기와 대부분은 불에 탄 흔적이 남아 있음을 보아 임진왜란시 소실된 것으로 추정된다. 왜냐하면, 숭선사가 위치한 지역은 왜군의 북상로에 위치하고 있고, 신립장군이 배수의 진을 치고 격전을 벌였던 탄금대가 그리 멀지 않은 지역에 위치하기 때문이다.   

 

숭선사는 한강 이남에서 최초로 확인된 고려시대 창건 사찰이라는 점에서 역사성과 학술적인 가치가 매우 큰 유적지로서 사적 제445호로 지정되었다."...출처/충주 전통 문화회

 

 
숭선사지 당간지주는 한쪽 지주와 기단부만 남아 있다. 한쪽은 일제강점기에 쪽바리들이 마을 앞 다리 교각으로 사용되었다가 신덕 저수지를 축조하면서 매몰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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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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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탑 부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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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간지주를 바라보듯 씁쓸한 풍경이다.

 

가을에는 못 올 것 같다. 그 처연함에...

 

2008.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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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저 산길 끝에는 옛님의 숨결
글쓴이 : 선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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