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북도/단양군

[스크랩] 단양...적성.적성비

임병기(선과) 2008. 8. 25. 0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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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성

 

죽령천(竹嶺川)이 북류(北流)하여 남한강(南漢江)에 흘러드는 서쪽 어귀에 있는 성산(城山)(성재산)의 정상부를 반달모양으로에워싼 석축(石築)의 테뫼식 산성(山城)이다.

남한강에 임(임(臨)한 남안(南岸)의 해발 323m인 성산은 동(東)·서(西)에 천류(川流)를 끼고 북(北)에 강류(江流)가 있는 자연적(自然的)인 요새(要塞)처럼 되어있고, 오직 남(南)으로 낮게 구릉을 지나 험준한 소백산맥에 연결되고 있다. 이곳은 죽령(竹嶺)과 그 서쪽의 벌령(伐嶺)을 통하여 영남(嶺南)과 이어지는 교통로상(交通路上)의 요충(要衝)에 해당된다.

성(城)의 이름은 지리지(地理誌)들에서 성산성(城山城)으로 기록되고, 조선시대 초기에는 이미 고성(古城)으로 파악되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서는 둘레 1,768尺이고 성안에 대정(大井)이 있다고 하였다. 적성(赤城)이란 이름은 단양(丹陽)의 삼국시대(三國時代)이름일 뿐만 아니라 1978넌에 이곳 성안에서 신라적성비(新羅赤城碑)가 발견되었으므로 이 성터의 성격을 어느정도 알게됨에서 새로이 붙여진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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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성

 

성벽은 대부분 무너지고 서단(西端)과 동단부(東端部)가 일부 자취가 완연하다. 성벽의 평면형태는 남서쪽의 가장 높은 곳에서 북동으로 이어진 능선을 따라 외향서면(外向斜面)을 평평히한 북벽(北壁)이 거의 직선을 이루고, 남향서면(南向徐面)을 궁형(弓形)으로 에워싸고 있어서 넓은 성내대지(城內臺地)를 이룬다. 석회암(石灰巖)과 화강암(花崗巖) 등 여러종류의 석재(石材)를 납작하게 깨어낸 성석(城石)은 상하(上下)의 크기가 고르고, 성벽 위에는 인두대(人頭大)의 냇자갈을 올려놓았던 양상(樣相)이 엿보인다.

서단(西端)에 있어서는 곡치(曲雉)의 형태가 남아있고, 성벽 밖으로 기단(基壇)을 2단(段)으로 축조(築造)한 성벽이 있다. 동단부(東端部)는 내외면(內外面)이 남아 있는데, 내면(內面)의 하단(下端)에 기석(基石)이 있고 벽은 바깥을 향하여 단(段)을 형성하면서 66。기울기를 보여주고 있으며, 성벽의 두께는 5∼7m 이다. 내외협축(內外夾築)된 성벽의 내면고(內面高)는 2m 이고, 외면(外面)은 기단외(基壇外)의 보축(補築)까지 10m이상의 높이를 가진 웅장한 규모의 성벽이다. 지형으로 보아 남(南)쪽에 수구(水口)가 있었을 것이나 수구(水口)의 남은 유구(遺構)는 보이지 않고, 그로부터 서(西)로 20m 떨어져 통행로(通行路)가 있는데, 이곳 주변이 남문(南門)터로 생각되고 있다.

전체적인 성안의 모습이 마안형(馬鞍形)을 이루며 성벽의 구조가 내외협축(內外夾築)이고, 성벽을 쌓은 석재(石材)의 크기가 고르고, 성벽 밖으로 하단외측(下端外側)에 45°기울기의 단(段)을 이룬 보강호석(補强護石)의 축조가 있는 점은 6세기 중엽 신라(新羅)의 진흥왕대(眞興王代)로 추정되는 신라계(新羅系) 석축산성(石築山城)의 특징(特徵)으로 간주되고 있다.

성안에는 큰 우물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경작지로 변하여 매몰(埋沒)되었고, 삼국시대(三國時代)의 토기편(土器片)이 많이 발견된다. 성내(城內)에는 단양신라적성비(丹陽新羅赤城碑)(국보(國寶) 198호(號))가 비각(碑閣)안에 보존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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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성비각

 

단양신라적성비는 진흥왕이 고구려 영토를 점령하여 점령군으로 적성의 백성을 위무하며 공이 있는 적성사람을 표창하니 신라에 역심을 품지말고 충성을 하라는 내용의 글을 새긴 비 아닌가?   

 

"성재산 적성산성 내에 위치한 신라시대의 비로, 신라가 고구려의 영토인 이 곳 적성을 점령한 후에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해 세워놓은 것이다. 1978년에 30㎝ 정도가 땅속에 묻힌 채로 발견되었는데, 비면이 깨끗하고 글자가 뚜렷하다.

비(碑)는 위가 넓고 두꺼우며, 아래가 좁고 얇다. 윗부분은 잘려나가고 없지만 양 측면이 거의 원형으로 남아있고, 자연석을 이용한 듯 모양이 자유롭다. 전체의 글자수는 440자 정도로 추정되는데, 지금 남아있는 글자는 288자로 거의 판독할 수 있다. 글씨는 각 행마다 가로줄과 세로줄을 잘 맞추고 있으며, 예서(隸書)에서 해서(楷書)로 옮겨가는 과정의 율동적인 필법을 보여주고 있어 서예 연구에도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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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성비

 

비문에는 신라의 영토 확장을 돕고 충성을 바친 적성인의 공훈을 표창함과 동시에 장차 신라에 충성을 다하는 사람에게도 똑같은 포상을 내리겠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이를 통해 신라의 형벌 및 행정에 대한 법규인 율령제도 발달에 대한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노역체제, 재산 분배에 관한 국법이 진흥왕 초반에 마련된 것과 적성 지방에 국한된 관습을 법으로 일반화하고 있는 사실 등이 그러하다.

비문 첫머리에 언급된 10인의 고관의 관등과『삼국사기』의 내용을 견주어 살펴볼 때, 비의 건립은 진흥왕 6∼11년(545∼550) 사이였을 것으로 보인다.북방공략의 전략적 요충지인 적성지역에 이 비를 세웠다는 것은 새 영토에 대한 확인과 함께 새로 복속된 고구려인들을 흡수하려는 국가의 의지를 표현한 것이다.

 

비록 순수비(巡狩碑:왕이 직접 순행하며 민정을 살핀 기념으로 세우는 비)는 아니지만, 순수비의 정신을 담고 있는 척경비(拓境碑:영토 편입을 기념하여 세운 비)라는 점에서 큰 가치를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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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성에서 바라본 중앙고속도로

 

멀리 죽령길이 보인다. 바로 아래가 중앙고속도로 단양 휴게소. 적성.적성비 답사를 원하시는 분은 단양휴게소에 주차하여 10여 분 발품을 팔면 된다. 인용 자료는 문화재청에서 가져왔다.

2008.08.07

출처 : 저 산길 끝에는 옛님의 숨결
글쓴이 : 선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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