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북도/익산시

[스크랩] 익산...미륵사지

임병기(선과) 2008. 8. 1. 0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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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년들어 최고 더운 날씨, 내가 지친 것인가? 마음마져도 외롭다. 백제는 아직도 내게는 처연한 아픔으로 다가오는 문화이다.  그 이루지 못한 백제의 역사가 묻힌 익산 땅 미륵사지 객의 발걸음은 조선조 문인 소동명이 노래한 예나 지금이나  무겁다. 

 

옛날의 크나큰 절 이제는 황폐했네

 

외로이 피어난 꽃 가련하게 보이도다

 

준왕 남하하여 즐겨 놀던 옛터건만

 

석양에 방초만 무성하구나

 

옛일이 감회 깊어 가던 걸음 멈추고

 

서러워 우는 두견 쫓아 버렸네

 

당간지주 망주인 양 헛되이 솟아 있고

 

석양의 구름 아래 저물음도 잊었어라

-조선시대의 문인 소동명(1590~1673년)의 '미륵사를 지나며'-

 

미륵사지는 익산시 금마면 기양리에 있는 우리나라에사 가장 큰 백제 시대의 절터이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백제 무왕 때 왕이 왕비와 사자사에 가던 도중 용화산 밑의 연못에서 미륵삼존이 나타났는데, 왕비의 부탁에 따라 이 연못을 메우고 3곳에 탑, 금당, 회랑을 세웠다고 한다. 기록에 따르면 미륵사는 백제 무왕 때 지어져 조선시대 중기 경에 폐사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절의 배치는 동·서로 석탑이 있고 중간에 목탑이 있으며 탑 뒤에는 부처를 모시는 금당이 각각 자리한다. 이것이 복도(회랑)로 구분되어 매우 특이한 가람배치를 하고 있다. 금당의 규모는 앞면 5칸·옆면 4칸이고 바닥에는 빈 공간이 있는데, 이것은 바닥마루의 습기에 대비한 것으로 보인다. 고려·조선시대 건물터에서 온돌시설이 발견되어 온돌의 발전과정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출토된 유물로는 기와 · 토기 · 금속 · 목재 등 다양하며 글자를 새긴 기와도 많이 발견되었다. 서쪽 금당 앞의 석탑은 국보 제11호로 지정되었는데, 현재 남아있는 석탑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목조건축의 기법을 사용하여 만들었다. 미륵사지유물전시관에는 미륵사의 복원된 모형이 있다. 미륵사는 신라의 침략을 불교의 힘으로 막고자 지은 호국사찰로서 백제가 망할 때까지 중요한 역할을 했던 곳으로 역사적 가치가 큰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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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로 보이는 산이 익산의 진산 미륵산 이며 우측이 복원된 후에도 시비에 휘말린 동탑이며 가건물 안에는 해체된 동탑이 있다. 

 

삼국유사에 전해오는 창건 설화. "옛날에 어머니는 과부로 서울 남쪽 못가에 집을 짓고 살았는데 용과 정을 통하여 장을 낳았다.  장은 마를 캐어 파는 것을 생업으로 삼았기 때문에 어렸을 때의 이름은 서동이었다.   신라 진평왕의 공주 선화가 예쁘다는 소문을 듣고 신라로 가서 아이들에게 동요(선화공주님은 남몰래 짝지어 두고
서동방을 밤에 몰래 안고 간다네." )
를 가르쳐 주며 부르게 하였다.

 이 동요가 궁중에까지 알려지자 결국 선화공주는 왕후가 준 황금 한말을 노자로 하여 귀양을 가게 된다. 이때 성문 앞에서 기다리던 서동은 선화공주와 함께 백제로 돌아온다.

선화가 모후가 준 황금을 내어 생계를 도모하려하자 그때야 서동은 황금이 보배임을 깨닫게 되었다.

마를 캐던 곳에 흙더미 같이 쌓여 있던 금을 사자사 지명법사의 신력을 빌어 신라 왕실에 보내게 된다.  이후 인심을 얻은 서동은 왕위에 오른 후 왕비와 함께 사자사에 가던 중 용화산 아래 큰 못에서 미륵삼존이 출현하므로 수레를 멈추고 경배하였다.

이에 부인은 못을 메우고 여기에 큰 절을 세울 것을 소원하므로 왕이 허락하고 지명법사에게 못을 메울 방법을 물으니 법사는 신력으로 하룻밤 사이에 산을 허물어 평지를 만들었다. 그곳에 미륵삼회의 전 ㆍ 탑 ㆍ 낭무 를 세 곳에 두고 미륵사라 하였는데 진평왕도 백공을 보내 도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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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륵사상은 기독교의 메시아 사상과 같은 것이다. 즉 불교의 미륵불에 대한 신앙은 통속적인 예언의 성격을 띠고 있으며, 구원론적인 구세주의 나타남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미륵사 창건은 이런 의미에서 무왕에게 대단히 중요한 일이었다. 이것은 전륜성왕의 위엄으로서 나라를 다스리겠다는 생각을 나타낸 것으로 왕권 강화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이다.

 

 또한 무왕은 당시 성행하던 용신사상을 미륵하생신앙과 결합하여 보다 대중적이며 보편적인 체계를 구축했다. 가령 미륵사 창건설화에서 서동의 어머니가 용과 정을 통하였다는 기록이나 서동이 마를 캐던 곳에는 금이 흙더미처럼 쌓여 있다는 기록에서 잘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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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라지역 가람배치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미륵사지가 쉽게 이해되지 않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삼국통일 후 1금당 쌍탑 배치가 정형화 되기전 고신라는 일자형 1탑, 고구려에서는 남원 만복사지에서 보이는 ㄷ자형 3금당 일탑, 백제는 1금당 1탑 구조이다.

 

하지만 미륵사지에서는 두 기의 당간지주와 동서 상탑 구조이다. 얼핏보면 쌍탑 구조 같지만  본래 구조는 동서탑 사이에 목탑이 있었으며 가각의 탑 뒤로는 금당이 자리했었다, 즉 백제 전형의 1금당 1탑 배치에 충실한 배치다.

 

이렇게 조성한 까닭은 미륵이 하생하여 용화수 아래에서  세 번 설법을 마친 후에 극락세계로 화한다 하여 각기 설법을 전파할 장소로서 3 금당을 지었고 금당 앞에 각기 한기 탑을 세워 3 금당 3 탑의 가람배치를 구성하였다.

 

결국 미륵사는 미륵사상의 핵심이 다 들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미륵사는 미륵불이 내려와 설법할 장소이며 3 금당과 3 탑은 세번의 설법을 그리고 무왕은 전륜성왕으로 표현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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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탑 앞 당간지주.  미륵사지 당간지주는 동·서로 2기가 90여 미터의 거리를 두고 세워져 있다. 기단의 각면에는 안상이 새겨져 있으며, 지주의 양쪽 바깥면에는 둘레를 따라 외연선을 돌리고, 중앙에도 선대를 한 줄 각출하였다. 양식수법으로 보아 통일신라 중기 이후의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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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탑은 1975년부터 1976년까지 원광대학교 마한백제문화연구소의 조사에 의해 목탑지가 아니라 석탑이 있던 곳이라는 것이 밝혀지고, 1980년대부터 문화재연구소가 발굴 조사를 계속하여 노반 덮개석, 노반석 등 각층 부재의 출토로 탑의 높이가 9층으로 확인되어, 1993년에 복원되었다.

 

문화재청장을 지낸 어떤 분은 얼마전 서탑 해체식에 참석 당장 다이너마이트로 폭파하고 싶다고 할만큼 누가보아도 생뚱 맞아 보인다.

 

복원후 느낌의 차이는 어디에서 온 것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결국 1500년이 지나도 생명력이 있어 보이는 서탑은 조성 기간을 염두에 두지않고 지극정성 불심으로 하나하나 정을 쪼은 장인의 정신이 배인 온기 있는탑이라면, 서탑은 공기와 예산에 맞추어 기계로 조성한 신심이 돈독하지 못한 업자의 차가운 생명력 없는작품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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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탑 뒤 금당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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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탑 당간지주. 대체적으로 장식이 적으며, 단정한 형태를 보이는 지주는 통일신라 중기 이후에 만들어진 것으로 짐작하며, 경북 영주시의 숙수사지당간지주(보물 제59호)와 부석사당간지주(보물 제255호)외 비슷한 유형이라고 한다.

 
미륵사지 서탑 ...문화재청
이 탑의 평면은 방형인데 현재 6층까지 남아 있으며, 높이가 14.24m이다. 반쯤 무너져 버려서 한쪽을 시멘트로 보강을 하여 반쪽탑의 형태만 남아 있다.

탑의 건립연대는 600년경으로 추정되며, 한국 석탑의 시원양식으로서 목탑이 석탑으로 이행하는 과정의 구조를 보여주는 중요한 탑이다. 탑의 규모로 보더라도 한국 석탑 중 최대의 걸작이다.

초층탑신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구조에 중앙칸에는 사방에 문이 나 있고 내부로 통하게 되어 있는데, 탑 내부 중앙에는 거대한 네모난 돌기둥이 서 있다.
 
탑신 외면에는 엔타시스의 수법이 있는 네모난 돌기둥들 위에 목조건물의 창방, 평방을 설치하고 그 위에 두공 형식의 받침돌이 옥개석을  받치고 있다.
 
2층 이상은 탑신이 얕아지고 각 부재(部材)의 구조도 간결하게 생략되며 위로 올라갈수록 폭이 줄어 들었다.

이와 똑같이 석탑이 동쪽에 또 하나 있었으며, 두 석탑 사이에도 목탑이 있어 이 미륵사에는 원래 3개의 탑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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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체한 서탑 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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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십년이 소요되더라도 서둘러서는 안된다. 1500년을 지켜 온 탑 영원히 후손에게 물려줄 자랑스런 우리 석탑의 시원 완벽한 복원을 위해서는 백년이 걸려도 기다려야 한다. 자랑스럽지 않더라도 최소한 부끄럽지 않은 시대로 남기 위해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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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의 아픔을 잠시 잊고 휴식에 든 석탑 부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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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탑 모서리를 지키는 석인상으로 장승의 원조이다. 후대에 탑의 수호신으로 사자가 네모퉁이를 지키기 전에 민간에 모셨던 석인상으로  불교에 흡수된 사례도 본다. 1500살 나이에도 아직 젊음을 유지하는 비결은 무엇일까?

 

자기 직업을 사랑하며 일을 즐기는 까닭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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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탑 뒤 금당  주추 부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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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탑이 복원되어 잃어버린 백제의 향기가 미륵사지에 가득한

 

그 날이 오면

  

신동엽 시인 처럼 ,  유홍준 전청장의 꿈 처럼,

 

나는  해질 무렵 폐사지에 흠뻑 빠질 줄 아는 멋진 애인과 손가락 깍지 끼고 스며들 것이다.

 

2008.07.06

 

*익산시청 및 문화재청 홈페이지 자료와, 창비사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돌베개사 답사여행의 길잡이 내용을 참조했다.

 

♪하늘빛 그리움
출처 : 저 산길 끝에는 옛님의 숨결
글쓴이 : 선과 원글보기
메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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