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북도/익산시

[스크랩] 익산...숭림사

임병기(선과) 2008. 7. 29. 0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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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시 웅포면 숭산리 숭림사의 창건은 신라 경덕왕대에 진표율사(眞表律師)가 금산사와 함께 창건하였다는 설이 전하나 확실한 근거는 없다.

 

‘숭림사’라는 절이름은 선종의 초조인 달마대사가 중국 하남성 숭산의 소림사에서 9년간 면벽좌선(面壁坐禪)한 고사에서 유래한 것으로, 숭산(崇山)의 ‘崇’과 소림(小林)의 ‘林’자를 따서 지은 것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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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도전. 세심교를 못 마쳐 우측 산허리에 자리하고 있다.  무애당 선사, 유심당 일훈 대사 부도이며 무명의 부도중 한 기에는 "강희 이십삼년 갑자입"이라는 글이 새겨져  1684년(숙종 10)에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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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그래서 인가? 절집마다 제를 올리는 스님의 목소리가 산사를 감싸고 있다. 멀리 부도전에서 낮은 담 너머로 바라본 올망졸망한 우화루 보광전 영원전 나한전 산신각이 객의 마음을 포근하게 유도한다.

 

피곤한가? 님은 말이 없고 또다시 저멀리 혼자 절집을 즐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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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전. 일반적으로 시왕전,지장전, 명부전으로 칭하지만 공주 신원사에 이어 두 번째로 영원전 현판을 보았다.1697년(숙종 23)에 서립된 영원전은 숭림사 북쪽 화산기슭에 있던 성불암 칠성각을 1926년에 현재의 위치로 옮겨온 것이라 한다.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무독귀왕과 도명존자를 모셨으며, 좌우로 시왕과 판관, 녹사, 동자, 인왕상을 봉안하였다. 1634년(인조 12)에 조성된 것이며, 전하는 바에 의하면 나한전 나한상과 함께 옥구 보천사(普天寺)에서 옮겨왔다고 한다.

 

영원전 지장보살과 관련 재미난 이야기가 전해온다. 

 

"옛부터 지장보살이 방광을 하면 그 지역에 길조가 생겼으며, 그로 인해 숭림사 지장보살은 지역주민들의 극진한 보호를 받았다.

 

일제강점기의 어느 날, 평소 불상을 탐낸 일본인들에 의해 지장보살상이 수탈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당시 불상을 훔친 일본인들은 숭림사에서 가장 가까운 군산항을 통해 불상을 일본으로 옮기려 시도하였다. 그러나 불상을 실은 배가 출발하려고만 하면 태풍이 불어 항해가 중단되거나, 선장이 피를 토하고 죽거나, 선원들 사이에 칼부림이 일어 배가 움직이지 않았다. 이런 일들을 겪은 그들은 두려움을 느끼며 불상을 군산항 보급창에 내팽개친 채 일본으로 돌아갔다.

 

이후 시간이 흘러 광복이 되었고, 어느날 한 선원이 보급창에 들어갔다가 구석에서 금빛이 환히 방광하는 것을 보게 되었다. 그곳에는 금칠이 다 벗겨진 채 시커먼 옻칠만 남아 있는 지장보살상이 있었고, 그 몸에서는 금빛의 서기가 새어나오고 있었다. 선원은 지장보살의 복장기록과 옛 이야기들을 수소문하여 본래 모셔져 있던 숭림사를 찾게 되어 영원전에 봉안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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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한전. 산신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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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조대좌. 불상 대좌로 보이며 중대석이 멸실되었다. 보광전 중정에는 오층탑이 있지만 기단에 근접한 위치 설정과 조성연대등이 모호하여 사진을 찍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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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의 절집에 이어 숭림사에도 제를 올리고 있어 보광전 내부를 볼 수 없었다. 망자의 며느리인 듯한 러시아계 여인이 정성으로 예를 올리는 모습과 2세 두 아들의 천진난만한 행동이 눈에 익숙지 않아 이제 우리 나라도 단일민족이 아니라는 사실을 절감했다.

 

숭림사 주전각인 보광전은 "자연석으로 기단을 높다랗게 이단으로 쌓고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의 건물을 세웠다. 겹처마로 다포계(多包系)의 맞배지붕을 올린 조선시대 단층건물이다. 창호는 띠살창으로 짜아 각 각 삼분합의 문을 달았다. 내부의 바닥은 마루를 깔고 천정은 우물반자로 마감하여 은은하게 단청을 하였다.

 

불상 위에는 닫집이 가설되었는데, 운룡(雲龍)이 섬세하게 조각되어있어 눈여겨볼 만하다. 이 건물은 1345년(충목왕 1)에 창건되었고 광해군 5년에 중수하였다. 그리고, 1628년(인조 6)에 기와를 새로 얹었으며, 1682년(숙종 8)에 다시 중수하였다."...사찰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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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는 협시불로 세지보살과 관음보살을 모셨으나 1986년 도난 당하기 전까지는 약사여래와 아미타여래불이 협시불이 었다.아래 자료는 전통 사찰 정보에서 가져 왔다.숭림사 보광전에 모셔진 석가여래좌상으로, 1613~1614년에 만들어졌다. 전체높이 110㎝, 어깨폭 48㎝, 무릎폭 77㎝로 나무로 만들어졌으며,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 188호로 지정되어 있다. 

 

『숭림사재산대장(崇林寺財産臺帳)』 「보광전석가모니불상복장기문(寶光殿釋迦牟尼佛像腹藏記文)」에 의하면 1613년(광해군 5) 겨울 초파일에 조성하기 시작하여 다음해인 1614년 봄 초파일에 완성했으며, 왕과 왕비, 왕세자의 만수무강을 위해 조성되었다고 전한다. 대장에는 박주질이 시주했으며, 당지 주지와 화주, 별좌 등 조성불사에 참여하였던 스님의 직급과 명칭이 나열되어 있다.

 

석가불은 매우 큰 규모로 안정감 있고 중후한 느낌을 주며, 방형의 얼굴에 눈이 작고 미소를 머금은 인상이다. 머리에는 작은 소라모양의 머리칼을 붙여 놓았으며, 나발 위에는 중앙계주와 정상계주를 두어 원만한 느낌을 준다. 비교적 갸름한 얼굴에 이목구비는 다소 안쪽으로 몰린 듯하지만, 두툼한 눈두덩이, 짧은 두 귀, 오뚝한 콧날 등 17세기 불상의 특징을 보여준다.

 

신체는 얼굴에 비해 큰 편으로, 결가부좌한 두 무릎이 넓게 표현되어 전체적으로 안정감 있으면서도 균형 잡힌 모습을 보여준다. 법의는 우견편단에 오른쪽 어깨만 덮는 착의형식으로, 목뒤로 두른 옷자락이 너무 두꺼워 몸에서 분리된 듯한 느낌을 주며, 대의는 U자형으로 군의는 가슴까지 올라가 있다. 손은 작고 섬세하며, 오른손은 항마촉지인을 하고 왼손은 오른발 위에 올려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있다.

 

17세기 전반기의 불상양식을 따르는 삼세불형식의 대표작으로, 안정감 있는 신체에 균형잡힌 자세, 사실적인 옷주름의 표현 등 조선 후기 불상연구의 좋은 자료로서 평가받고 있다.  

 

세심교를 건너는 등뒤로 부드러운 스님의 산회가가 따라 나온다. "몸은 비록 이 자리에서....." ()()()

 

2008.07.06

출처 : 저 산길 끝에는 옛님의 숨결
글쓴이 : 선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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