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도/곡성군

[스크랩] 곡성... 동리산문 태안사

임병기(선과) 2008. 6. 7. 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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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적한 사하촌은 보성강 물흐름처럼 한가롭고 여유가 넘쳐난다. 피어나는 연두빛 새순의 분주함도 즐기면서, 마음 통하는 벗과 시간을 잊어버리고 그냥 내려서 걸어가고 싶다. 시시각각 농도를 더해가는 산빛이 부럽다. 저렇게 다시 시작하건만 우리 인간의 마음은 왜 버리지 못하고 집착때문에 방황하는지?

 

2002년 나문답 영호남 조인트 답사 사답팀으로 다녀온 후 처음이다. 지금은 두 아이의 엄마인 광주 처자, 광주 총각, 익산 처자, 창원 처자 모두들 그립고 보고 싶다. 능파각 아래에서 즐겼던 갓김치도 먹고 싶다. 내일은 전화라도 해보아야겠다. 삶이 그러할텐데 잊고산다는 것은 잊혀진다는 것은 서러운 일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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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정권의 최우, 왕위를 세종에게 양위한 효령대군도 걸어온 길을, 오늘 동행한 중생들은 나를 닮아 한치의 오차도 불허하며 능파각 앞 주차장을 기억한다. 힘든 일은 아랫사람의 몫으로 둬야한다는 내말을 잊지 않는 것은 물론이다.

 

능파각은 태안사 사찰 본 영역을 진입하기 누각식 다리이다. 능파란 도교에서 선인의 가볍고 우아한 걸음걸이를 의미하며 피안과 차안의 경계로 보면 크게 틀리지 않는다. 문성왕 12년(850)에 혜철선사가 처음 지었고, 고려 태조 24년(941년) 광자대사가 수리했다고 한다. 그 뒤 파손되었던 것을 영조 43년(1767년)에 다시 지었으며, 이후에도 여러 차례 수리를 거쳐 현재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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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리산태안사사적(桐裏山泰安寺事蹟)”에 의하면 창건 당시의 이름은 대안사(大安寺)였으며, 천보원년(天寶元年 壬午 : 新羅景德王元年, 742) 2월, 세 명의 신승(三箇神僧)이 창건하였다고 한다.

 

혜철대사가 이곳에 주석하기 이전에 이곳에 사찰이 있었다는 것을 적인선사조륜청정탑비의 기록에 의해 알 수 있다. “有舍名曰大安其寺也”라는 기록인데 사(舍)라 칭한 것으로 보아 이 당시의 규모는 매우 초라한 규모였을 것으로 보인다. 혜철대사 주석 이후 태안사는 매우 번창하게 되되었다. 혜철대사가 이곳 동리산을 선문의 장소로 택한 이유에 대해 “谷城郡 동남쪽에 산이 있어 桐裏라 하였고, 이 가운데 작은 집이 있어 大安이라 이름하였다.

 

그 절은 수많은 봉우리가 가리어 비치고 하나의 물줄기가 맑게 흐르며, 길은 멀리 아득하여 세속의 무리들로 오는 이가 드물고 경계가 그윽이 깊어 승려들이 머물기에 고요하였다. …… 선사가 석장을 들고 와서 둘러보고 머물 뜻이 있어 이에 敎化의 장을 열고 자질 있는 사람을 받아 들였다”라고 하였다. 즉, 경치가 좋으며, 사회와 격리되어 있어 수행하기에 좋다는 것이 이곳에 선문을 연 계기가 되고 있다.

 

언제 혜철대사가 이곳에 선문을 열었는지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문성왕(文聖王) 9년(847) 이전에는 이곳에 주석 했을 것으로 보이며, 이 당시의 사찰현황은 알 수 없다. 태안사지(泰安寺志)의 편사(片史)에는 혜철대사의 손제자(孫弟子)인 광자대사 윤다(允多)가 중창한 당시의 이 사찰현황에 대한 기록이 있는데, “고려태조(高麗太祖) 이십년경(二十年頃) 광자선사(廣慈禪師) 중창당시불상간각(重創當時佛像間閣)”이라는 제목 하에 여러 전각에 대한 매우 자세한 기록이 남아있다.

 

이 기록에 의하면 당시 금당의 당주가 약사여래철조좌상(藥師如來鐵造坐像)이라고 기록하고 있고, 식당의 당주도 약사철조좌상(藥師鐵造坐像)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태안사는 초기에 약사여래를 매우 중시했던 것을 알 수 있게 해준다. 또한 그 규모가 총 40여동의 건물에 110여 간이었다고 한다. 이때 태안사가 가장 번성했던 시기로 추정된다.

 

광자대사 윤다의 입적이후 1684년까지의 태안사의 세부적인 역사는 알 수 없다. 그러나 1223년에는 무신정권 당시 집권자였던 최우가 태안사를 중건했다는 것과, 조선 초 효령대군이 태안사에 머물렀다는 것을 여러 사료를 통해 알 수 있다. 또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태안사는 동리산에 위치하고 있다(泰安寺 在桐裏山)고 기록되어 있어, 조선 초에도 역시 태안사는 계속 유지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 후기 1684년에 태안사가 중창되었던 사실은 사적기를 통해서 알 수 있는데, 여지도서의 기록 역시 태안사가 동리산에 있다(泰安寺 在縣南五十里 桐裡山)는 기록이 있어 조선후기에도 태안사가 계속 지속되었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한국사찰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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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문에 이르기전  연못 중앙에 배치한 고려시대 석탑이다. 원래는 광자대사 부도 옆에 있었던 것을 이곳으로 옮겨 새롭게 조성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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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안사 일주문. 937년 광자대사가 창건하였다고 한다. 그 후 소실되었던 것을 조선 숙종 9년(1683)에 각현선사가 다시 지은 후, 1917년에 영월(映月)선사가 중수하셨고 1980년에 또 다시 보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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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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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도전의 광자대사 부도. 광자대사는 태안사의 2대 조사로, 경문왕 4년(864)에 출생하여 혜종 2년(945) 82세로 입적하였다. 자는 법신이고 법명은 윤다이다. 이 부도는 광자대사가 입적한 지 5년이 지난 고려 초기 광종 원년(950년)에 세워졌다. 


덩굴무늬와 연꽃무늬가 새겨진 아래받침돌 위에 유난히 낮은 가운데받침이 올려져 있다. 윗받침에는 16잎씩의 연꽃을 두 줄로 조각하여 우아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탑몸돌은 앞뒷면 모두 탁자에 놓여 있는 향로모양을 새겨두었고, 그 옆으로 사천왕상을 도드라지게 조각하였다. 지붕돌은 높은 편이나 추녀에 이르러 얇아지고 있어 중후한 감을 덜어주고 있다. 꼭대기에는 흔하지 않게 머리장식부분이 완전하게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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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안사에 있는 탑비로, 고려시대 승려 광자대사 윤다(允多)의 탑비이다.

광자대사는 대안사를 두 번째로 크게 번성케 한 스님으로, 경문왕 4년(864)에 태어나, 8세에 출가하였다. 사방을 다니다가 동리산에서 수도를 하였고, 그 뒤 가야갑사(迦耶岬寺)에서 계(戒)를 받아, 다시 동리산으로 돌아와서 승려가 되었다. 혜종 2년(945)에 82세로 입적하니, 왕은 시호를 ‘광자’라 내리었다.

 

귀부는 각각 세부에 수많은 조각으로 장식하고 있다. 머리의 표현에 있어서 매우 사실적이며, 목에 그려진 주름 무늬 또한 매우 인상적이다. 또한 비를 받치는 받침 부분에는 구름무늬를 빼곡히 조각해 두었다. 등에는 아직도 거북의 무늬가 선명하게 조각되어 있고, 꼬리는 하늘로 말려 있도록 조각되었다.

 

이수의 한 중앙에는 가릉빈가를 표시한 듯한 새 몸통이 조각되어 있으나, 얼굴부분은 사라져서 현재는 없다. 새 모양 조각 하부에는 이 탑비의 주인공 이름이 적혀있었을 것이나, 많이 파괴되어 있어 이를 확인할 수는 없다. 또 사방 모서리 부분에는 각각 용머리가 장식되어 있다.

 

이수의 정상부분에는 중앙과 좌우로 3개의 보주를 올려놓았다. 이것은 장식의 효과와 더불어 가릉빈가와 각 모서리에 조각되어 있는 용의 배경으로 작용하도록 조각한 듯 하다. 배면에는 구름무늬로 가득 조각을 했으며, 곳곳에 용의 몸통을 조각해 놓아 각 모서리에 조각된 용과 조화를 꾀하였다...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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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제루, 루의 기능은 공식적인 사찰의 집회, 법회지만, 주전각 앞에 위치하여 닫힌 마당 공간을 느낄수 있게 형성한다. 산지중정에서는 누하진입이 대부분이나 지금은 누하을 다른 용도로 사용하고 우회진입으로 동선을 유도하는 루대도 흔하다.  현판은 “보제루”인데  내부에 또 다른 현판은 “만세루”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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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웅전은 정면 5간, 측면 3간의 평면을 가지고 있으며, 다포계 공포, 겹처마, 팔작지붕으로 최근에 만들어진 건물로 보인다. 임진왜란등의 전화를 입고 주전각과 봉안된 부처가 불일치 한 절집이 허다하듯이 태안사 대웅전에도 아미타불을 주불로 모셨다.

 

구산선문의 특징인 철불도 초기에는 조성되어 있었음을 자료로서 알 수 있다. "태안사지 편사에 의하면 광자대사 당시 태안사의 중심 건물은 금당이라고 표현되어 있다. 금당의 당주 또한 약사여래철조좌상(藥師如來鐵造坐像)이라 기록되어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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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웅전 주불로 아미타불을 모셨다. 좌우협시보살로 지장보살과 관세음보살이 모셔져 있다. 후불벽 또한 본존불과 어울리게 하품중생의 수인을 하고 있는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한 극락회상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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닫집은 중층의 보궁형으로 만들었다.  가운데 등 2개 사이로 보이는 닫집 현판은 “도솔천(兜率天)”이라 기록하고 있어, 극락세계임을 표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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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안사 범종.새겨진 명문에 의하면 天順 元年 3월(세조3, 1457년)에 처음 주조되었으며, 이후 萬曆 9년 4월(선조14년, 1581년)에 파손되어 다시 만들어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종신 위에는 용뉴와 음통이 있다. 상대의 조각은 매우 화려하게 조각되어 있다. 최상부에는 1단의 연꽃무늬를 돌출되게 만들어 놓았으며, 바로 아래 단에는 커다란 2겹의 연꽃무늬를 종 전체에 돌려 장식했다. 또한 그 아래에는 또 하나의 띠를 두르고 원형의 무늬와 더불어 원안에 범자를 새겨 넣었다.

 

총 4군데의 유곽을 만들었으며, 그 안에는 연꽃무늬를 새겨 놓은 다음, 그 상부에 유두를 솟아오르게 달아 놓았다. 하대 부분은 다른 종들과 다르게 종의 끝이 아닌 높은 위치에 만들어져 있고, 그 조각에 있어서 매우 화려한 당초무늬로 조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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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그리움 - 원성스님

'보고싶다'
진실로 그렇게 마음 깊이
가슴 싸 하게 느껴 본 적 있으신지요.

아마 없으시겠지요.
앞으로도 없으시겠지요.

하늘을 보고 허공을 보다가
누군가가 보고싶어
그냥 굵은 눈물 방울이 땅바닥으로
뚝,뚝 떨어져 본 적이 있으신지요.

없으시겠지요.
없으실 거예요.
언제까지나 없으시길 바래요.
그건 너무나,너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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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알문. 현풍 도동서원 환주문처럼 스스로 낮추어야 머리를 숙여야 출입이 가능한 문이다. 적인선사의 가르침을 배울려면, 적멸의 공간으로 들어가려면 마음을 내려 놓으라는 상징성이다. 세상살면서 하루도 빠짐없이 건방지고 자기자신만을 생각하고 탐진치의 노예가 되어 우리를 잃고 사는 생활을 잠시 내려 놓으라는 의미다.

 

下心 下心 下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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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탑은 태안사의 개산조사라 할 수 있는 혜철(慧徹)대사의 부도이다. 적인선사 혜철은 신라 원성왕 1년(785년)에 태어나 경문왕 1년(861년)에 입적하였다. 따라서 이 부도는 적인선사가 돌아가신 861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부도는 현 태안사의 가장 높은 곳에 마련한 대지에 있으며, 부도 옆에 탑비가 부도를 바라보면서 위치하고 있다. 또한 부도 앞에는 계단을 마련하고 배알문(拜謁門)이라는 현판을 단 문을 두어 부도가 놓인 대지의 격을 높이고 있다. 부도는 지면에 바로 놓인 것이 아니라 기단을 마련한 위에 모셔졌다.

 

기단은 원래 가구식으로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되나, 현재는 우주가 제 위치에 있지 않는 등, 많은 부분이 교란되어 있다. 또한 기단 주변으로 초석들이 위치하고 있어, 부도를 중심으로 한 부도전이 꾸며졌을 것으로도 추정된다. 기단 정면에 위치한 갑석의 형태가 특이하게 만들어져 있는데 이것은 계단을 설치하기 위한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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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탑은 전체적인 형태가 모두 8각형으로 이루어져 통일신라시대 부도의 전형적인 모습을 하고 있으며, 3단의 기단(基壇) 위로 탑신(塔身)과 머리장식을 올리고 있다. 기단은 아래·가운데·윗받침돌로 나뉘어지는데, 아래받침돌은 위가 좁고 아래가 넓은 사다리꼴 모양을 하고 있으며 면마다 사자상을 조각해 놓았다.

 

가운데받침돌은 그 높이가 매우 낮고, 면마다 가늘고 길게 안상(眼象)을 조각하였다. 윗받침돌은 옆면에 솟은 연꽃무늬를 새겼다. 탑몸돌은 낮은 편이지만 온화한 기품을 지니고 있으며, 앞·뒷면에 문짝 모양을 새겼다. 그 옆면에 다시 불법을 지키는 수호신인 사천왕상(四天王像)을 조각하였다.

지붕돌은 넓은 편으로 밑면에는 서까래를, 윗면에는 기왓골과 막새기와까지 표현하여 목조건축의 지붕양식을 사실적으로 나타냈다. 추녀의 곡선은 완만하며, 각 귀퉁이는 급하게 치켜올려진 상태이다.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으로 앙화(仰花:솟은 연꽃모양의 장식), 복발(覆鉢:엎어놓은 그릇모양의 장식), 보륜(寶輪:바퀴모양의 장식), 보주(寶珠:연꽃봉오리모양의 장식) 등이 차례로 잘 남아있다. 이러한 머리장식들은 기단과 탑신의 화려한 조각들과 어울려 탑을 전체적으로 장엄하게 보이도록 한다.

탑의 전체적인 형태는 무겁지만 너그러운 품위를 지녔고, 각 부분의 조각은 매우 자세하게 새겨져있어 사실적인 아름다움을 보이고 있다. 통일신라 후기에 이르러 양식상 석탑을 비롯해 돌로 만든 조형물들이 조형적인 아름다움을 잃어가는 것이 하나의 경향인데, 이 부도탑은 매우 뛰어난 조형성을 갖추고 있다"...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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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인선사조륜청정탑 옆에 부도를 바라보며 세워진 비석이다. 훌륭한 선사의 부도에는 그의 일대기와 사상을 담은 탑비를 옆에 같이 세워두는 것이 일반적이며, 이를 통해 그 당시의 역사와 시대 상황 및 선사의 일대기를 알 수 있다. 탑비는 귀부와 비신, 이수로 구성되는데 적인선사탑비는 비신이 결실되어 없어졌으며, 현재 사내에 전해 내려오는 비문을 가지고 다시 복원해 놓았다.

 

귀부는 당당하게 앞발을 들어 무거운 비신을 당당히 버티고 있는 모양으로 조각했고, 등에는 매우 가는 선으로 거북의 등껍질을 표현했다. 귀부의 등껍질은 다른 탑비의 것과 다르게 끝부분을 단순히 원형으로 만 조각된 것이 아니라, 호형을 그리며 물결치듯이 마감되어 있어 독특하다 할 수 있다. 또한 비좌에는 구름무늬가 화려하게 조각되어 있고, 그 상부는 연꽃으로 조각했다. 또한 꼬리는 말아 올리지 않고 아래로 늘어뜨리고 있다.

 

이수는 양편에 각각 2마리의 용이 구름을 사이에서 서로 등을 대고 있는 모습으로 조각되어 있고, 정면 한 중앙 두전(頭篆)에는 적인선사(寂忍禪師)라고 써넣었다. 배면 정면과 유사한 모양을 보이고 있는데, 4마리의 용이 구름을 배경으로 조각되어 있다. 정상에는 보주를 얹어 마감했다.

 

그런데 1941년에 편찬된 사적에서는 ‘1928년 중건 당시 광자 대사비의 이수를 옮겨와 적인 선사비의 이수로 사용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광자대사탑비의 이수와 바뀌었을 가능성이 많은 것으로 생각된다. 이에 대해서는 더욱 더 면밀한 조사 및 연구가 이루어져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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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그리움...... 

 

2008.04.15

출처 : 저 산길 끝에는 옛님의 숨결
글쓴이 : 선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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