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북도/남원시

[스크랩] 남원...실상사(2)

임병기(선과) 2008. 6. 7. 1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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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광전은 실상의 주전각이다.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의 팔작지붕 건물로 1884년(고종 21)에 월송(月松) 스님이 본래의 넓은 금당 터 기단 위에 다시 작은 기단을 만들어 세운 것이다. 아미타삼존상, 상사 범종이 봉안되어 있다. 삼존상 중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은 조선시대에 조성한 것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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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청 없는 처마곡선이 불경스럽게도 여인네 속살을 훔쳐보는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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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광전에 봉안되어 조선범종. 용뉴(龍紐)에는 여의주가 없는 용이 종천판(鍾天板)을 딛고 있는 형상이며, 용통(龍筒)은 간략화된 용의 꼬리가 휘감은 형태를 보이고 있다. 상대(上帶)와 천판(天板) 사이의 입화식(立花飾) 및 하대문양(下帶紋樣)이 없어지고, 상대문양을 범자문(梵字文)으로 대치하여 간략화 되었으나, 용통의 존재는 한국종의 전통을 간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상대에는 종신(鍾身)보다 한단 높게 원형 단을 만들고, 그 안에 한 자씩 범문을 12곳에 양각하였다. 이 범문자대(梵文子帶)의 아래 4곳에 유곽(乳廓)이 있으며, 방형 유곽의 테두리에는 인동초문을 양각하였다. 유두(乳頭)는 8옆의 중판연화판(重瓣蓮花瓣)으로 받치게 하였으며, 유곽 사이의 공간에는 두 손으로 꽃가지를 잡고 보관을 쓴 보살상이 1구씩 배치되었다.

 

조성연대는 종기(鍾記)에 ‘강희(康熙) 33년’으로 기록되어 있어 1694년(숙종 20)에 주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종을 만든 사람은 김상립ㆍ정칠립ㆍ김천수ㆍ김선봉 등인데, 이러한 기록으로 보아 이 종은 침허대사가 실상사를 중창할 때 만든 것으로 보인다. 현재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37호로 지정되어 있다.  

 

 종에 얽힌 이야기로는 다음과 같은 것이 전해온다. 실상사를 중창하고 난 후 국왕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하여 종을 만들고, 아침저녁으로 나라가 번창하기를 기도하며 종을 쳤다. 그런데 이 범종에는 우리나라 지도와 일본의 지도가 새겨져 있어, 종을 치면 일본의 경거망동을 경고함과 동시에 우리나라를 흥하게 한다는 말이 전해 돌았다. 이러한 소문으로 인해 일제강점기 말에는 주지스님이 문초를 당하고 종을 울리는 것이 금지되기도 하였다. 지금도 지도 일부가 그대로 남아 있어 그러한 사실에 신빙성을 더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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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사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팔작지붕 건물로 1883년의 방화에도 불타지 않았던 유일한 건물이다. 정면에는 가늘고 기교를 부려서 전서(篆書)로 쓴 ‘약사전’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실상사에는 일본과 관련된 또 하나의 이야기가 전한다. 당시는 왜구가 남해안과 전라도 일대에 나타나 노략질을 일삼던 때이다. 홍척은 도선에게 부탁하여 절터를 알아보고 있었는데, 현재의 실상사 약사전 자리에 절을 세우지 않으면 나라의 정기가 일본으로 건너간다는 말을 듣고 절을 건립하였다고 한다. 우연의 일치일까? 약사전의 창호가 우리나라의 꽃인 무궁화이고, 약사전 앞에 무궁화나무가 있었으나 지금은 베어지고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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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산선문 사찰은 부도, 조사전, 철불을 조성하여 기존 사찰과 차별화를 시도했다. 철불 역시 경제적으로 풍요롭지만 제도권 진출에 실패한 지방호족들의 지원으로 조성하게 된다. 실상사에도 그러한 영향을 받은 철불이 약사전에 봉안되어 있다.

 

소발, 아담한 육계, 긴 귀, 목의 삼도가 희미하다.어깨선이 부드럽고 가슴도 볼륨감 있게 처리되었지만 전반적으로 다소 둔중한 느낌을 주며, 양어깨에 모두 걸쳐 입은 옷 역시 아래로 내려올수록 무거운 느낌을 준다. 옷주름은 'U'자형으로 짧게 표현되고 있는데 이것은 당시에 유행하던 옷주름 표현기법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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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두 손은 나무로 만들어 끼워 넣은 것으로, 1987년 복원할 때 나온 철제 손과 같은 모양이다. 이상과 같은 특징을 지닌 이 불상은 긴장감과 활력이 넘치던 8세기의 불상이 다소 느슨해지고 탄력이 줄어드는 9세기 불상으로 변화하는 과도기적인 작품이라는 데 귀중한 가치를 지닌다. 

 

철불은 천왕봉을 바라보고 있는데 나라에 좋은 일이 있을 때마다 땀을 흘린다는 영험한 불상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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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상사에서 극락전으로 향하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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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상사 안에 있는 극락전을 향하여 그 오른쪽에 서 있는 탑으로, 수철화상의 사리를 모셔 놓은 사리탑이다. 수철화상은 신라 후기의 승려로, 본래 심원사(深源寺)에 머물다가 후에 실상사에 들어와 이 절의 두번째 창건주가 되었다. 진성여왕 7년(893)에 77세로 입적하니, 왕은 그의 시호를‘수철화상’이라 하고, 탑 이름을‘능가보월’이라 내리었다.

탑은 신라 석조부도의 전형적인 양식인 8각의 평면을 기본으로 삼아 맨 아래 바닥돌에서 지붕까지 모두 8각을 이루고 있다. 기단(基壇)은 아래받침돌에 구름과 용무늬와 사자가 새겨져 있으나 마멸이 심하다. 윗받침돌에는 솟은 연꽃무늬가 삼중으로 조각되어 둘러져 있다.

 

8각의 탑몸은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이 새겨져 있고, 각 면에는 문(門) 모양과 사천왕상(四天王像)이 새겨져 있다. 지붕돌은 얇고 경사가 완만하며, 처마부분에는 엷은 곡선을 이루고 서까래를 새겼다. 지붕 경사면에는 기와골을 표시하였고, 그 끝에는 막새기와까지 표현함으로써 목조건축의 지붕 양식을 충실히 모방하였다. 꼭대기에는 몇 층의 단이 있고, 그 위에 원형이 작은 돌에 있을 뿐 모두 없어졌다.

 

높이는 3m로 특히 옥개석(屋蓋石)에서 목조건축(木造建築)의 세부 양식을 충실히 모각(模刻)하였으며, 탑신부(塔身部) 각 면에는 사천왕입상(四天王立像)이 양각(陽刻)되어 있다. 탑 옆에는 탑비가 건립되어 있어서 이 부도의 주인공을 비롯한 여러 관련된 내용을 알 수 있다. 비문에 의하면, 수철화상이 진성여왕 7년(893)에 입적한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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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철화상(秀澈和尙)은 통일신라 후기의 승려로, 본래 심원사에 머물다가 뒤에 실상사에 들어가 수도하였다. 진성여왕 7년(893) 5월 77세로 이 절에서 입적하자 왕이 시호와 탑명을 내렸다고 한다. 비문에는 수철화상의 출생에서 입적까지의 행적과 사리탑을 세우게 된 경위 등을 기록하고 있다. 그는 실상사에서 입적하였으나 심원사의 승려이었기 때문에 비문에는 ‘심원사수철화상’으로 적고 있다. 비문을 짓고 쓴 사람은 알려져 있지 않으며, 마멸과 손상이 심한 편이다.

 

탑비의 형식은 당시의 일반적인 탑비 형식과는 달리 거북모양의 받침돌 대신 안상(眼象) 6구를 얕게 새긴 직사각형의 받침돌을 두어 그 위로 비를 세웠다. 비를 꽂아두는 비좌(碑座)에는 큼직한 연꽃을 둘렀다. 머릿돌에는 구름 속에 용 두 마리가 대칭하여 여의주를 다투는 듯한 모습이 조각되어 있고 그 앞면 중앙에는 ‘능가보월탑비(楞伽寶月塔碑)’라는 전각이 새겨져 있는데, 조각수법이 형식적이고 꾸밈이 약화된 경향이 뚜렷하다.

 

비의 건립연대는 효공왕(재위 897~912)대로 추정되고, 글씨는 당대를 전후하여 성행한 구양순체를 따랐다. 전체 높이는 약 3m이며, 현재 보물 제34호로 지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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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상사의 개창조인 홍척국사(洪陟國師)의 사리를 모신 탑으로, 8각의 평면을 기본으로 삼고 있는 전형적인 팔각원당형 부도이다. 홍척은 통일신라 후기의 승려로 시호가 증각(證覺)이고, 부도 이름이 응료(應蓼)여서 ’증각대사응료탑‘으로 불린다.

 

8각형의 석재를 여러 층 쌓아 기단(基壇)을 조성한 뒤 연꽃이 피어있는 모양의 돌을 올렸다. 각 면의 조각은 닳아 없어져 거의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고 위 받침돌의 연꽃잎만이 뚜렷하다. 탑신은 몸돌과 지붕돌로 구성되었는데 비교적 낮은 편이다. 몸돌은 기둥 모양을 새겨 모서리를 정하고 각 면에 아치형의 문을 새겼으며, 그곳에 문을 지키고 있는 사천왕상(四天王像)을 돋을새김하였다. 지붕돌에는 목조건축의 처마선이 잘 묘사되어 있다.

 

전체적인 조형과 조각수법으로 보아 9세기 후반의 작품으로 추정되며 전체 높이는 2.42m이다. 현재 보물 제38호로 지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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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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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탑비는 비신(碑身)이 없어진 채 현재 거북받침돌과 머릿돌만이 남아있다. 받침돌은 용의 머리를 형상화하지 않고 거북의 머리를 그대로 충실히 따랐다. 머릿돌은 경주의 ‘태종무열왕릉비’ 계열에 속하는 우수한 조각을 보여주는데, 앞면 중앙에 ‘응료탑비(凝蓼塔碑)’라는 비 명칭을 새겨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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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락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맞배지붕 건물로 1684년(숙종 10) 계오대사(戒悟大師)에 의해 부도전으로 지은 것이다. 1788년(정조 12)에 금파 관오대사(錦波寬旿大師)가 중수하였고 이후 1832년(순조 32)에 의암대사가 기봉(奇峰)ㆍ처윤(處允) 스님과 함께 중건하면서 극락전으로 이름을 바꾸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내부에는 지불(紙佛)인 아미타여래좌상과 1985년에 조성한 아미타후불탱이 봉안되어 있다. 현재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45호로 지정되어 있다.


극락전은 조선 선조 30년(1597) 정유재란 때 불에 탔다가 다시 지어졌다. 절의 역사를 기록해 놓은 자료에 의하면 순조 31년(1831)에 지어졌다고 한다.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의 건물로, 지붕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집이다. 가운데 칸에는 세 짝의 문을 달았고 양쪽은 한 짝씩의 문을 달았다. 건물 안은 바닥에 마루를 깔고, 뒷쪽 높은 기둥 사이에 후불벽을 설치하고 불단 위에는 아미타불이 모셔져 있다.

공포(空包)를 기둥 위에만 짜 올린 주심포식(柱心包式)이나, 평방(平枋)이 있는 것은 원래 다포(多包)집인 이 전각의 크기가 작기 때문에 주간포작(柱間包作)을 생략한 것이라 여겨진다. 정면의 길이는 6.55m, 측면은 4.88m인데 정칸(正間)은 3.15m로서 세 장의 빗살창호를 달고, 좌우칸은 너비 1.7m로 외짝 빗살 창호를 달았다. 내부는 중칸에 고주(高柱)를 세워 전후에 퇴보를 걸고, 내주(內柱)에 연하여 불단을 짜고 그 위쪽에 중종보(中宗樑)에 붙여 우물천장을 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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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상사...이우걸

구름을 잠재우고 산을 잠재우고
나그네를 잠재우고 마을을 잠재우면서
불면의 밤을 가꾸는
너는 무엇인가?

방황은 외투처럼 네가 걸치는 화두일까
벼랑을 건너가는 종소리의 아픔일까
석장승 외진 입상의 정처 없는 시선일까.

뜰에 진 꽃잎 하나 무심히 줍는 사이
천년이 흘러가고 또 천년이 온다 해도
스스로 채워 둔 족쇄
풀 길 없는 사유의 강.

 

2008.04.13

 

참고자료:남원문화원, 문화재청,답사여행의 길잡이

출처 : 저 산길 끝에는 옛님의 숨결
글쓴이 : 선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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