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북도/남원시

[스크랩] 남원...여원치 마애불, 서천리 장승

임병기(선과) 2008. 6. 7. 1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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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누라가 챙겨준 토마토, 오랜지로 요기를 하고 선새벽에 여원치로 향했다. 일사천리로 고갯마루에 도착했지만 팻말 하나 없다. 별 수 없이 가장 가까운 마을을 찾아 수소문하여 겨우 만났다. 마애불은 이백면 여원치 정상 아래에 있는 바위에 조각되어 있었다.

 

어렵게 찾은 반가움도 잠시 울컥 눈물이 나왔다. 어제 본 호기리 마애불도 사람을 미치게 하더니 여원치 마애불은 얼굴을 반이나 잃어버렸다. 그러고도 미소 지으시며  찾아주어 고맙다고 손을 내민다. 울고 있는 마애불은 없을까? 차라리 울고 있으면 이렇게 처연한 느낌이 들지 않았을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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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기둥 2개는 보호각의 흔적이다. 불상의 머리부분은 약간 파손된 상태이며 가슴 아래 부분은 땅에 묻혀 좌상인지 입상인지도 모르겠다. 두광이 보이고  두 귀는 길어 어깨에 닿았고 턱의 윤곽은 뚜렷하며 목에는 삼도를 표현했다. 법의는 통견이며 왼쪽팔은 떨어져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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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화에의하면 왜장이었던 아지발도(阿只拔都)가 함양에 살던 그녀의 젖가슴에 손을 대며 희롱하므로 칼로 스스로 자신의 가슴을 내려쳐서 잘라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른손으로 가슴을 가리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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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상 옆면에는 1901년(광무(光武) 5)에 당시 운봉현감이었던 박귀진이 새긴 명문이 음각되어 있는데 이 기록에는 태조 이성계가 황산대첩을 거두기 전에 꿈에 노파가 나타나 이길 것을 말해 주어,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불상을 조성하였다고 전한다.

 

"고려 우왕(愚王) 6년인 1380년, 부산을 시작으로 함양을 점령한 왜구들이 운봉에서 가까운 인월까지 쳐들어왔다. 조정에서 이성계를 이 지역으로 내려 보내 고을을 지키게 하였다. 그가 남원에서 운봉으로 진격하는 길에 여원치에 다다랐는데 갑자기 안개가 자욱하게 끼더니 노파 하나가 나타났다. 도고라는 그 노파가 이성계 장군에게 왜구들과 싸울 전략이나 싸울 장소와 같은 것을 알려주고는 홀연히 사라졌는데 과연 그 노파의 말대로 하여 연승하며 왜구들을 물리칠 수 있었다는 것이다.

후에 이성계는 여원치 정상에 진을 치게 한 그 노파에 대한 고마움을 기리기 위해 고갯마루의 바위에 노파의 상을 새기고 전각을 지었으며 산신으로 모시게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눈앞의 상은 불상조성의 요소를 모두 갖춘 엄연한 여래상이며 그렇기에 더구나 여상은 아닌 것이다. 물론 여느 불상보다는 얼굴이 풍만하고 몸집 또한 살집이 넉넉하며 또렷한 입술과 신체에 비해 작게 표현된 손과 같은 것들이 여성의 모습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그렇지만 나는 이성계와 관련된 설화 자체를 부인할 생각은 없다. 그것은 운봉에서 인월로 나가는 길에 그와 관련된 유적지들이 많이 남아 있을 뿐 더러 여원치 근처에는 병사들이 주둔했던 것을 암시하는 병막동(兵幕洞)과 같은 지명들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좀 더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이성계는 여원치 전투의 승리로 그친 것이 아니라 조선을 건국하고 태조가 된 인물이다. 그 후 마을 원로들이 이성계와의 관계성을 유지하기 위해 그의 발길이 닿은 여원치의 전투를 미화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는 않았을까. 왕이 자신의 고장에서 전투를 벌여 승리했다는 것만으로도 그 고장은 자부심을 느낄만했을 테니까 말이다. 그 과정에서 기존에 존재하던 마애불을 원용(援用)하여 설화를 완성시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다."..이지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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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님들이 찾아가실때는 여원치 정상에서  위사진 입석이 서있는 방향으로 100m정도 내려가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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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천리 당산은 당산나무, 돌장승, 솟대로 구성되어 있으며 함께 마을의 수호신으로 모셔지고 있다. 남녀 한 쌍인 돌장승은 운봉초등학교 서쪽 500여m 지점에 마주보고 서 있는 부부장승이며, 이 주변에 당산나무가 있다. 장승과 솟대를 함께 세워 제사를 지내는 것은 전라도 지방에 남아 있는 당산신앙의 한 형태로 원래는 이곳에도 솟대를 함께 세웠던 것으로 보여지지만 마을 중앙에 있었던 솟대의 모습은 사라지고 흔적만 남아 있을 뿐이다.

 

부부장승은 마을의 허한 곳을 방어하고 서쪽을 진압한다는 의미에서 각각‘방어대장군’,‘진서대장군’이라 새겨져 있다. 이 석장승들은 만든 이가 다른 듯 벙거지의 제작형식이나 표현기법이 서로 다르다. 선두 숲이라고 하는 곳의 길 양쪽에 마주보고 서 있다. 왼쪽이 방어대장군(防禦大將軍), 오른쪽이 진서대장군(鎭西大將軍)이다. 방어대장군은 높이 2.2m, 진서대장군은 높이 2.07m 정도이며, 약 300년 전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대표적인 악상(惡像)으로 꼽히는 이들 장승은 둘 다 수염이 구불구불 길게 드리워진 남자상으로 생김새가 서로 닮았다. 세모꼴 벙거지 같은 모자를 쓰고, 왕방울만한 눈알을 험상궂게 부라리며, 주먹코는 벌렁벌렁하고, 앙다문 입 사이로 비어져 나온 굵은 윗니가 매우 사나워 보이나 평생을 묵묵히 농사와 씨름하며 온갖 풍상을 겪어 낸 농부들의 건강함이 그대로 담겨 있다.

 

이 장승들은 1989년에 도난을 당했다가 되찾았는데, 방어대장군보다 더 우악스럽지만 시침떼고 엉뚱한 척하는 표정이 외려 익살맞다. 목이 부러져 연결해 놓은 자국이 보이는데, 『남원군지』에 의하면 진서대장군이 여자로, 부부싸움을 하다 남편한테 얻어맞아 목이 부러졌다고도 하고, 또 두 장군이 서로 싸우다가 목이 부러졌다고도 한다. 그렇지만 진서대장군의 턱수염이나 우락부락하고 험상궂은 표정으로 보아 남자가 틀림없을 듯하다.

 

현재에도 마을의 안녕과 복을 빌기 위해 음력 정월 초하룻날 당산나무에 제사를 지낸 다음에 석장승에게도 간단한 제를 행한다. 석장승은 마을 수호의 부수적인 신이지 주신(主神)은 아니다. 시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옛 모습이 잘 간직되어 있고 민간신앙을 보여주는 한 형태로서 가치가 있다. 지금도 매년 음력 정월초하룻날에 당산제가 행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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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어대장군(防禦大將軍)

운봉초등학교 서쪽 500여m 지점에 진서대장군과 마주보고 서 있는 돌장승이다. 마을의 수호신으로 모셔지고 있다. 이것은 풍수지리사상에 바탕을 두어 마을의 허한 곳을 방어한다는 뜻에서 방어대장군이라 새겨져 있다. 높이 220㎝, 너비 50㎝로 머리에는 모자가 씌워져 있다. 튀어나온 둥근 눈과 주먹코, 아래로 쭉 뻗은 송곳니가 있으며, 가슴에 한 가닥의 수염이 있는 남장승으로 귀가 없는 것이 특징이다. 지금도 매년 음력 정월초하룻날에 당산제가 행해지고 있다. 장승의 건립시기는 알 수 없으나 형태가 잘 보존되어 있어 민간신앙의 자료로서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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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서대장군(鎭西大將軍)

운봉초등학교 서쪽 500여m 지점에 방어대장군과 마주보고 서 있는 돌장승으로, 마을의 수호신으로 모셔지고 있다. 이것은 풍수지리사상에 바탕을 두어 마을의 허한 곳인 서쪽을 막아준다는 의미인 진서대장군이라고 새겨져 있다. 높이 195㎝, 너비 58㎝로 여장승으로 벙거지모양의 모자를 쓰고 있다. 둥근 눈에 속눈썹이 깊게 새겨져 있고 주먹코에 귀가 달려 있는 모습으로 얼굴표정이 사실적이다. 건립연대는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신앙적 의미뿐만 아니라 사람의 표정이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높은 예술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장승자료 출처:남원 문화원

 

2008.04.13

출처 : 저 산길 끝에는 옛님의 숨결
글쓴이 : 선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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