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봉화군

[스크랩] 봉화...각화사

임병기(선과) 2008. 6. 7. 1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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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영루

 

각화사는  686년(신라 신문왕 6) 원효 대사가 춘양면 서동리, 지금의 춘양 고등학교 교정에 자리잡았던 남화사 대신에 새로 사찰을 세웠는데, 옛 절을 생각한다 하여 각화사라 했다고 전하며  1777년(정조 1) 이곳에 태백산 사고(太白山史庫)를 지어 왕조실록(王朝實錄)을 보관하게 하였으며, 이 때 머물던 승려가 800명이 넘어 3대 사찰의 하나가 되었다고 한다.

 

여로에 지쳤는지 아들놈은 디카를 들고서는 지애비와 다른 방향을 어슬렁 거린다. 그래 때로는 너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절집이 더 아름다운 추억이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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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울가에 있었던 석탑을 이건하였다. 얼핏보면  2기단의 탑으로  상기단 몸돌에 방형 면석이 끼워 진듯하다 실제 어느 자료에는 그렇게 설명되어 있다.  하지만 내눈에는  탑을 이건하면서 새로히 지대석을 깔았으며 상기단 몸돌받침이 지대석인 단층 기단으로 판단된다. 옥개석 받침은 5*3*3이며 옥개석 상부가 몸돌에 비해 너무 커서 불안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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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웅전 주련이 아들놈에게 관심이 있겠는가?

天上天下無如佛 천상천하 어디에도 부처님같이 존귀한 분은 안 계시고

十方世界亦無比 시방 세계를 다 둘러봐도 역시 비교될 만한 분 없도다.

世間所有我盡見 세간에 있는 것 모두를 내가 다 보았어도

一切無有如佛者 모두가 부처님같이 존귀한 분 없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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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느 절집 산신각이 그러하듯 무심한 표정으로 우릴 바라보기에 오늘은 무심코 한말씀 드렸다. 아들과 여행 무사히 마치도록 태백산 산신님 굽어 살피옵소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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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설만큼이나 애처롭게 홀로, 외로히 핀 상사화를 바라보며 너 상사화 전설 아냐?고 물었더니 피식 웃기만 하고 디카를 조작하기에 바쁘다.

우리 어릴때는 여름날은 쑥향 내음의 모깃불이 깔린 마당 평상에서, 긴 겨울밤에는 부엉이 울음 들어가며 할머니의 '전설 따라 삼천리'에 웃고 울며  자랐었는데 우리아이들에게 그런 감정을 앗아간 것은 우리세대의 책임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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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화사는 삼재불입지(三災不入地)라 하여 선조 39년(1606)에 각화산 중턱에 태백산 사고를 건립하여 1913년까지 약 300여년간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여 왔었다고 하지만 흘러흘러 지금은 선방으로 이름 떨치며 이따금 찾아오는 객에게 풍경소리만 흩날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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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화사 귀부는 고려 전기의 문신 김심언(金審言: 신라 경순왕의 넷째 아들 김은설의 4세손이다)이 세운 통진대사비(通眞大師碑)의 일부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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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북이 등 중앙에 마련된 비좌는 파손되긴 하였으나 거의 본래의 모습을 갖추고 있으며 등에는 육각형이 전면에 덮여 있고, 그 안에는 ‘왕(王)’자와 ‘만(卍)’자를 새겨 통진대사가 왕사. 국사였음을 암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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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곡을 타고 내려오는 시원한 바람에 몸을 맡기고 서있는 9기의 조선시대 석종형 부도는 각화사의 옛내력을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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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마침 요사를 나오신 스님에게 태백산 사고 위치와 소요시간을 여쭈었더니  40분은 걸린다고 말씀하신다. 아들놈을 바라보았더니 표정을 읽기가 난해했다. 올라가자는 것인지 내려가고 싶은 것인지, 하지만 우리 부자는 피곤함보다 편안함을 택한 결론에는 빠르게 의견이 통일되었다. 우리는 너무나 인간적이기에......

 

2007.08.13


출처 : 저 산길 끝에는 옛님의 숨결
글쓴이 : 선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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