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봉화군

[스크랩] 봉화...가평리 계서당(춘향전. 이도령의 실존인물 성이성)

임병기(선과) 2008. 6. 7. 1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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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부터 나선길 아들놈도 피곤했는지 곤히 잠들어 혼자 계서당을 찾았다. 남향한 계서당은 당호로 계서 성이성이 1613년에 지었다고 전해온다. 들이 넓지 않은 봉화지만 제법 너른 들 얕은 산아래에 자리했지만 경사진 환경을 활용 기단을 쌓아 지은 탓에 들판을 조망할 수 있다. 순차적인 보수공사인지는 모르지만 5개월전 4월1일이 공사 완료 날짜인데 1년 후에도 준공은 어렵겠더라.

 

솟을문을 들어서자 행랑채에서 집안일을 하시던 종부(나중에 알았다)께서 아주 반갑게 맞아주신다. 항상 느끼지만 고택 종부들은 봉제사 접빈객이 몸에 베인 탓에 일상적인 인사가 아니라 귀한 손님을 대하는 자세이다. 계서당을 둘러보러 왔다는 말씀에 공사중이라 자세히 보여드릴 수 없으시다며 미안해하시는 표정이 얼굴에 역력하다.

 

혼자서 보수중인 계서당을 살펴보고 있으니 허수룩한 촌부 차림이지만 얼굴이 환한 어르신이 다가오셔서 방문목적을 말씀드렸더니 본인이 계서 선생의 13대손 성기호라며 많은 말씀을 들려주셨다.

 

성이성 선생은 숙종(?) 때 청백리로 녹선되었고, 암행어사를 4번 역임하였으며 춘향전의 실존 인물이라고 했다. 우리문화유산에 관심이 있는 분이라면 익히 알고 있었겠지만 계서당이 최근에 문학기행의 메카로 대두되는 이유도 춘향전의 이도령이 성이성이라는 최근의 논문, 방송, 언론 보도를 통해 널리 알려졌기 때문이다.

 

뿐만아니라 성이성 선생은 강직하여 직언을 서슴치 않았다고 말씀하시어 검제의 김시인 어른도 학봉선생을 그렇게 말씀 하시더러고 했더니 곁에 계시던 종부께서 "우리 시숙모님이 검제서 시집 왔습니다." 하신다. 바로 안동을 비롯 경북북부 지방의 수인사 통과의례의 단면으로 우리 집안과 그 집 가문은 남이 아닌 일가라는 강한 뿌리 의식이다.

혹자는 족벌의 폐해를 거론하지만, 역기능 보다는 순기능이 더 많았으며 독특한 지방문화로 바라보고 싶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독립투사가 배출된 지역이 어디인가?

 

어르신의 말씀이 계속되는 와중에 종부께서 커피와 계서 성이성선생 관련 자료집과 봉화군에서 이몽룡 축제를 개최하자는 차주성 시인의 논문을 건내주셨다.나는 커피를 마시며 영화의 주인공 처럼 폼을 잡고 말씀을 경청하며 끝어질 듯 하면 추임새를 넣어 더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계서당은 갈우음수 형국의 젖가슴에 위치하며 멀리 바라보이는 안동 학가산이 문필봉 처럼 보여 문사가 많이 배출되었다고 하시며 정확히 자좌 좌향에 자리 잡았다고 한다. 구미 금오산은 바라보는 위치에 따라 문필봉으로 보이는 지역에서는 선비가 배출 되고, 노적가리로 보이는 지역에서는 부자가 많지만 남자의 상징으로 보일 때는 바람난 여자가 많다고 은근히 말씀드렸더니 빙긋이 웃으신다. 또한 갈우음수형국보다는 갈마음수 형국이 많으며 비보책으로 연못을 조성한다고 말씀드렸더니 나중에 풍수를 만나면 연못을 확인해 보시겠다고 했다.

 

성기호 어르신은 성이성 선생의 일대기를 꿰차고 계시는 듯 경력을 말씀하시며 당시의 벼슬이 오늘날 어떤 직책에 해당되는지 비교하시며 동의를 구하는데 난 그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어르신 말씀도중에 불천위 사당은 한 곳에 두위를 모실 수 없어 한 분은 다른 사당으로 모셨다는 말씀에 내머리가 깨운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즉, 해남 녹우당에는 2개의 사당이 있어 내력이 무척이나 궁금했지만 지금까지 명확한 이유를 몰랐었다. 성기호 어른의 말씀을 넓게 해석하면 녹우당 1개 사당은 불천위을 모셨으며, 1개 사당은 가묘가 아니겠는가?(정확한 이유를 아시는 분 댓글 부탁합니다.)

 

많은 사람이 찾아와 불편하지 않으시냐고 넌지시 여쭈었더니 선대를 자랑할 기회인데 오히려 즐겁다라고 말씀하시며 현재의 계서당 보수 공사에 대해 만족하지 못한 사례를 언급하시었다. 행랑채의 솟을 대문은 닫혀지지 않고, 화장실은 빗물이 새며, 마루는 내려 앉았다. 또한 기왕 보수공사를 할려면 허물어진 축대와 담장도 보수가 시급한데 보수범위에서 제외되었다고 하셨다.

 

아들과 함께 왔다는 이야기에 종부는 요구르트를 기어코 내손에 집어 주시고, 종손은 대문밖까지 마중을 해주셔서 미안함과 고마움에 몸둘바를 몰랐다.

 

어르신의 많은 이야기 대부분은 계서 성이성 선생의 일대기와 춘향전의 실존 인물이란 내용이었다. 나름으로 정리를 해왔지만 제대로 연결이 되지 않고 역사적 사실을 왜곡할 것 같아 일대기와 춘향전 글은 봉화군청 홈에서, 직접 보지 못한 계서당의 건축적 특징은 문화재청에서 옮겨 왔으니 긴 글이지만 천천히 숙독하여 답사,특히 문학기행을 염두에 두고 계신 분들에게는 작은 자료가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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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리성은 청백리로 강직, 개결(介潔), 소신에 의연(毅然)... 상사앞에서도 과감하였다. 정경세(鄭經世)의 문인으로 1616년(광해 8) 21세로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조정이 탁란(濁亂)하여 과거에 외면하였다. 1624년(인조 2) 정월 이괄(李适)의 반란에 공주(公州)로 피난하는 왕을 호종(扈從)하는 그의 아버지를 따랐다.  그해 2월에 난리가 평정되어 성균관(成均館)에 유학할새, 그때 공부하는 선비들의 풍습이 매우 문란한 상태였는데, 그가 관의 유생(儒生)을 단속하는 색장(色掌:임원)이 되어, 해이해진 규율을 바로 세우매, 식자들이 칭찬했다.

 

1627년(인조 5) 식년 문과에 급제, 승문원부정자(承文院副正字)에 임용되었다. 1629년(인조 7) 부친상을 당하여 복을 벗고, 정자(正字)에 올라, 승정원주서(承政院注書)에 옮겼다가, 시강원설서(侍講院設書)를 거쳐 1633년(인조 11) 성균전적(典籍)에 올라,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 -시강원사서(司書)를 지내고, 이듬해 병조(兵曹)-예조좌랑(禮曹佐郞)을 거쳐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이 되었다.


인조(仁祖)는 즉위하자, 그 아버지 정원군(定遠君:宣祖의 다섯째 아들)을 왕으로 추존(追尊)하여 종묘에 들이려 하매, 조정에서는 그에 대한 찬반이 엇갈려 여러 해에 많은 논란이 거듭되던 끝에 마침내 원종(元宗)으로 추숭(追崇)되었거니와 이때 간관(諫官)이 된 그는 이에 대하여 자못 강경한 뜻으로 상소(疏)했으니 그대강은 '....... 오늘의 일은 조용히 강구(講究)하여 가장 바른 방도를 찾아 행하고라야, 어버이를 높이는 도리와 종묘(宗廟)의 예에 아울러 유감됨이 없을 것인데, 전하는 한갖 지정(至情)에 가리운바 되어, 평정한 마음으로 사리를 살피지 못하시고 매양 엄중한 분부로 꺾어. "세력에 아부한다", "침흘린다", "사욕을 품음이라"하시니, 대체 전하의 조정에서 일을 말하는 바에 있어서, 전하의 뜻에 거스리 면서 처벌이 따를 것이요, 순종하면 은총과 영화를 얻을 것인데, 구태어 그 이익 됨을 버리고, 그 해로움을 취하는 자의 뜻이 과연 세력에 아부함에, 침을 흘림에, 사욕을 품음에 있다고 하오리까.


만일 조정 신하들이 과연 그런 마음들을 가졌다고, 전하께서 그런 줄을 분명히 아신다 하면 물리치거나 내쫓아야 할 것인데, 이제 이미 그 자리에 두어, 직책을 맡게 해놓고, 한번 뜻에 거슬렸다하여, 정(情)에 벗어나는 말로 강제로 죄를 씌어, 그 입을 틀어막으려 하시니, 이 어찌 성왕(聖王)의 말씀일것이며 신하를 예로 부리는 도리이라 하오리까.’

 

또 유백증(兪伯曾 : 인조때 참판을 지냄 시호 忠景)의 몇 신하(인조 뜻에 찬성하는 )의 상소를 논함에 답하여, '그 죄는 다만 영합(迎合)이란 두글자이겠는데, ‘영합'은 비록 두 글자이나, 그 해독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니, 예로부터 신하로서 임군을 고혹(蠱惑)하고 나라를 그르치는 것이 영합에 비롯되지 않음이 있는가. 영합이란 그 임군이 하고싶어 하는대로 인도함을 이름인데, 전하의 하고 싶어함이 과연 모두 도리와 경위에 맞으면 영합이란 것이 역시 좋으려니와 만일 그렇지 못한 경우임에도 반드시 영합하려 하면 자칫 말 한마디로 나라를 그러치게 함이 아닐 것인가.

 

이제 입묘(入廟 : 定遠君을 元宗으로 追尊하는)의 일은 전하의 마음이 꼭 수행함에 있으므로 저네들(영합하는 신하들)도 "수행해야 합니다"고 할것이나, 만일 전하께서 불가하다 하시면 저네들도 역시 불가하다고 할 것이다. 옛날 이윤(李尹)이 태갑(太甲)에게 이르기를 "말이 네 마음에 거슬리면 반드시(그 의미들) 도(道)에 구하고, 말이 네뜻에 순하면 반드시(그 의미를) 비도(非道)에 구하라"했는데, 전하는 어찌하여 이로써 반성하지 않으시는지... 아 - 바른 말 하는 선비는 물러가고 뜻이나 맞추는 사람은 승진하니, 충간(忠諫)의 길은 막히고 영합이 풍습을 이루게 되면 전하의 큰 욕망은 달성할 수 있으려니와, 전하의 나라일은 종당 어찌 될것인가’라고 했다. 상소로 하여 그는 곧 벼슬에서 물러나 돌아왔다.

 

그해 겨울에 시강원사서(侍講院司書)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고, 1635년(인조 13) 사서(司書)로 복직하여, 수찬(修撰)이 되었다. 이때 그는 인성군(仁城君) 공(珙 : 宣祖의 7째 아들)의  아들 용(用)이며, 여러 목숨을 죽음에서 구원했으니, 이는 그의 보람된 공적가운데 하나라 할 것이다.

 

-앞서 1628년(인조 6) 유효립(柳孝立)이 대북(大北)의 잔당을 규합하여 역모를 꾀하면서 인성군(仁城君) 공(珙)을 왕으로 추대하려 했다하여, 인성군을 자결하게 하고, 연좌처형하기로 된 그 아들 용(用)을 구명하고자 간곡한 뜻으로 상소(疏), 경연(經筵)에서도 여러차례 간절한 진달(陳達)로 용서를 청하매 인조임금이 드디어 감동되어 인성군의 아들 용이 구원됨과 함께, 같은 역률(逆律)에 연좌되어 대년(待年)중이던 사람들도 모두 죽음을 면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고도 그는 이런 사실을 전혀 말하지 않았기에, 구원받은 그 사람들 조차 그런줄을 모르게 되었다.

 

그해(1635년<인조 13>) 가을 ∼이듬해 겨울까지에 수찬(修撰)·교리(校理)·정언(正言)·시강원문학을 두 세차례씩 역임했다. 1636년(인조 14) 겨울 청(淸)의 침략(병자호란)으로 임금이 남한 산성에 피난했는데, 그는 수찬으로 마침 귀향해 있던중 변을 듣고, 망와(忘窩) 김영조(金榮祖)·학사(鶴沙) 김응조(金應祖)와 함께 급히 임금곁으로 달려가던중 충주를 지나다가 경상감사 행영(行營)에서 감사(監司)심연(沈演)을 만났다.

 

'적군에 막혀 남한산성에는 접근할 수 없는 상황이니, 차라리 여기서 힘을 바침이 옳으리라’고 하는 감사의 말을 쫓아, 거기서 감사 심연(沈演)의 참모가 되었다. 그의 도타운 충의(忠義)와 비상한 지모(智謀)에 심감사는 감탄을 마지 않았다.

피난 정부가 더 버틸길이 없어, 남한산성에 포위된지 꼭 달반 만인 1637년(인조 15) 정월 그믐날, 마침내 왕이 성을 나와 적에게 항복하고 말았다. 그는 조정에 달려가, 2월엔 진휼어사(賑恤御使)로 경상도 여러 고을을 두루 돌아 지방관리의 정사와 민정(民情)을 살폈으며, 이어 호서(湖西) 암행어사가 되어 탐학(貪虐)한 관원들을 징계하고 선정(善政)이나 미행(美行)이 있는 이를 포상하매 일도(一道)가 숙연했다.

그때, 권신(權臣)들이 서로  알력을 빚어, 공직(公直)한 인품으로 명망을 띤 이성(以性)을 서로 끌고자하여 이조정랑(吏曹正郞)을 삼으려 하매, 그는 욕되게 여겨, 어버이 병을 이유로 사직하고 돌아왔다.

 

이로부터 연달아 임명이 있었고, 옛 동료며 친지들도 복직을 권했으나 응하지 않다가, 이듬해 봄 비로소 병조정랑(兵曹正郞)에 취임하매, 대신들이 서로 자기파당으로 끌고자, 수찬(修撰) - 이조정랑에 옮기게 하려다가 그의 강직(剛直)한 성품을 알고 물러섰다.

 

다시 교리·사간(司諫)·호남(湖南) 암행어사 등을 거쳐, 다시 사간·집의(執義)·교리를 지내고, 어버이를 위해 외직(外職)을 구하여, 합천현감(陜川縣監)에 부임했다.

그는 한결같은 청렴공직(公直)으로 갓난 아기를 어루만지듯 성력으로 백성을 돌보았으며, 봉록(俸祿)을 던져, 전임 현감이 축낸 곡식 수천석을 대신 충당했고, 교학을 일으킴에도 힘을 기울렸다.  그때 감사(監司)나 병사(兵使)가 서슬이 대단했으나 이성(以性)에게는 예우가 깎듯했으며, 두간이 감영(監營)- 병영(兵營)에서 재물을 내어, 고을 백성을 구호함에 돕기도 했다.

 

1644년(인조 22) 어떠한 사건으로 파직되어 돌아왔다가, 그 겨울 시강원필선(弼善)을 거쳐 보덕(輔德)에 옮기고, 이듬해 부수찬(副修撰)이 되어, 청나라 사행(使行)에 서장관(書狀官)으로 (正使는 麟平大君) 북경에 다녀올새, 돌아오는 행장(行裝)에는 다만 침구 한벌 뿐이어서, 부사(副使) 정세규(鄭世規)가 매우 공경했다고 한다.

그해 가을서부터 이듬해(1646년<인조 24>) 여름까지에 교리·수찬을 네차례, 사간(司諫)·사헌부 집의(執義)를 네차례, 시강원 보덕 한차례에 각각 임명되어 혹 취임하기도, 안하기도 했다.

 

그 6월에 별시(別試)  과거에 고관(考官)이 되어, 주시관(主試官)이 출제를 잘못한 사건에 연루되어 함께 파직되었다가 1647년(인조 25) 7월 다시 교리에 복직되고 겨울엔 또 호남행 어사가 되었으며, 1648년(인조 26) 봄 다시 집의·홍문관응교(弘文館應敎)를 거쳐 담양부사(潭陽府使)에 부임했다. 1650년(효종 1) 암행어사가 그 치적(治績)을 임금께 알려 표리(表裡)가 하사되고 포상하는 유서(諭書)가 내렸다. 다시 교리(校理)로 불러, 곧 집의(執義)에 재수되고, 겨울에 부응교(副應敎)를 거쳐 다시 사간에 옮겼다.

 

그때 영남선비들이 우계(牛溪) 성혼(成渾)과 이율곡(李栗谷)을 문묘(文廟)에 배향함이 부당함을 상소하고 일도(一道)의 선비들이 과거에 응시하시기를 거부 했던바, '경과(慶科 : 나라에 경사가 있어 보이는 과거)를 거부함은 곧 임군을 무시하는 작태다.'라는 말이 낭자하니, 이에 영남선비들이 또 상소로 변명하여, 우비(優批)가 내렸으나, 일반의 불평이 대단했다.

 

마침 도내(道內) 어느 장난꾼이 거짓으로 왕의 비답(批答)을 꾸민 사건이 있어, 의논이 몹시 시끄러웠는데, '그것은 앞서 상소한 유생(儒生)가운데서 나왔으리니, 필시 화를 넘겨씌우기위한 계책이리라'함이었다. 이에 대하여 사람들이 모두 몸을 사렸으나, 이성(以性)이 나서서 그 애매함을 힘껏 변명하여, 사림(士林)에 화가 미치지 않도록 했다.

 

1651년(효종 2) 또 사간 겸 춘추관편수관(春秋館編修官)이 되었다. 어느날 가주서(假注書) 이명익(李溟翼)이 경연(經筵)에서 말한 것을 밖에 퍼뜨렸다 하여 임금이 이명익을 나포하여 국문(鞠問)하도록 명령했다.

이번에도 이성(以性)이 임금께 '경연에서의 일은 본래 공개함이 마땅한 것으로, 반드시 숨길일은 아닙니다.'라고 간(諫)했으나, 임금이 노여움을 풀지 않으매, 그는 드디어 사직하고 물러 오려 할새, 마침 <인조실록>이 완성되어, 편찬에 참여했던 춘추관(春秋館) 관원들은 공로로 승진시키는 예임을 들어, 사국(史局)의 동료들이 조금만 지체하기를 권했으나, 그는 '언관(言官)이 되어 말이 쓰이지 못하는 터에 은상(恩賞)을 바라는 것은 너무 부끄러운 노릇이라'하고 결연히 돌아와 버렸으니, 이로 말미암아 그는 더욱 임금의 뜻에 거슬린바 되어, 몇해 동안은 통 임명이  없었다.  이조판서(吏曹判書) 정세규(鄭世規 )가 '이 신하(以性)는 본시 청백하고 근실하기로 알려져, 양조(仁祖·孝宗)를 섬겨 온 경악(經幄)의 신하이온데, 말 한번으로 전하의 뜻에 거슬렸다하여 버릴수는 없습니다.'라고 진언했으나, 임금은 대답도 하지 않았다.

 

1653년(효종 4) 3월 비로소 창원부사(昌原府使)에 제수되어, 그는 사양하지 못하고 부임했다. 이때 조정에서 진영(鎭營)을 설치하고 힘써 군정을 닦으려 할새, 무관들이 세력을 부려, 그에 따른 일로 여러 고을이 고달 팠으며, 또 민가의 노비(奴婢)들을 추쇄(推刷 : 의무를 다하지 않고 도망친 노비들을 찾아 돌려보냄)하는 일, 양반·서민집 노비들이 주인을 배반하고 투입하는 자가 잇달아, 송사(訟)가 분분했다.
이성(以性)은 그 폐를 감사에게 상신함으로써 감사가 나라에 알려 금지케 하매 그 폐단이 훨씬 숙어졌다.


창원은 해변 고을이라 하나, 마포(馬浦) 1면만이 해산물을 공납(貢納)하는 구실을 부담했는데, 이 해에 마포사람들이 죽는 불상사가 있었다. 이성(以性)은 매우 긍휼히 여겨, 그 지역에는 구실을 모두 면제시키고, 해산물 공납까지도 관에서 사서 바치는 등으로 성심으로 민생을 보살피매, 떠나 도망쳤던 백성들이 사방에서 모여들어, 그가 다스리기 2년에 백성의 살림이 생기를 되찾게 되었다. 1654년(효종 5) 가을 모친상을 당하여 복을 마치자, 군기시정(軍器侍正)을 거쳐 진주목사(晉州牧使)에 부임했다. 그 고장 서민들은 사람이 죽으면 산기슭에 초빈(草殯)을 하여, 오래도록 매장하지 않는 풍속이 있었다.

 

이성(以性)은 상가의 이웃이나 친척이 힘을 모아, 반드시 매장(埋葬)을 하도록 했고, 딱한 처지이면 관에서 물자와 식량을 주어, 반드시 매장하도록 시켜, 미개한 풍속을 모두 고치게 했다. 1658년(효종 9) 암행어사 민정중(閔鼎重)이 순안군무(巡按軍務)를 겸하여, 임금의 명으로 진주에서 훈련 사열을 하고 나서  군사에게 향연(饗宴)을 베풀고 상벌(賞罰)을 행할새, 병사(兵使)이하가 모두 분주하고, 두려워 했다. 연회가 끝나고, 병사가 어사를 위해 촉석루(矗石樓)에서 크게 놀음놀이를 벌여, 어사의 환심을 얻으려 할새, 이성(以性)이 단연 그것을 제지시켜 막아 버렸다.


이를 듣고 어사가 깊이 감복하여, 조정에 들어가 으뜸으로 보고하여, 포상으로 표리(表裡)한벌이 하사되었다. 그 가을, 다시 부교리로 불렸으나 얼마 아니하여, 파직되어 돌아왔다. 효종이 승하하고(1659) 국장도감낭청(國葬都監娘聽)이 되었으며, 6월에 다시 사간이 되었다가 교리에 제수되었다. 10월에 국장을 마치고, 사건으로 물러왔다가 겨울에 다시 집의에 복직, 교리에 옮겼다.


1660년(현종 1) 봄 강계(江界) 백성이 오래 폭정(暴政)에 시달려, 조신가운데서 중망(重望)이 있는 인물을 부사(府使)로 물색, 그에게 임명되었다. 강계는 관서지방의 웅진(雄鎭)이나, 압록강에 면하여 여진(女眞)  땅에 연접되어 있고, 백성이 드물며, 국내 대표적인 산삼곳이라, 거의 산삼캐는 일로 생업을 삼는 고장이었다. 원근의 장사꾼들이 모여들고, 관가에서도 끼어 들어 이(利)를 탐함이 장사꾼 이상이었으니, 서도(西道)일대의 고위관원들, 및 중앙 각 아문(衙門)에서 포백(布帛)을 실어다 맡기고, 그 값어치의 3배에 해당하는 삼을 요구하는 것이었으며, 수령(守令)이 또한 그러하니, 백성의 부대낌이 극심하여 원성은 온 고을에 들끌었다.

 

그가 부임길에 오르면서, 그 폐단을 여러 대신들에게 알리고, 과감히 바로잡으리라는 결의를 보이매, 정승 이경석(李景奭)만이 그를 칭찬했을 뿐, 대개는 미지근하거나 불쾌하다는 기색들이었다. 그는 부임하자 세삼(細蔘)을 모두 없애고, 서울이며 지방 각 관청의 공안(公案)을 가지고 삼을 구하려는 자는 모두 막아버리매, 백성들이 기쁨과 감격을 마지 못했다.

 

이 해에 관서지방에 가뭄이 심하고, 메뚜기가 온 들판을 뒤덮어 들어가 푸른 잎사귀란 남아나지를 못했다. 그는 밤낮으로 근심하며, 온갖 방법을 짜내어 구호에 성력을 다했다.  어느날 '감영(監營)에서 비장(裨將)이 공문을 가지고 왔다.'는 아전의 보고를 받고, 그는 필시 '삼 때문이리라' 짐작하고, '만일 공무라면 군사편으로  공문을 보내어 전령할텐데, 어찌 비장(裨將)이 공문을 옷소매에 지니고 와서 수령에게 부탁할 것인가.' 하고 받기를 거부했다.

 

그 사람이 매우 노하여 돌아가, 거짓으로 보태어 감사(監司)에게 보고하매, 감사가 감탄하기를 '그사람이 그렇듯 엄정(嚴正)하니, 비록 상사(上司)로서도 어찌할 수 없구나.'하고, 뒷날 서울에 돌아가 '성모(成某) 같은 이는 지금 세상엔 한사람뿐이리라'고 칭찬했다.  마침 만포첨사(滿浦僉使) 한휴(韓休)가 '사병이 삼금(蔘禁)을 범했다.' 고 이성(以性)을 무함하매, 조정에서 의논이 분분할새, 혹 겉으로 돕는체 하면서 도리어 그를 옭으려 들었다.

 

10월에 그를 나포(拿捕)하라는 명이 이르매, 온 고을이 창황하여 울부짖었고, 드디어 의금부(義禁府)로 잡혀가게 되매, 강계부의 백성들이 따라와 어울함을 호소하여 '우리 사또님 같은 은혜로운 다스림은 강계가 생긴 이래 처음이라.'하고, '인삼 2백근을 나라에 바치니 죄를 용서하소서.'라고 빌었다.  이성(以性)이 듣고 놀라,
'그렇게 함은 도리어 나를 불리하게 하는 일이라.'하고 힘써 달래어 막았다.
그때 '조정에서 이미  사건이 알려졌으니, 응당 사실을 조사하는 사신을 보내라.'하고 강계 사람들이 수천금으로 뇌물을 쓸 계책으로 반년동안이나 서울에 지체하다가 마침내 사신이 오지 않음을 알고서야 돌아갔다.

 

평안가마 임의백(任義伯)이 장계 파직될새, 말이 인삼 사건에 미치매, 이성(以性)의 청렴함과 애민(愛民)정신을 들어, '관서 지방에서는 산부처(活佛)라는 칭호가 있으니, 그 사람의 죄없음을 알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마침내 단양(丹陽)에 유배되어 11월에 풀렸다.  1663년(현종 4)) 비로소 서용(敍用)되었으나, 이듬해(1664) 2월 7일 70세로 생애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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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빼어난 의표(儀表)에 단정 장중하여, 아무리 불시에 급한 경우를 당해도 자약(自若)하여 급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일찍  남원에 있을 때, 관아(官衙)안에 귀신의 괴변이 많았다 하나, 그는 조금도 개의함이 없이 밤이면 늘 혼자서 거처하며 태연히 글을 일었다. 그 아버지를 뵈러 제주섬으로 가는 길에 험악한 풍랑을 만나 배가 하마 뒤엎일 듯, 사공도 놀라 소리를 지르며 어쩔줄을 몰라했으나, 그는 편안히 앉아 자세가 여유로우매, 배에 탄 사람들이 안정을 찾게 되었다 한다.

 

벼슬에 있으면서도 교유(交遊)가 적었으며, 더욱 권귀(權貴)에 가까이 하기를 싫어하여, 인평대군(麟平大君)의 여러 차례의 내방(來訪)에 대하여, 단 한번 답례로 찾은 뒤에는 다시 발길을 하지 않았으니, 그 결벽함을 짐작할만하다.  그는 평생토록 번화함을 싫어하여, 기생을 가까이 하지 않았다.  남의 떳떳치 못한 일을 말하지 않았고, 자기의 잘한 일을 나타내는 법이 없었다.

 

벼슬에 있어서는 절용(節用), 애민(愛民), 청렴(淸廉)을 첫째로 삼아 한결같이 법을 준수하여, 누구도 감히 그에게 사사로운 청탁을 못했으며, 관청이 정숙하고, 안과 밖이 엄격히 격리되어 아문의 관속들도 그 자체의 얼굴을 보지 못했고, 술한잔 국 한 그릇이라도 사사로이 쓰지 못했다.  그래서 그 에게는 간혹 엉뚱한 비방이 있기도 했으나 그는 개의 하지 않았다.

 

그는 부임한 고을마다 밝은 다스림으로 칭송이 있어, 담양(潭陽), 창원(昌原), 진주(晉州), 강계(江界) 등 고을에 돌이나 구리에 새긴 송덕비(頌德碑)가 있었다.
그는 평거에는 문을 닫고 조용히 글 읽기를 즐겼으며, 손이 오면 아무리 낮고 미천한 사람이라도 한결같이 후하게 대접했다. 만년에는 가세가 기울어 사는 집이 비바람을 가리우지 못할 지경이었으나 살림에 마음을 쓰지않았다.


토지가 읍 가까이에 있었는데, 친지들이 혹 집자리로, 혹은 묘전(墓田)으로 달라고 하여 다 내주어 버렸다. 향읍에 살면서도 심한 시비사건이 아니면 일체 간여하지 않았고, 중년 이후로는 더욱 관문에 발길을 끊어, 아무리 수령이나 감사(監司)가 내방해도 다만 자제를 보내어 회사(回謝)할 뿐이었다.

 

한 아우가 있었는데, 시냇물을 상거하여 살면서, 화락함이 그지없어 아침에 모이면 저녁까지, 저녁에 모이면 때로는 새벽이 오는 줄을 잊기도 했다. 문장은 간결 담아(淡雅)하여 예사로운 경계가 아니었으나, 그는 문예로 자부하지 않았고 저술도 적은 편이었다. 그는 비범한 자질, 강직한 성품에 맑고 굳센 지조로 하여, 그의 바른 말과 결벽한 처신은 혹 임금께 거슬리고, 상사(上司)의 꺼림을 입어, 그의 진로(進路)는 순탄하지 못했으나, 변방고을로 밀려나 마치고 말았다.

 

1695년(효종 21)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고, 자손에게 쌀과 콩이 하사되었다. 저서<계서일고(溪西逸稿)>에는 그가 지제교(知製敎)로 임금을 대신하여 지은 교서(敎書)·사제문(賜祭文)들이며, 소(疏)·계사(啓辭)·중국 기행문인 연행일기(燕行日記) ·호남암행록(湖南暗行錄) 등에 수록되어 전한다. 하당(荷塘) 권두인(權斗寅)이 행장(行狀)을 짓고, 약산(藥山) 오광운(吳光運)이 갈명(喝銘)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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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당



가평리 계서당 / 문화재청

 

후방(後方)의 숲이 우거진 동산을 배경으로 건물을 남향으로 배치하였다. 솟을대문이 달린 행랑채는 논의 가장자리 평지에 세웠으나 몸채는 뒷동산의 경사진 산록에 올려놓아 우뚝하게 솟아 보이고 앞쪽의 논들을 부감(俯瞰)할 수 있으며, 우측으로 10여미터 떨어져서 일곽의 토담을 두르고 사당을 배치하였다.

안채 부분을 안마당에서 바라보면 정면 3칸 대청(大廳)의 좌우에 안방과 상방이 대칭적으로 놓여져 있고 이 안방과 상방의 뒤쪽에는 각각 반칸크기의 도장방이 자리잡고 있다. 그런데, 대청의 좌측칸 즉 안방 측칸의 뒤쪽에도 안방의 것과 같은 크기의 도장방이 설치되어 있고, 그 앞 마루의 기둥에 걸린 상방(上枋)에는 고미받이를 걸치고 고미혀를 끼웠던 흔적들이 남아 있으며, 기둥의 측면에는 가시새를 설치하여 벽을 쳤던 자국이 남아있다.

 

따라서 이 마루 1칸은 원래는 온돌방으로 안방과 연결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안방 부엌은 마당쪽으로 2칸통(間通)으로 길게 뻗어 중문간(中門間)이 있는 앞채와 직교(直交)하였으며 상방 앞의 부엌은 칸반(間半)을 내밀어 사랑채 부분과는 1m 가량 틈을 두었다. 안대청 상부는 오량가(五樑架)로 제형(梯形) 판대공(板臺工)을 세웠고 기둥은 방주(方柱)에 자연석 주초를 놓았다. 앞채의 중문간은 사랑채와 연접하였고 좌측에는 고방 2칸이 배치되었으며 좌단(左端)의 모방 1칸이 돌출되어 있다. 사랑채 부분은 전면 3칸, 측면 3칸의 9칸집으로 전면 3칸과 우측면 2칸에 ㄴ자형의 마루를 설치하고 기둥 바깥으로 헌함을 돌렸다.

 

마루의 뒤쪽에는 사랑방, 책방, 사랑웃방 등을 배치하여 구색을 갖추었으며 마루의 양측면은 널벽으로 꾸미고 각 칸에 널문을 달았다. 사랑채의 정면은 누다락같이 꾸몄는데 누하(樓下) 방주 사이는 잡석쌓기 위에 토벽을 쳐서 막았고 누상(樓上) 방주(方柱)의 머리에는 주두(柱頭)를 놓았으며 퇴보와 결구된 처마도리 밑에는 둔중(鈍重)한 모양의 첨차를 놓았다. 마루 상부 천장은 합각 밑에만 우물반자를 설치하였다. 이 집의 안채부분은 경북 북부지방 ㅁ자 민가의 고태(古態)를 간직하고 있으며 약간 변형은 되었으나 복원 가능한 상태로서 주택 발달사 연구의 좋은 자료가 될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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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콘 "성춘향과 이도령은 실존인물이었다" 주장의 내용 요지
 

성춘향과 이몽룡. <춘향전>의 두 주인공은 여지껏 이런 이름으로 알려져 왔지만. '이도령(李道令)으로 알려져 왔으나 ‘성도령(成道令)’으로 바꿔 불러야 할 판이다.(춘향의 성은 본디 무었이었는지 정확치 않다).

'이도령의 본래 이름은 성이성(成以性: 1595∼1664), 조선조 광해군 ·인조때의 실존 인물이다. 그는 남원부사로 부임한 아버지를 따라 전라도 남원에 머무르는 동안 기생을 사귀었고 수십년 세월이 흐른 뒤 암행어사가 되어 호남지역을 순행하다가 남원을 찾았다. 성이성은 다시 옛 연인을 만나보려 했지만 사랑하던 그 기생은 죽고 없었다.'

 

한국 최고의 로맨스이자 4대 국문 소설의 하나로 꼽히는 <춘향전>의 탄생비밀이 최근 한 국문학자의 끈질긴 추적 끝에  밝혀졌다. <춘향전의 형성과 계통><춘향전 비교연구>등 굵직굵직한 저서를 내놓으며 지난 30년 동안<춘향전> 연구에 괄목할 성과를 일궈온 설성경 교수에 의해 근 3백년간 끊임없이 되풀이되었던 이른바 '춘향전 신화'의 본디 모습이 드러나게 된 것이다.

 

설 교수는 오랬동안 <춘향전>이야기 '역사적 실체'가 숨어 있을 것으로 가정하고 이를 밝히는데 몰두해 왔다. 그는 최근 자신의 '가정'을 뒷받침할 결정적인 자료를 손에 넣었다. 성이성 본인의 일기 따위를 후손이 편집해낸<계서선생일고(溪西先生逸稿)>와 성이성의 4대손 성 섭(成涉 : 1718∼1788)이 지은 <필원산어(筆苑散語)>가 그것이다. <춘향전>의 두 주인공 성춘향과 이도령의 실존 인물이었다는 그의 주장은 <조선왕조실록> 등 각종 사료는 물론 민간에서 구전된 설화와도 면밀히 대조·분석해 내린 결론이다.

 

'십이월 초하루 아침 어스름길에 길을 나서서 십리가 채 안되어 남원땅이었다.. 성현에서 유숙하고 눈을 부릅뜨고 (원천부내로)들어갔다... 오후에는 눈바람이 크게 일어  지척이 분간되지 않았지만 마침내 광한루에 가까스로 도착했다. 늙은 기녀인 여진(女眞)과 기생을 모두 물리치고 소동과 서리들과 더불어 광한루에 나와 앉았다. 흰눈이 온 들을 덮으니 대숲이 온통 희도다.  거푸 소년 시절 일을 회상하고는 밤이 깊도록 능히 잠을 이루지 못했다'(원문 생략, 고딕체 강조는 편집자)

 

이 구절은 이도령의 실제 인물로 추정되는 성이성 본인의 기록 '호남암행록'(<계서선생일고>에 실려 있음)에 나오는 한 대목이다. 여기에서 설교수가 특히 주목하는 부분은 '늙은 기녀를 만나 이야기를 나눈 뒤 밤잠을 설쳐가며 소년 시절을 회상했다'는 성이성의 진술. 설 교수는 "비록 성이성이 직접 옛 연인(또는 춘향)을 말하지는 않았으나, 앞 뒤 정황으로 보아 틀림없이 옛 연인을 그리워한 대목이라고 판단된다"라고 말한다.

 

설 교수에 따르면, 옛 연인(또는 춘향)은 기생이었음이 분명하고, 그 중에서도 관기(官妓)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즉 옛연인(또는 춘향)이 성이성과 이별한 뒤 연정을 지키려다가 사적인 행동이 용납되지 않는 관기(官妓) 사회의 규제 때문에 억울하게 죽었다는 것이다. 실제인물 성이성의 행적과 <춘향전>주인공 이도령과의 밀접한 관계는 <춘향전>의 '암행어사 출두 장면'에 그대로 유입된 <필원산어>의 한 대목에 의해 더 구체적으로 뒷받침된다. 성 섭은 성이성의 4대손이며, 홍문관 교리·암행어사를 지낸 성기인(成起寅)의 아들이다. 성 섭은 <필원산어>에서 자신의 고조(성이성)가 남원 땅에서 행한 '암행어사 출두사건'을 비교적 상세히 기록해 놓았다.

 

'우리 고조가 암행어사로 호남에 갔을 때 암행하여 한곳에 이르니 호남 열두 읍의 수령들이 크게 잔치를 베풀고 있었다... 한낮에 암행어사가 걸인 모양으로 음식을 청하니 ... 관리들이 말하기를 ‘객이 능히 시를 지을 줄 안다면 이 자리에 종일 있으면서 술과 음식을 마음껏 먹어도 좋겠지만 그렇지 못하면 속히 돌아감만 못하리라’... 곧 한 장의 종이를 청하여 시를 써주었다. ‘독에 아름다운 술은 천 사람의 피요, 소반위의 기름진 안주는 만백성의 기름이라, 촛불 눈물  떨어질 때 백성의 눈물 떨어진다.’쓰기를 마치고 내놓으니. 여러 관리들이 돌려가며 보고는 의아해 할 즈음 서리들이 암행어사를 외치며 달려들어 갔다. 여러 관리들은 일시에 모두 흩어졌다. 당일에 파출시킨 자가 여섯이나 되었다.'

 

<필원산어>에 나오는 이 대목은 <춘향전>의 암행어사 출두장면과 다름이 없다. 특히 성이성이 여러 관리에게 보여준 한시(漢詩) 구절은 <춘향전>에서 '이도령'이 내보인 한시 구절과 정확히 일치한다. 암행어사 출두 장면은 그것이 판소리 계열의 <춘향가>든, 소설계열의 <춘향전>이든 예외없이 실려 있는데, 이 중 한 대목 '술독에 아름다운 술은 천 사람의 피요....' 라는 시구는 성이성이 지은 한시내용 그대로인 것이다.(원문은 '金樽美酒千人血/ 玉盤嘉肴萬姓膏/燭淚落時民淚落/歌聲高處怨聲高'로 되어 있음).

 

이쯤 되면 기왕의 <춘향전>은 형성요소의 절반이 '역사적 사실'에서 출발하고 있다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춘향전>의 실제 모델을 밝히려는 노력이 과거에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춘향전>발생(기원)을 해명하는 차원에서 이 문제가 매우 중요한 연구 주제이기 때문이다. 특히 성이성은 일찌감치 60년대에 '1대 춘향전 연구가' 이자 설성경 교수의 스승이던 나손 김동욱 교수(작고)에 의해, 조선조 말 동시대인으로서 저마다 암행어사로 유명했던 노진·박문수·김우항 등과 함께 '실제 모델'후보로 거론되었던 인물이다.

 

당시 김교수는 성이성 관련 설화에 '춘향이 언급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본격적인 연구에 들어가지는 않았다. 설교수는 '미완의 연구'로 끝난 이 부분에 새로 발굴한 사료와 남원일대에 흩어져 있는 각종 고사와 춘향설화를 있대어 새로운 주장을 내놓은 것이다. 설교수는 이같은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하여 <춘향전>발생 시나리오를 다시 짜맞추고 있다. <춘향전>발생 경로와 관련하여 기존 학계에서는 크게 두 가지 설이 설득력을 얻어 왔다.

하나는 <춘향전>이 무속(특히 무가)에서 발생해 진화했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판소리를 통해 발생·진화 했다는 것이다. 설교수는 이에 대해 다른 견해를 내세운다. 즉, <춘향전>은 성이성 등 실존 인물의 '역사적 사실'을 절반으로 하고 각종 고사·설화 등 '허구'를 절반으로 하여 한 '유능한' 작가의 창작에 의해 최초의 텍스트가 성립된 이후, 각양·각층의 민중 참여(첨삭)를 통해 오늘날의 <춘향전>으로 진화했다는 것이다.

 

2007.08.13

출처 : 저 산길 끝에는 옛님의 숨결
글쓴이 : 선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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