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답사길에 만나는 사람이 살지 않는 고택에서 허허로운 감정과 처연함, 애닯음을 많이 접했을 것이다. 허물어진 담장, 뒤틀린 기왓장, 키만큼 자란 잡초더미에 쌓인 집에서는 우리의 마음마져 무너져내리곤 했었다.
행랑채.솟을대문
고종 15년(1878년) 문신 만산(晩山) 강용(姜鎔)이 건립하였다. 만산 선생은 통정대부. 중추원 의관. 도산서원 원장을 지냈으나, 1905년 이후 망국의 한을 학문으로 달래며 자택 뒷산에 망미대를 쌓고 국운회복의 념을 읊었다고 한다. 만산고택은낙동강 상류 운곡천이 흐르고 있는 의양리 남쪽에 얕은 산을 등지고 동향하였다.
비교적 긴 11칸짜리 행랑채 한 가운데 솟을대문을 지나면 넓은 사랑마당이 펼쳐진다.
서실
칠유헌
해강이 영친왕의 스승이며, 고암 이응로의 스승이 아니냐고 말씀드리자 서예하시는 분이냐고 물으시며 명함을 주셨다. 춘양목으로 지은 별당은 고택체험을 할 수 있으며 숙박비용은 종손에게 감히 여쭐수 없었으며 예약을 하면 종가집 아침도 먹을 수 있다고 한다.(054-672-3206 강백기님)
‘백석산방(白石山房)’과 ‘사물재(四勿齋)’라는 글귀도 있다. 산방이라 함은 선비의 여유로운 거처를 뜻함이요, ‘예(禮)가 아니면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행하지도 말라’라는 사물은 논어에서 따온 말이라고 한다.
만산. 사랑채 당호
백토가 깔린 사랑마당을 안은 세벌대 기단, 5칸 사랑채에는 대원군 글씨로 알려진 당호 '만산' 편액과 ‘정와(靖窩)’, ‘존양재(存養齋))’라고 쓴 편액이 걸려있다. 본래 마당이 백토가 아니라 사랑채를 밝게하기 위해 뿌린듯 하다. 우리 한옥은 마당에서 반사된 빛이 방과 마루에 전달되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기단은 조선후기에는 의미가 퇴색되었지만 권위의 상징도 있지만 자연환경 즉 강우량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만산고택의 기단은 장대석을 놓았음에도 낮은 까닭은 봉화지방이 남부지방에 비해 강수량이 적음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안채 후원(?)과 마당에는 종부의 심성을 보여주듯 들꽃이 가득하다.
안채로 통하는 중문과 후원 쪽문
사랑채에서 안채로 통할 수 있는 마루와 방. 사랑채 좌우에는 중문으로 안채와 구분하였다.
만산고택의 안채는 작은 안마당을 둘러싼 북부 산간지방의 전형인 ㅁ자 구조다. 인기척이 없어 감히 과객이 남녀유별한 안채를 자유롭게 드나들 수 없어 살짝 사진만 찍고 물러나왔지만 , 요즘 흔치 않은 신주단지를 눈에 담지 못하고 나온 것이 후회 막급이다. 2007.08.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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