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상주시

[스크랩] 상주...복룡리 당간지주. 석불좌상

임병기(선과) 2008. 6. 7. 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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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간지주를 찾지 못해 몇번을 주위를 돌았다. 복룡동 당간지주 뿐만 아니라 많은 문화재가 개발과 인간 편의를 도모한다는 미명하에 옹색하게 자리할 날도 멀지 않은 듯하다. 그나마 자리를 지킬수 있는 것으로도 행복 할려나?

 

넓은 들판 한가운데에 남아 있던 당간지주는 지금은 작은 공간 축대위에에 만족하며 서있었다. 뙤약볕에서  보수공사 중인 인부들의 시선이 곱지 않아 오랫만에 만난 옛님과 짧은 인사만 나누어야 했다.

 

위에서 아래로 내려올수록 약간 굵어지고 있으며, 아랫부분은 두툼해져 투박해 보인다. 기둥의 아랫부분에 살짝 금이 가 있고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근처에 있다가 왕산으로 옮긴 비로자나불상과 더불어 통일 신라 시대에 번창했던 이름 모를 절집 당간지주었을 것이다. 


 

상부에는 내부에서 외부로로 둥글게 깎아 다듬어 놓았고, 안쪽면에는 당간을 고정하기 위한 네모난 홈이 보인다.

 

 

지주사이에는 세월의 이끼가 꽃처럼 그려진  커다란 홈을 새긴  받침돌이 보인다.


 

시내 상주경찰서 건너편 얕은 동산이 왕산이다. 지금은 비림만 보이지만 이곳은 상주는 오랜 역사와 전통을 지닌 곳으로 조선 개국(1392년)과 함께 경상감영이 설치된 유서 깊은 장소다. 경상감영은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대구의 중요성이 높아져 1601년 대구로 옮겨갔다.

 

왕산은 "옛적 왕도(王都)일 때 이 산이 비원(秘苑) 중의 독산(獨山)으로 왕의 여행이 많아 이름 지어진 것이 아닌가 한다. 또 다른 이름은 장원봉(壯元峰)이다. 이는 상주에 장원(壯元)이 많이 났었기 때문이다. 조선 국초부터 선조때 까지만도 무려 수십인이였다 하는데 그 장원은 이 산의 정기를 타고 태어났다고 믿었기 때문일 것이다 한 때 이 산아래에 관아(官衙)가 있고 연못 가에는 이향정(二香亭)이라는 정자가 있어 관민(官民)이 연락(宴樂)하는 곳이었고 때로는 목사(牧使)의 후원(後苑) 내당(內堂)으로 쓰이기도 하였다"...상주시청 


 

상주 시민의 공원으로 자리매김한 왕산 입구 비림을 지나 계단을 올라가면  전각속에석불이 모셔져 있다. 석불은 당간지주 근처 복용동에 있었던 것을 1975년 현재 자리로 옮긴 것이다. 하나의 화강암에 조성된 석불은 수인으로 미루어 비로자나불로 추정되며  파손이 심하여 광배와 대좌는 없어졌다.

파손된 머리에는 나발이 남아있고, 양쪽 귀는 길게 늘어져 표현되었다. 코는 파손이 심하고 얼굴에 비해 입술과 같이 작게 새겼다.

 


뒤에서 바라보면 더욱 포근하며 파손된 부분이 보이지 않아 한결 기분이 좋아진다. 왕산에 모셔진 것도 크게 무리는 아니지만 당간지주와 함께 권역을 잡는다면 참 좋을텐데...

 

2007.08.03

출처 : 저 산길 끝에는 옛님의 숨결
글쓴이 : 선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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