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 민가
동학교당은 소유자인 김덕룡(金德龍, 1987. 5. 사망)의 부친인 김주희(金周熙, 1860∼1940, 동학교의 남접부(南接主))가 1915년 이곳에 본거지로 정하고 동학교의 부흥과 포교에 노력하다 1916년 이곳에 교당을 건축하고 전도사를 각 지방에 파견하는 등 교세확장에 힘쓴 본부로서 은척면 우기리는 사방이 산으로 둘러쌓인 넓은 분지의 중앙에 위치한 마을 깊숙히 남향으로 자리잡았다.
교당(敎堂)은 사방(四方)이 산(山)으로 둘러쌓여 작은 분지를 이룬 은척면 우기리는 25개성(個姓)의 100여 호(戶)의 집촌(集村)으로 마을의 중심부에 교당이 있고 주위에 민가(民家)가 배치되어 마을을 형성하고 있다. 교당은 주위의 지형 지세를 동학교적 논리로 해석하여 서쪽 칠봉산(七峰山)과 그 주변 산들에 의해 형성된 산정자형(山丁字型) 산세(山勢)와 마을의 동남(東南)쪽 각(角)에서 합수(合水)하여 동남향으로 흐르는 물 흐름의 정자형(丁字型) 수세(水勢)가 합치된 산정수정(山丁水丁)의 선천형국(先天形局)이 아자형(亞字型) 지세(地勢)의 중앙(中央)에 위치한다.
그들의 「궁을경(弓乙經)」에서 선천(先天)의 원형으로 상징되는 아자(亞字)의 안쪽 백십자(白十字)의 한 가운데에 교당이 위치하여 양(陽)의 극치에 의한 선천회복(先天回復)의 운(運)을 받을 수 있는 곳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교당의 좌향(坐向)은 상량문(上樑文)에 건좌손향(乾坐巽向)은 남동향의 집으로 양택론(陽宅論)에 따른 배치와 유사한 면모를 보인다.
마을길
교당 출입은 당시의 내외 구별의식에 따라 남교도(男敎徒)들은 남재의 대문(大門)을, 여교도(女敎徒)들은 서재 뒷편에 위치한 후문(後門)과 중문(中門)을 통하여 교당으로 출입하였다.
이는 당시까지도 사회전반(社會全般)에 남아 있던 남녀유별이라는 윤리관에 의한 시대적(時代的) 한계로 짐작된다. 또한 교당 주위에 동학교를 상징하는 석류 및 목단나무 등을 주로 심어 교당을 인식적 공간으로 조성하고자 하였다.
마을 담배 건조장 동학교당 남재(행랑채)
남재는 정면 6칸, 측면 칸반의 건물로 주로 부교주(副敎主)와 타지에서 온 남교도(男敎徒)들이 기거하는 곳이었다. 때로는 낮시간에 교도자제들에게 한문 및 교리를 가르치는 교육공간으로 이용하기도 하였다.
동학교당 헛담
사랑마당에서 대문을 통해 본 북재. 헛담이 곱다고 했더니 할머니께서 꽃도 곱다시며 웃었다.
동학교당 북재
헌성공간(獻誠空間)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6칸의 겹집 평면이다. 좌측간(左側間)과 중앙간(中央間)에 전후 각각 2칸통의 부엌과 온돌방을 두었다. 온돌방에 연접해서 좌측간에는 전후 2間의 헌성실(獻誠室)을 두었는데 가운데 4분합미서기문에 의해 향배설립(向拜設立)의 청수상(淸水床)과 1칸과 1칸의 예배실로 구분되어 있다.
따라서 원채는 6칸 온돌 중심형 겹집과 같은 중풍(重豊)계층의 집을 원형으로 하여 변형시킨 평면형이란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원채의 평면구성이 6칸 온돌중심형 겹집임을 상주가 태백산맥과 소백산맥 주변의 겹집계 주문화권(住文化圈) 외곽에 놓여 있다는 것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동학교당 유물 전시관
마을 주차장도 넓으며 유물전시관도 가을이면 개방된다.
헌정실
-.누구를 모시나요? -.천지인 삼재를 모시며 물 세그릇 올립니다.
역시 가을이면 완공된다.
서재는 주로 남녀 교도들이 거쳐하는 집으로 정면 4칸반, 측면 2칸 통간(通間)의 부엌을 두고 그에 접하여 2칸 규모의 여교우실(女敎友室)을 두었는데 방 가운데 흙벽을 치고 외여닫이문을 달아 방(房)을 둘로 구분하였다.여기에 접하여 앞뒤 2間의 온돌바닥의 남교우실(男敎友室)을 두고 가운데 흙벽을 치고 외여닫이문을 닫었다.
동학교당의 어르신이다.
동재는 정면 5칸, 측면 반칸 가운데 교주(敎主) 김주희(金周熙)가 거쳐하던 온돌바닥의 접주실을 두고, 그 북쪽으로 1칸 마루와 래객(來客)을 접빈했던 응접실이 위치한다. 또한 접수실에 접해서 남(南)으로 칸반의 각판실(刻板室)이 있어 방대한 가사(歌辭)를 이곳에서 간행(刊行)하였다.
동학교도들이 거주하고 있다는 사실은 아주 오래전부터 인지했지만, 박해와 탄압으로 남부여대하여 이주해온 부락으로 생각했었다. 하지만 동학교인들이 모여 조성한 취락으로 예전에는 자부심 또한 대단하였다고 한다.
사방 산으로 둘러쌓인 이곳으로 부임한 교사들이 산골 척박한 환경 때문에 울고와서 사람메게 반하고 인정에 젖어 떠나기 아쉬워 울고 떠나셨다며 교당 주인어르신은 말씀하셨다.
현재 교인이 많으냐는 질문에 '세상사 흐름이 어디 그런가요?" 라며 대답을 얼버무리시는 것으로 보아 세력이 많이 줄어든 것으로 보인다. 말씀하시는 어르신의 자제분도 대처에 나가 있어 강요를 할 수 없다고 한다.
현재 한반도 주변환경도 100년 전이나 다를게 뭐가 있나? 우리가 주권국가인가?오히려 더욱 문화적,경제적 침탈은 심해가고, 우리의 정체성은 사라지고 정신적 사고는 피폐하기 그지 없지 않은가?아이러니하지만 오히려 이시대에 우리에게 필요한 사고, 종교가 동학이 아닐까? 문화적열강의 틈바구니 속에서 외세에 맞서 궐기하였던 우리의 종교 동학, 이시대에 다시 돌아보면 어떨까?
많은 것을 느끼고 온 짧은 방문, 어르신과 대화도 머리에서 사라지지 않고 맴돌고,저녁을 먹고 가라시는 어르신과 할머님의 목소리 아직도 귀를 울린다.
중간 일부분, 마지막 부분을 제외하고는 상주시 은척면 홈페이지 글을 옮겨 왔습니다.
2007.08.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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