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상주시

[스크랩] 상주...임란 북천 전적지. 상산관

임병기(선과) 2008. 6. 7. 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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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란북천 전적지

 

상산관 사진 촬영을 위해 들렸는데 나도 모르는 조형물과 건물이 보인다. 예전에도 있었는가? 갑자기 들이닥친 나를 보고 잔디를 깍던 분이 급히 예초기 작동을 중단하고 정중히 인사를 하여 몸둘 바를 모르겠더라. 더구나 "교수님 저위에 가시면 자료가 구비되어 있습니다"라는 말에 고양이 처럼 처신하는대도 내 풍채가 제법 범틀로 비추어지는 듯해 내심 건방진 웃음을 지었다.

 

"1592년(임진왜란) 때 조선 중앙군과 왜병의 선봉주력부대가 최초로 싸운 장소로 900여 명이 순국한 호국성지이다.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일(李鎰)을 순찰사로 임명하여 상주 북방 북천에 진을 치고, 고니시가 이끄는 왜병 1만 7천 여명에 대항하였으나 패하였다.

이곳에는 순국한 9위를 배향하고 있는데 종사관 윤섬, 이경류, 박호 등 중앙군과 판관 권길, 사근도찰방 김종무, 호장 박걸, 의병장 김준신, 김일과 무명용사 1위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1990년부터 정화사업을 실시하여 임란북천전적비를 건립하는 등 역사의 산교육장으로 조성하고 있다. 임란북천전적지는 임진왜란 당시 조선의 중앙군과 향군이 왜군의 주력부대와 회전하여 900여 명이 분연히 순국한 호국의 성지로 1592년 4월 13일 왜군이 부산에 상륙하자 이를 막기 위해 급히 남하하여 4월23일 상주에 도착한 조선의 중앙군 약 60여 명과 상주판관 권길, 호장 박걸이 밤 세워 소집한 장정 800여 명 등 900여 명이 17,000여 명이나 되는 왜병과 분전하여 전원이 순국한 곳이다.

이로 인하여 선조대왕으로부터 상주 전역에 복호(復戶, 조세 부역의 면제)의 은전(恩典)을 입은 전국의 유일한 지방이기도 하다. 매년 양력 6월 4일 제향 행사를 거행하여 그 분들의 넋을 기리고 후세들의 역사의 산 교육장으로 활용되고 있다."...상주시청

 

상산관

 

상주고을의 객사이다. 객사에 대한 설명은 더이상 우리 옛님들에게는 사족에 불과하겠지만 상산관은 규모면에서 다른 지역 객사를 압도 하고 있다.


 

 

좌익랑에서 일단의 어르신들이 내눈치를 슬며시 보길래 모른척 했더니 잠시후 여흥이 벌어졌다. 한 분의 어르신의 기막힌 발장단과 손사위에 넋을 잃고 바라 보았다.

마치 요즘 티비에서 방영되는 중국 조선족 유희 같은 느낌이었다.


 

다른 지역 객사 정랑에서 볼 수 없었던 망궐배 의식을 재현한 모습으로 지자체의 노력에 갈채를 보내지만 읍내 유적만 이래서 뭐하나? 변변찮은 길눈이 문화재 이정표도 구비하지 않은 낙후된 문화재 행정인 것을...

 

망궐배 또는 망궐례는  "지방에 근무하는 관리는 중앙에 있는 관리처럼 직접 왕을 배알할 수 없었기 때문에, 왕과 궁궐의 상징인 궐자(闕字)를 나무에 새긴 패(牌)를 만들어 모시고 예를 올렸다.

대체로 근무지에서 왕과 왕비의 생일, 설, 단오, 한식, 추석, 동지 등 명절날에 왕과 왕비의 만수무강을 빌었다. 지방관으로 임명된 사람이 사정으로 왕에게 하직인사를 못했을 때에는 부임지에서 예를 올렸다.

또 선비들이 과거를 치르고자 서울에 왔다가 낙방하고 돌아가는 길에 서울 경계에서 궁궐을 바라보고 예를 올리거나, 고려와 조선시대 우리나라 왕이 문무관원·종친들과 함께 중국 황제의 생일, 설, 동지 등에 중국 궁궐 쪽을 향해 예를 올리는 것도 망궐례라고 했다. 1896년(건양 1) 대한제국이 세워진 뒤 폐지되었다."


침천정

 

상주사람들은 심청정 명칭에 더 익숙하다고 한다. 상산관 옆 문을 열고 들어가면 정면에 배롱나무와 소나무가 정겹다.

 

"침천정(枕泉亭)은 본디 왕산 밑 동헌의 남쪽에다 목사 정여수(鄭崑壽)가 1577년(선조10)에 건립하고, 연당(蓮塘)에 세웠기에 이름을 연당(蓮塘)이라 하였다. 임란으로 소실되자 1612년(광해4) 목사 韓述이 중건하고, 1614년 목사 康福誠이 천향정(天香亭)으로 개명하였다.

그 후 목사 李恒이 1693년에 연못의 구조(紅白蓮塘)를 고치고 정자 이름을 이향정(二香亭)으로 고쳤으며, 1914년 상주읍성이 헐릴 때 지방민 10여 명이 매입하여 현상주시 만산동 703번지(북천 전적지)로 옮겼고 군수 沈晥鎭이 기문을 써 오늘에 이르고 있다.

본디부터 이 정자는 주로 관료들의 휴식처 내지 유상처로서 한시문의 창작 공간이 되었으며, 상주 출신의 문장기 李 埈, 曺友仁, 李敬儒, 姜世綸 등의 명시도 이 정자에서 창작된 것이 많다. 현재도 양력 10월이면 상주 유림에서 한시 백일장을 이 자리에서 개최하여 끼친 유풍을 이어가고 있다."...다음 검색

2007.08.03

출처 : 저 산길 끝에는 옛님의 숨결
글쓴이 : 선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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