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금강산 답사시 놓칠 수 없는 능이 신라 최초 석씨 왕인 탈해 왕릉이다. 능은 장식이 없는 원형봉토형으로 석탈해 이사금 왕릉 진위여부는 여기서 배제하고자 한다. 답사 공부의 한 쟝르인 풍수지리 공부를 하다보면 통일신라말 도선이 도입했다는 풍수지리 이전에 신라 자생풍수가 민간에 널리 유포되었다는 이론의 근거로 등장한 것이 '호공의 집터' 송사이다. 또한 감은사지 쌍탑이 비보목적의 탑이라 주장한 사람들은 탈해왕이 동악 토함산신으로 모셔진 것도 동일선상에서 해석을 한다.
역사에 대해 일천한 지식 열거는 오도방정이기에 아래글을 옮겨 온다.
글 출처:뿌리 깊은 나무(http://cafe.daum.net/suming56), 문화재청
신라 4대 왕으로서 원래의 칭호는 탈해이사금(脫解尼師今)이다. 성은 석(昔)이며 용성국(龍城國)의 왕과 적녀국(積女國)의 왕녀 사이에 태어난 알이 궤짝에 담겨 표류하다가 BC 19년(박혁거세 39) 아진포(阿珍浦:迎日)에서 한 노파가 발견, 기른 것이 후에 탈해왕이 되었다는 설화가 전한다. 왕비는남해차차웅(南解次次雄;재위4-24년)의 딸 아효(阿孝·阿尼, 또는 남해차차웅의 누이동생 阿老)부인이다.
그러나 어머니는 탈해가 보통 사람이 아님을 알고 공부를 시켜, 학문과 지리에 두루 통달하게 되었다. 당시 이름난 신하인 호공(瓠公)의 집터(뒤에 月城이 됨.)가 좋음을 보고 몰래 숫돌과 숯을 그 집에 묻어놓고는 자기의 집이라 우기니 관가에서는 주장하는 근거를 요구하였다. 이에 자신은 본래 대장장이〔冶匠〕였으니 땅을 파서 조사하자고 하여, 과연 숫돌과 숯이 나오자 탈해가 승소(勝訴)하여 그 집을 차지하였다.
탈해가 왕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남해차차웅의 사위이니 결국 박씨집단(朴氏集團)의 일원이라는 동속개념(同屬槪念)으로 설명되기도 한다. 또, 철을 이용한 군사력 및 거기에 따르는 실질적인 정치실력파의 등장으로 박씨족과 석씨족이 연맹하였으며, 이것은 왕실세력의 폭을 넓혔다고 본다.
8년 남해차차웅(南解次次雄;재위4-24년)의 사위가 되었다.
65년 3월에 왕이 금성 서쪽 시림(始林)이라는 숲속에서 닭 우는 소리를 듣고 새벽에 호공(瓠公)을 보내어 살펴보게 하였다. 호공(瓠公)이 가보니 나뭇가지에 금색의 작은 상자가 걸려 있고, 그 밑에서 흰 닭이 울고 있었다. 호공(瓠公)이 돌아와서 본대로 이야기 했더니, 왕이 사람을 보내어 그 상자를 가져와 열어 보았다. 상자 안에는 작은 사내아이가 들어 있었는데, 무척 귀엽고 잘생긴 모습이었다. 왕은 기뻐하면서, "이는 하늘이 나에게 아들을 준 것이로다." 하면서 아이를 기르게 하였다. 아이는 자라면서 총명하고 생각하는 바가 깊었다. 아이 이름을 알지(閼智)라 짓고, 금색 상자에서 나왔다 하여 성을 김(金)씨라 하였다. 또 시림이란 숲의 이름을 닭이 울었다 하여 계림이라 고치고, 나라 이름도 이때부터 계림(鷄林) 이라 하였다. 그리고 주(州)에 주주(州主), 군(郡)에 군주(郡主) 등의 관직을 새로 만들었다.
75년에 큰 가뭄이 있어 백성들이 굶주리자 국가의 곡식으로 구제하였다. 10월에는 백제가 서쪽 경계에 있는 와산성(蛙山城; 보은)을 빼앗았다.
광무 2년(1898)에 군수 권상문이 신라 제4대 임금인 탈해왕의 제사를 모시기 위해 세웠다. 1906년부터는 신라의 3성 시조 임금(박, 석, 김)을 같이 모셨고 이때부터 ‘숭신전’이라고 불렀다.
숭신전은 본전 3칸·전사청 2칸·상의재 4칸으로 되어 있고,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2007.06.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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