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경주시

[스크랩] 서라벌...탈해왕릉

임병기(선과) 2008. 6. 7. 1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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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강산 답사시 놓칠 수 없는 능이 신라 최초 석씨 왕인 탈해 왕릉이다. 능은 장식이 없는 원형봉토형으로 석탈해 이사금 왕릉 진위여부는 여기서 배제하고자 한다. 답사 공부의 한 쟝르인 풍수지리 공부를 하다보면 통일신라말 도선이 도입했다는 풍수지리 이전에 신라 자생풍수가 민간에 널리 유포되었다는 이론의 근거로 등장한 것이 '호공의 집터' 송사이다. 또한 감은사지 쌍탑이 비보목적의 탑이라 주장한 사람들은 탈해왕이 동악 토함산신으로 모셔진 것도 동일선상에서 해석을 한다.

 

역사에 대해 일천한 지식 열거는 오도방정이기에 아래글을 옮겨 온다.

 

글 출처:뿌리 깊은 나무(http://cafe.daum.net/suming56), 문화재청

 

 

신라 4대 왕으로서 원래의 칭호는 탈해이사금(脫解尼師今)이다. 성은 석(昔)이며 용성국(龍城國)의 왕과 적녀국(積女國)의 왕녀 사이에 태어난 알이 궤짝에 담겨 표류하다가 BC 19년(박혁거세 39) 아진포(阿珍浦:迎日)에서 한 노파가 발견, 기른 것이 후에 탈해왕이 되었다는 설화가 전한다. 왕비는남해차차웅(南解次次雄;재위4-24년)의 딸 아효(阿孝·阿尼, 또는 남해차차웅의 누이동생 阿老)부인이다.

탈해이사금의 설화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탈해의 부왕(父王)이 비(妃)를 맞아 임신 7년 만에 큰 알〔卵〕을 낳자, 왕은 좋지 못한 일이라 하여 버리게 하였다. 이에 보물과 함께 비단에 싸서 궤짝에 넣어 바다에 띄워보냈다. 궤짝에 실린 탈해는 금관가야를 거쳐 계림(鷄林)동쪽 아진포(阿珍浦)에 이르렀다. 이때 한 노파에 의하여 건져지고 길러졌다. 그리하여 고기잡이로써 생업을 하며 양모(養母)를 공양하였다.

 

그러나 어머니는 탈해가 보통 사람이 아님을 알고 공부를 시켜, 학문과 지리에 두루 통달하게 되었다. 당시 이름난 신하인 호공(瓠公)의 집터(뒤에 月城이 됨.)가 좋음을 보고 몰래 숫돌과 숯을 그 집에 묻어놓고는 자기의 집이라 우기니 관가에서는 주장하는 근거를 요구하였다. 이에 자신은 본래 대장장이〔冶匠〕였으니 땅을 파서 조사하자고 하여, 과연 숫돌과 숯이 나오자 탈해가 승소(勝訴)하여 그 집을 차지하였다.

이같은 내용의 설화에서, 첫째 탈해집단이 경주 동해변에 살았다는 것을 알 수 있고, 그것은 그가 죽은 뒤 동악신(東岳神)으로 봉사(奉祠)되었음에서도 확인된다. 둘째는 석씨부족이 어로를 주요생활수단으로 하였지만, 이미 철기문화를 가지고 있었으며, 적어도 철을 다루는 능력이 왕위계승에까지 연결되는 강점의 하나였다고 생각된다.

 

탈해가 왕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남해차차웅의 사위이니 결국 박씨집단(朴氏集團)의 일원이라는 동속개념(同屬槪念)으로 설명되기도 한다. 또, 철을 이용한 군사력 및 거기에 따르는 실질적인 정치실력파의 등장으로 박씨족과 석씨족이 연맹하였으며, 이것은 왕실세력의 폭을 넓혔다고 본다.

 

8년 남해차차웅(南解次次雄;재위4-24년)의 사위가 되었다.

10년 대보(大輔)에 올라 군국정사(軍國政事)를 맡아 보았다.

57년 유리왕(儒理王;재위24-57년)이 죽자 선왕(先王) 유리왕의 유언에 따라 왕위에 올랐다. 그때 나이는 62세였다.

58년 정월에 호공을 대보(大輔)로 삼았다. 2월에 몸소 시조묘에 제사지냈다.

59년 3월에 왕이 토함산에 올라갔는데, 검은 구름이 덮개[蓋]처럼 하여 왕의 머리 위에 떠서 오래 있다가 흩어졌다. 5월에 왜국과 우호관계를 맺고 사신을 교환하였다. 6월에 살별[;혜성의 옛이름]이 천선(天船) [별자리]에 나타났다.

61년 8월에 마한의 장수 맹소(孟召)가 복암성(覆巖城)을 들어 항복해 왔다.
63년 10월에 백제 왕이 땅을 넓혀 낭자곡성(娘子谷城)에 이르러, 사자를 보내 만나기를 청하였으나 왕은 가지 않았다.

64년 8월에 백제가 군사를 보내어 와산성(蛙山城; 지금의 보은)을 치고, 10월에는 구양성((狗壤城; 지금의 옥천)을 치므로, 왕이 기병 3천명을 보내어 이를 물리쳤다. 12월에 지진이 일어났고 눈이 내리지 않았다.

 

65년 3월에 왕이 금성 서쪽 시림(始林)이라는 숲속에서 닭 우는 소리를 듣고 새벽에 호공(瓠公)을 보내어 살펴보게 하였다. 호공(瓠公)이 가보니 나뭇가지에 금색의 작은 상자가 걸려 있고, 그 밑에서 흰 닭이 울고 있었다. 호공(瓠公)이 돌아와서 본대로 이야기 했더니, 왕이 사람을 보내어 그 상자를 가져와 열어 보았다. 상자 안에는 작은 사내아이가 들어 있었는데, 무척 귀엽고 잘생긴 모습이었다. 왕은 기뻐하면서, "이는 하늘이 나에게 아들을 준 것이로다." 하면서 아이를 기르게 하였다. 아이는 자라면서 총명하고 생각하는 바가 깊었다. 아이 이름을 알지(閼智)라 짓고, 금색 상자에서 나왔다 하여 성을 김(金)씨라 하였다. 또 시림이란 숲의 이름을 닭이 울었다 하여 계림이라 고치고, 나라 이름도 이때부터 계림(鷄林) 이라 하였다. 그리고 주(州)에 주주(州主), 군(郡)에 군주(郡主) 등의 관직을 새로 만들었다.

66년에 백제가 와산성((蛙山城; 보은)을 침략하고 2백명의 병사를 두어 지키게 하였지만, 얼마 뒤 왕이 이를 쳐서 도로 빼앗았다.
67년 정월에 박씨의 귀척(貴戚)으로써 나라 안의 주·군(州郡)을 나누어 다스리게 했는데, 이름을 주주(州主)·군주(郡主)라 하였다. 2월에 순정(順貞)을 이벌찬으로 삼아 정치의 일을 맡겼다.

70년 백제가 침입해왔다.

73년 왜인이 목출도(木出島)에 침입하였다. 왕이 각간(角干) 우오(羽烏)를 보내 그들을 방어하게 했으나 이기지 못하고 우오는 전사하였다.

74년 8월에 백제가 변경을 노략질하였으므로 군사를 보내 그들을 막았다.

 

75년에 큰 가뭄이 있어 백성들이 굶주리자 국가의 곡식으로 구제하였다. 10월에는 백제가 서쪽 경계에 있는 와산성(蛙山城; 보은)을 빼앗았다.

76년 9월에 군사를 보내 백제를 정벌하여 와산성을 다시 빼앗고, 백제로부터 와서 살던 사람 2백여 명을 모두 죽였다.

77년 아찬(阿飡;6등급) 길문(吉門)이 가야군(伽倻軍)과 황산진(黃山津 현재의 양산) 어구에서 싸워 1천여 명을 목베었으므로 길문을 파진찬(;4등급)으로 삼아 공로를 포상하였다.

79년 2월에 살별[彗星]이 동쪽에 나타났고, 또 북쪽에도 나타났다가 20일만에 없어졌다.

80년 우시산국(于尸山國)˙거칠산국(居漆山國)을 멸하였다. 4월에 신라 서울에 큰 바람이 일고 금성 동문이 저절로 무너졌다. 8월에 왕이 세상을 떠나 성 북쪽에 있는 양정(壤井;경주 북쪽) 언덕에 장사하였다. 그 뒤를 이어 3대 유리왕(儒理王;재위24-57년)의 둘째 아들이 파사이사금이 되었다.



숭신전 / 문화재청

 

광무 2년(1898)에 군수 권상문이 신라 제4대 임금인 탈해왕의 제사를 모시기 위해 세웠다. 1906년부터는 신라의 3성 시조 임금(박, 석, 김)을 같이 모셨고 이때부터 ‘숭신전’이라고 불렀다.

처음 지을 때 월성 안에 있던 것을 1980년 월성 안의 민가 철거와 함께 지금 있는 자리로 옮겼으며 봄·가을과 춘분·추분에 걸쳐 제사를 지내고 있다.

 

숭신전은 본전 3칸·전사청 2칸·상의재 4칸으로 되어 있고,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석탈해왕 탄강유허 / 문화재청


신라 제4대 탈해왕(재위 AD 57∼80)이 탄생한 곳이다. 태어난 곳은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르면 ‘계림동 하서지촌 아진포’라 되어있는데, 조선 헌종 11년(1845) 그곳에 하마비와 땅을 하사하여 석씨 문중에서 유허비와 비각을 건립하였다.


2007.06.30

출처 : 저 산길 끝에는 옛님의 숨결
글쓴이 : 선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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