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경주시

[스크랩] 서라벌...굴불사 사면불

임병기(선과) 2008. 6. 7. 1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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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강에 위치한 동천동 마애삼존불 답사를 위해서는 거쳐야 하는 굴불사 사방불, 백율사는 답사 동호인들 뿐만 아니라 일반인 들에게도 널리 알려져 있어 부담이지만 훗날 참고자료로 활용하기를 바라며 글을 올리겠다.

 

굴불사는 "삼국유사에는 '경덕왕이 백률사 나드리 길에  땅속에서 염불하는 소리가 들려 그곳을 파보라고 명령하여 큰 돌을 얻었는데,사방불이 새겨져 있어,여기에 절을 세워 굴불사라 불렀다"고 한다.

 

신라인들은 동서남북에 부처님을 모시고 숭배했으며, 사방불신앙은 시방세계에 부처님이 계셔 중생들을 구제한다는 신라인의 불국토사상을 표현한 것으로 남산 칠불암,  굴불사지, 안강 금용사지, 동천동 탑신석에 새겨진 사방불 등이 대표 적이다.

 

 

사면에 불상을 새기는 것은 사방정토를 상징하는 것으로 대승불교의 발달과 더불어 성행한 사방불 신앙의 한 형태였다. 또한 일부에서는 신인종의 교조 명랑법사에 도입되었다는 설도 있다. 사방불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지만, 신라의 사방불은 대체로 서방에 아미타불과 동방에 약사여래 남쪽에 석가모니불, 북쪽에 미륵불을 모신며 굴불사 사면불도 이와 같은 배치에 충실하다.

 

 

동면에는 약합을 든 약사여래불이 결가부좌하고 있다. 얼굴을 숙인 듯한 모습은 참배객의 눈높이를 고려한 것일까? 두광 신광에는 두겹 동심원이 보이고 불꽃무늬(?)가 음각된 듯하다.

 

다른 면에는 주불과 협시불을 모셨는데 동면은 처음부터 단독불을 모셨을까? 공간도 넉넉하지는 않아도 충분하지 않은가? 혹 남면 처럼 일광.월광협시 보살을 어느누군가가 떼간 것은 아닐까?


 

서방 아미타 삼존불이다.. 본존불은 바위를 몸으로 삼고 불두는 별도 조성하여 올려 놓았고, 협시보살은 별석으로 세웠다. 본존은 소발에 삼도가 보이고 어깨는 넓으며  통견의 법의는 얕게 묘사되었다.

 

화불이 있는 보관을 쓴 좌협시보살은 관음보살로 몸에 밀착한 얇은 잠옷을 입은 S라인의 풍만한 여인네 같다면 불경스러운 표현인가? 오른손에 정병을 들고 있는 우협시보살은 훼손이 심하지만 아미타의 협시로 관음과 쌍벽을 이루는 미모를 가진 대세지 보살로 알려져 있다.

 

모르긴해도 삼국시대부터 묘사된 삼굴자세의 정점에 서있는 협시보살이 아닐까?


 

남면 석가모니 삼존불이다. 주불.협시불이 고부조이며 희미하지만 주형거신광배의 신라 전성기 불상이다. 사진을 자세히 살펴보면 본존의 불두의 흔적이 보이며 우협시불 자리도 석연치 않은 자국이 보이지 않은가?

 

60년대에 간송선생 일행에 의해 처음으로 누군가에 의해 기술적으로 떼어간 것으로 알려졌다. 그후 한일회담 문화재 대표로 도일한 황수영 박사는 불두와 협시불을 떼어간 직후의 사진을 교토대학에서 발견하고 경악하였다고 한다.

 

1910년대에 일본인에 의해서 굴불사사는 조사되었으며, 사진 원판은 1915년 경이라하니 누구의 소행인지 분명하지 않은가? 순교한 이차돈 목에서 품어 나왔던 흰피 못지않게 붉은 피를 뿌리며 잘렸을 불두와 협시불은 과연 일본 어디에서 망국의 한을 품고 계실까?

 

미국하원에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위안부 강제동원과 관련 일본 정부에 공식적이고 분명한 시인 및 사과을 요구하는 결의문이 채택되었다고 하는데 우리 정부는 언제쯤 탈취 문화재 환수 운동에 매진할 수 있을지......



북면 미륵상은 높은 돋을새김이나 왼쪽은 마멸이 심해 육안으로는 구분이 어려우나 십일면 육비의 관음보살이 음각되어 있다고 한다.

 

신라 경덕왕 재위 기간은 신라 불교문화의 최고 전성기로 알려져 있어, 굴불사 사방불도 매우 귀중한 보물인 것이다. 우리의 조상인 신라사람에게 한없는 사랑을 받았겠지만 근세 서글픈 역사의 피해자가 된 사방불은 다시 땅속으로 들어가 염불소리내며 지내고 싶지는 않을까?

 

2007.06.30

출처 : 저 산길 끝에는 옛님의 숨결
글쓴이 : 선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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