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는 통일신라시대 이후 지방통치의 중심지였다. 따라서 읍성 축성은 당연했고 흔적이 남아 있지만 찬란한 신라의 유물로 인해 읍성은 크게 주목 받지 못하고 있다.읍성은 『동경통지』에 고려 우왕 4년(1378) 다시 지었다는 기록이 있어 처음 이 성이 만들어진 것은 그 이전의 일이라고 짐작할 뿐이다.
"조선시대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둘레 4,075척(약 1,222m), 높이 12척(약 3.6m)이며, 우물이 80여개 있다고 되어 있으나 지금은 도시계획으로 시가지가 확장됨에 따라 대부분 헐리고 황성공원으로 가는 큰길 좌측의 민가 뒤에 동쪽 성벽 약 40~50m 가량만 남아 있다."...다음
"지금의 읍성은 조선 전기에 다시 짓고, 임진왜란(1592) 때 불에 탄 것을 조선 인조 10년(1632)에 동·서·북문을 만들면서 다시 지었다고 한다. 규모에 대해서는 조선시대에 둘레가 약 1.2㎞, 높이가 약 4m 정도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후 1746년(영조 22)에 확장되었는데 당시 둘레가 약 2,300m였던 것으로 전한다. 성문으로는 동쪽에 향일문, 서쪽에 망미문, 남쪽에 징례문, 북쪽에 공신문 등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흔적을 찾을 수 없고, 다만 현재 집경전 뒤쪽의 석축 구조물을 고려시대의 북문지로 추정할 뿐이다. 석재는 대개 가로 40~50㎝, 세로 20~30㎝의 잘 다듬은 돌로 정연하게 쌓은 편이다."...다음
현재는 성벽과 치가 복원되어 있으며 동부동.서부동.북부동 등의 지명이 성곽을 떠올리게 할 분이다. 현재는 주거단지와 기타 건물로 인해 성곽 밖의 해자를 찾을 수 없으나 1996년 학교 이전으로 발굴조사를 하였으며 그 결과 감옥터, 해자 그리고 많은 유물이 발굴되었다고 한다.
"조선시대 감옥은 어떻게 생겼을까? 지금까지 이런 궁금증은 조선시대에 제작된 일부 그림 지도에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를 엿볼 수 있는 매우 구체적인 자료가 출현했다. 경주시 서부동 경주읍성(慶州邑城. 사적 제96호)에 있던 조선시대 감옥 터가 발굴됐기 때문이다. 이곳 출토 유물 중에는 담장 기단에서 출현한 사각 기둥 모양 돌 하나가 비상한관심을 끌고 있다. 여기에서 '天王寺小標 日文太任ㆍㆍㆍ至北五ㆍㆍㆍ'라는 명문이확인됐기 때문이다.
읍성보다 먼저 태어나 신라인과 함께 동고동락했던 탑,불상,절터의 부재들이다. 숱한 전화로 형체만 건졌지만 임진왜란 때는 이장손이 제조한 화포 비격진천뢰로 왜군을 격퇴한 현장을 지키기도 했었다. 널부르진 잔해가 내리는 비때문인지 더욱 처연한 기운이 감돌아 답사객도 말없이 비에 젖어들 뿐이다.
읍성 노거수가 비오는 서라벌 골몰길 답사객의 소회를 표현한 그림같다. 경주박물관 성덕대왕 신종이 읍성 남문인 징례문에 걸려 서라벌의 아침을 깨우고 잠들 시각을 알려주었던 그시절로 돌아갈 수는 없을까?
징례문 만이라도 복원하여 모조품 성덕대왕신종을 걸면 신라문화로만 알려진 서라벌에 조선의 향기도 잔잔한 파문이 일어날텐데...
2007.05.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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