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안성시

[스크랩] 안성... 봉업사지

임병기(선과) 2008. 6. 6. 1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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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몹시 추운 정월달 봉업사지에 왔었었다. 봉업사지는 꼭 추운날에만 나와 인연을 짓는 모양이다. 죽주산성 부근 미륵당 석불 근처 석불입상에서 바라본 봉업사지. 멀리 오층탑이 보인다. 봉업사지와 이자리를 두개의 사찰로 구분하는 설도 있지만 그건 학자들의 몫이다.


 

 봉업사는 청건과 폐사가 명확하게 알려지지 않았지만‘매곡리 폐사지’라 불리기도 했으나 1966년 경지정리작업시 출토된 유물에서 이곳이 봉업사였음을 말해주는 명문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봉업사 명문의 발견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말하는‘고려 태조의 진영을 모셨던  비봉산 아래의 봉업사’가 바로 이곳임을 밝혀주는 것이다.  태조의 진영을 모셨다는 것으로 봉업사의 사격을 이해할 수 있다.

 

왕실에서 후원과 절대적인 지원이 없으면 태조의 진영을 모시고 명복과 왕실의 안위와 영원한 번영을 기원할 수 없었을 일이다. 이로미루어 봉업사는 개태사, 관촉사와 더불어 고려조에는 사세가 지대했으라라 판단되며 조선시대 이후 폐사되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

 

당간지주와 석탑간의 거리가 짧아 당간지주가 아니면 석탑이 본래 위치가 아닐 듯하다. 자료에 의하면 석탑에서 유물이 발견되었고 당간지주가 넘어져 있었다고 하니 당간지주를 이건해왔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특별한 문양없이 둔중한 느낌의 지주는 동서로 마주 보고 있으며 윗부분 안쪽에 구멍을 뚫어 간을 장치한 흔적이 있다. 기단, 간공도 멸실되어 이건 가능성을 더욱 짙게한다.

 

 

지대석 1기단, 4개의 기단 갑석은 두꺼워 무겁운 느낌이다. 1층 몸돌은 크며  2층 이상 몸돌 체감은 일정하다. 몸돌 한면에는 감실이 표현되어 있다. 

옥개받침은 받침은 각층 다섯이고 얇은 추녀가 전각에 이르기까지 수평을 이루었다. 낙수면은 완만한 고, 모서리의 반전도 희미하다.  상륜부는 멸실되었다. 고려초 봉업사지 창건시 조성으로 보이며 이후 고려탑에서 이런 느낌의 탑은 드물게 보인다.

 


 

매산리 삼층탑을 답사하기위해 농로를 따라 승용차로 이동중 농로에서 갇히기도 했다. 석불입상 앞에 위치한 석탑은 단층기단이며, 갑석에는 복련이 보인다. 1층 옥신에 비해 2층 이상의 체감이 급격하다.

몇가지 특징이 봉업사지 탑과 일치하지만 크기나 략화된 모습으로 동시대 탑이 아닐 것으로 판단된다. 


 

길상사라는 작은 암자에서 관리하는 듯 하다. 다른 곳에서 옮겨왔다고 전해지며 주위에 석탑부재와 석불 대좌 하대석도 보인다.


 

원형  겹복련 대좌에 서있는 석부릉 풍만한 얼굴이지만 기자신앙의 상흔은 예외없이 보인다. 작은 입매가 단정한 인상을 주며 소발에 큰 육계와 긴 귀가 특징적이다.

고려초기 불상처럼 얼굴에 비해 어깨는 왜소한 편이다. 통인의 수인이다. 통인이 석가모니불의 수인이지만 입석불에서는 아미타불에서도 많이 나타나지 않았던가? 경주박물관을 다시 다녀와야겠다. 

통견의 법의는 어깨에서부터 배 부근까지 일정한 간격의 평행주름을 이루며 흐르는데 양다리에서 각기 동신타원형을 형성하고 있다. 무릎 동신 타원형은 신라하대에 자주 보이는 양식으로 전국에서 관찰이 가능하다. 

길상사에서 계시는 보살님들이 쉬었다가 가라고 하셨지만 오늘의 동선을 고려하여 죽주산성도 건너 뛰고 이천으로 향했다.

 

2007.03.13

출처 : 저 산길 끝에는 옛님의 숨결
글쓴이 : 선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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