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남도/공주시

[스크랩] 공주...신원사, 중악단

임병기(선과) 2008. 6. 6. 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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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왕문

 

공주시 계룡면 양화리 신원사는 백제 의자왕 12년(652년)에 열반종의 개종조인 보덕(普德)선사가 창건하여  중수와 중건을 거치다가 조선 고종 13년(1876년)에 보련화상이 중건하면서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고종 16년(1879년)에는 신원사 동쪽에 중악단을 조영하였으며, 고종 22년(1885년)에는 관찰사 심상훈이 중수하면서 ‘신원사(新元寺)’라는 현판을 걸게 됨으로서 현재의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신원사(新元寺)는 신원사(新院寺) 또는 신정사(神正寺)라는 이름으로 불렸으며, 주로 신원사(新院寺)라는 이름으로 불렸는데, 귀신의 집이라는 의미를 지닌 것이라고 한다. 이로써 신원사가 계룡산신과 깊은 관련을 지닌 사찰임을 알 수 있다.

 

사하촌이 온전하리라는 기대와 달리 이곳 역시 시골 순박한 아줌마 얼굴에 화장을 덧칠한 모습이다. 사찰에서 처음 얼굴을 마주하는 천왕문도 물건을 구입하면 손해볼 것 같은 가게 주인장의 모습이라면 건방의 극치인가?


대웅전

 

겉모습이야 그러했지만 기단이 눈을 사로잡는 대웅전. 봄눈 녹듯이 사르르 얽힌 심사가 녹아내린다. 기단에 꽃이라도 만발하고, 우측 정원에 배롱나무꽃 만개한다면 벽면 십우도는 필요할까나? 충청지방의 특색인지 처마선 곡선 처짐이 영남지방보다 깊어 보이는 대웅전은 겹처마 팔작 지붕이다.

 

또한 대웅전은 정,측면 3칸* 3칸의 다포식이며 어칸에 사분합 빗살문을, 협칸에 사분합 띠살문을 달았고 문위에는 우물 정(井)자 창을 내었다.

 

삼존불

 

어라? 분명 삼존불을 뵈었는데..., 한분 보살님은 사진 촬영이 부담스러워 기둥뒤로 숨었는가 보다.

기억이 정확하다면 대웅전 현판과 달리 아미타불을 주존으로 대세지 관음보살을 뵌 듯한데 숨박꼭질하시는 보살님은 관음보살?



 영원전

 

공부는 배워도 배워도 끝없다는 사실을 깨닫게한 영원전. 대웅전에서 바라본 영원전이 사람을 끌어 당기지 않나요? 저렇게 나를 부르는 전각에는 어느님이 좌정하고 계실까?

 

달려갔더니 어렵소? 지장보살 무독귀대왕 도명존자 시왕이 시립해있는 명부전이다. 지장전.명부전. 시왕전. 영원전(靈源殿)이 지장보살을 주존인 전각이라고 희미하게 알고 있었지만 눈으로는 처음 보았다. 영혼을 근원으로 돌아가도록 기원하는 전각이라는 의미일테고....

 

중악단 솟을삼문

 

신원사는 크게 대웅전 영역과 중악단 영역으로 대별된다. 대가집을 방불케하는 솟을대문 멀리 중문과 중악단이 보인다. 대문간채, 중문간채, 중악단을 일직선상에 대칭으로 배치하였다.

 

중악단은 신라시대로 부터 산신제를 올리던 제의 공간이었다고 한다. 즉 신라오악은 북 태백산, 남,지리산, 동 토함산, 서 계룡산, 중 팔공산을 말한다.

 

홍살문

 

신성공간임을 상징하는 홍살문이다.


 

사찰 금강문을 수호하는 금강역사처럼 좌우에는 솟을문과 중문에 네분의 신장상이 시립하여 사악한 무리를 검문하고 있다.


 

어떤 자료에는 변형된 사천왕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중악단 배치가 유교.불교, 궁궐 전각이 혼합된 사례로 판단  때문인 것 같다.

 

중악단

 

무학대사의 꿈에 산신이 나타났다는 말을 듣고 태조 3년(1394)에 처음 제사를 지냈다고 전하며, 효종 2년(1651)에 제단이 폐지되었다.

 

그 후 고종 16년(1879)에 명성황후의 명으로 다시 짓고 중악단이라 하였다. 중악단의 현판은 조선 후기 문신 이중하(1846~1917)가 쓴 것이라고 한다.

 

높은 돌기단 위에 3칸* 3칸 규모에 팔작지붕이고  다포 양식인데,  화려하고 위엄있게 하였다. 중앙에 보이는 길은 신도(神道)로 신이 다니는 길이다. 그럼 제를 주관하는 고승과 고위관료는 어느길로 출입했을까? 

 

중악단 담장

 

중악단을 어우르는 담장. 화려한 암키와 단장은  장식성과 장엄성과 더불어 수(壽)·복(福)·강(康)·녕(寧)·길(吉)·희(喜)를 새겨 황실의 복과 번영을 기원했다.


추녀마루 잡상

 

지붕 위에는 잡상을 모셔 주야장장 잡귀의 침입을 경계하고 있다. 잡상은 궁궐과 부속 건물, 도성 문루에만 배치하는 유형으로 중악단도 왕실 지원하에 조성되었음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산신

 

무심코 문을 열었더니 한 여인이 소리내어 울고 있었다. 산신전에 울고 있던 그녀는 무녀인가?

 

내부에는 계룡산신의 신위와 영정을 모셔 두었다. 조선 태조 때는 지리산 상악단, 묘향산 하악단과 더불어 산신을 모셨으나 현재에는 계룡산 중악단에서만 자취를 찾을 수 있다.

 

오층탑

 

중악단에서 절밖으로 나오면 보이는 오층탑은  현재 4층 옥개석까지만 남아 있다. 지대석을 4매로 구성하여 상하기단을 쌓았다.지붕돌 층급은 3단으로 전형에서 약화된 모습이며 반전은 미미하다. 

 

1975년 12월에 해체∙복원공사를 실시하였는데 해체 당시 1층 탑신의 사리공에서 외호(外壺)와 내호(內壺)로 구성된 사리구를 비롯하여 개원통보, 함원통보, 황송통보, 손잡이와 주둥이가 결실된 자기 주전자와 녹색 유리제의 목이 긴 병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하기단에는 두 개의 안상을 새겼으며, 상기단에는 양우주와 한 개 탱주가 모각되어 있다.



중악단과 오층탑

 

"역사상 최고의 여걸인 명성황후는 다 스러져가는 조선왕조의 운명을 신앙의 힘으로 극복하려 하였다. 제국주의 열강들이 한반도를 둘러싸고 각축을 벌이는 와중에서, 그녀는 특히 고유의 산신들에게 의탁해 외세를 물리치려는 정성을 보였다.

 

이를 두고 명성황후를 마치 무당의 대장쯤으로 격하시키는 것은 역사의식이 없는 이들의 잘못이다. 신원사 중악단은 건축적 개성도 뛰어나지만, 이 나라 왕비의 애절한 염원이 스며있는 기념물이기도 하다"...김봉렬 교수(눈첩처마 방 124번 참조)

 

2007.03.11

출처 : 저 산길 끝에는 옛님의 숨결
글쓴이 : 선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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