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남도/공주시

[스크랩] 공주...우금치 전적비

임병기(선과) 2008. 6. 6. 1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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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금치는 1894년 동학농민군이 관군과 일본군의 연합군을 상대로 최후의 격전을 벌인 곳이다. 공주에서 부여로 넘어가는 견준산 기슭의 높은 고개로 우금고개, 우금재 또는 비우금 고개라고도 부른다.

1894년 9월, 전봉준이 이끄는 동학농민군은 일본군의 경복궁 침범과 경제적 약탈을 규탄하며 반봉건·반외세의 기치를 내걸고 재봉기를 했다. 당시의 공주는 충청도 감영이 소재하는 중부지역의 거점으로서 전략상 공주를 확보하는 것은 향후 전쟁의 승패를 가름하는 중요한 관건이 되었다. 또 우금치는 공주의 치소에서 부여 방면으로 넘어가는 높은 고개이며, 일단 우금치를 장악하면 공주 점령의 기선을 잡을 수 있는 중요한 곳이다.

공주를 중심으로 향후 전쟁을 이끌어 나가려던 동학농민군은 죽검으로 총에 맞서 싸우다 결국 거의 전멸하게 되었다. 이날 우금치 전투에 대해 전봉준은 "1만 명이었던 군병을 점고하니 남은 자는 3천 명을 넘지 않았고, 다시 접전한 후 점고하니 5백 명을 넘지 않았다." 하여 장렬한 싸움이었음을 회상하였다 한다. 우금치 싸움 후, 재기를 노리던 전봉준이 체포되어 이듬해 3월 처형됨으로써 1년 동안 전개된 동학농민운동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엠파스 검색

 

 

동학군의 넋을 달래기 위해 1973년 동학혁명군 위령탑 건립위원회에서 이 고개에 동학혁명군 전적비를 세웠으며, 동학농민운동 100년이 지난 1994년에 국가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우금치는 동학농민군이 반봉건·반외세 기치를 걸고 마지막 항전을 이루었던 장소로, 한국 근대사의 한 고비를 이루는 뜻깊은 장소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탑은 군사정권이 구데타를 미화하며 농민군의 혁명전통을 있는 것으로 세웠다고 전해진다.

 

100년이 더지난 그 자리에는 FTA반대 프랭카드가 난무하고 있다.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벗어나지 못함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다. 약소국가 국민 그중에서도 농민이 최대 피해자이지만 산업사회 무역구조상 마땅한 대안이 없는 것이 더 서글프다.

 

 

동행했던 님의 설명으로는 일제가 지맥을 단절하기 위해 도로를 개통하여, 이렇게 터널로 원상복구했다고 한다.


2007.03.11

출처 : 저 산길 끝에는 옛님의 숨결
글쓴이 : 선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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