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북도/영동군

[스크랩] 영동...신항리 상여

임병기(선과) 2008. 6. 6. 1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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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 그리고 죽음. 우리는 너무도 당연한 귀결에 익숙치 않다. 살아가는 것은 죽어가는 것 아닌가? 순서가 없다지만 인간은 결국 죽어갈 뿐이다. 죽음은 망자 개인과 맺었던 많은 사람들과 관계의 단절이기에 개인의 죽음도 사회성을 벗어나지 않는다.

 

고대에서는 방치했던 시신을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다양한 장례법으로 망자 사후세계를 도모하게 되어 살아 생전에 생필품은 물론 가축과 노비를 순장하는 비인간적인 풍습이 있기도 했다. 우리나라도 주자가례가 도입되어 절차를 중시했지만 그이전에는 지역 종교에 따라 다양한 장례 풍습이 있었다.

 

오늘까지도 전해오는 진도의 다시래기 뿐만아니라 경북 안동 빈상여 놀이는 슬픔의 장을 축제의 장으로 승화시키는 독특한 놀이 마당이었다. 이승에서의 죽음은 저승에서 탄생이기에 장례식은 죽음을 슬프하는 가족의 행사 보다는 농경사회의 단합과 놀이문화였던 것이다.

 

웃음을 보이면 불효자로 매도되고 '밤새 울고도 누가 죽은지 모른다'는 서글픈 속담을 낳은 억지 울음을 강요하기 위해서 울음 집단을 동원했던 조선시대의 장례문화는 우리 전통이 아니다.

이제는 사회가 변하여 서양식 장례에 익숙해졌지만 가족과 친척 사회구성요원이 동참하여 꽃상여를 매고 북망산천으로 향하던 마을의 축제였던 장례문화는 화석으로만 남게 되었다.

 

죽음을 주역에서는 음과양 즉 죽음에서 탄생이 오고 생에서 사로가는 관계로 보았다. 기독교에서는 요단강 건너가 저승이며, 불교에서는 반야용선을 타고 건너는 삼도천 너머가 저승 피안의 세계이다.

마찬가지로 민속에서의 칠성신앙, 망자가 가는 북망산천도 오행에서 북은 수(水)이기에 생과사의 경계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강(물)으로 보았다. 어느학자는 그것을 모체회귀 즉 어머니 자궁으로 회귀로 설명한다. 양수가 터짐으로 생을 시작하여 다시 사의 세계 물로 돌아간다는 해석이다.

 

"상여는 마을마다 공동기금으로 마련하고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상여집(곳집)에 보관했다가 필요할 때마다 썼다. 상여가 낡으면 다시 기금을 모아 장만했다. 상여를 메는 사람은 상여꾼·상두꾼·향도꾼이라 하여 주로 마을공동 품앗이로 이루어진다. 상여꾼의 유래에 대해서는 전통시대의 신앙공동체였던 향도(香徒)조직이 조선시대에 들어와 향촌공동체의 기능으로 분화되면서 두레는 공동노동을 담당하고 향도는 상장(喪葬)의 일만을 담당하여 향도조직원들이 상여꾼으로 변한 것으로 본다.
 
상여의 모양은 가마와 비슷하나 더 길고 몸채 좌우에 밀채가 있어 그 양쪽에 채막대를 가로로 대고 앞채막대 좌우로 2줄씩 끈을 달아 뒤채막대에 붙잡아맨 다음, 중간에 일정한 간격을 두어 멜빵을 좌우로 끼고 사람들이 그 사이에 들어가 어깨로 메도록 되어 있다. 몸채는 단청으로 채색을 하고 네 귀에는 포장을 쳐 햇볕을 가리며 상여 뚜껑은 연꽃이나 봉황새로 장식했다.
 
상여 중 꽃상여는 채색된 꽃을 달아서 장식하며 일단 산역(山役)이 끝나면 장식들은 태워버린다. 상여꾼들은 걸음을 멈추고 죽은 사람의 넋을 위로하기 위하여 〈상여소리〉를 불렀는데, 상여가 나가기 전날 밤 빈 상여를 메고 풍악과 노래를 하는 상여놀이 풍습도 있었다. 이는 슬픔에 잠긴 상주를 위로하고 현세에서 이루지 못한 행복을 저승에서 이루라는 위로의 놀이였다."...다음 백과사전

 

 

상여에 장식된 용 봉황등 상상의 동물과 연꽃은 죽은 이를 아무 탈없이 저승까지 인도하는 역활과 상징성이며 저승에서 새로운 삶을 마련해줄 수는 구실이다. 의미가 퇴색되었지만 망자와 함께 묻는 노잣돈도 저승에서 자리잡기 위한 경비로 우리 선인들의 내세관의 단면을 엿 볼수 있는 민속이다.

 

신항리 상여는 1909년 고종 황제가 6촌형인 이용직(초명은 이용강) 대감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하여 하사했다고 전해져 오고 있는 왕가의 상여이며, 예산 수덕사에서 해미읍성으로 가는 길에 만나는 남은들 상여도 남연군의 시신을 연천에서 운구한 왕가의 상여다.

 

"보통 상여와는 달리 대차·소차의 2중 구조로 되어 있다. 대차는 36명, 소차는 24명이 메도록 되어 있어 규모가 클 뿐 아니라 외부장식이 섬세하고 다채롭다. 대차의 총 길이는 10m이고 둘레 47cm이며, 교자판(칠성판)이 있어 칠성판(가로 1.2m, 고리 8개)에 고정시킬 수 있다."...영동군청

 

장식은 용머리가 앞뒤로 2개씩 4개, 봉(鳳:수컷)이 앞뒤 2개씩 4개, 황(凰:암컷)이 앞뒤로 1개씩 2개, 동자상이 앞뒤 좌우에 6개씩 12개 등으로 정교하게 장식되어 있고, 연꽃 등 단청과 풍경이 섬세하게 그려져 있다.

 

오색단청은 슬픔을 넘어 가는 길을 축복하는 의미이다. 이생의 죽음은 다음 생의 탄생이지 않은가? 우리네 조상들이 수의에 바느질을 촘촘하게 하지 않는 까닭인 것이다.

 

또한 청사초롱으로 가는 이의 앞길을 밝히니 망자가 외로움을 느끼겠는가?

 


요여(腰輿). 혼백을 모시는 가마로 4명이 들도록 되어 있다. 

신항리 상여의 주인이던 "이용직(李用直:1824∼1909)은 철종때 문과에 급제하고 용강 현감을 거쳐 여주 목사, 영남 어사, 상주 감사에 이어 공조 판서를 역임하고, 홍문관 예문관 제학(提學)을 지냈으며, 기로사(耆老社)에 들었다."고 한다.

 

오늘은 어제 세상을 등진 분들이 애타게 기다렸던 내일이다!!

2007.01.20

출처 : 저 산길 끝에는 옛님의 숨결
글쓴이 : 선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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