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양양군

[스크랩] 양양 / 선림원지...범종이 울려 퍼지는 날은

임병기(선과) 2008. 6. 6. 0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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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양 서면 성황당

 

저멀리 밭자락 모퉁이 소나무 아래 성황당이 보여 차에서 내려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모두들 떠난 동네를 굿건히 지키고 있건만 처연한 기운이 감도는 까닭은 무엇인지? 성황당은 마을 동구 또는 마을숲에 당산나무, 솟대, 조산탑과 함께 어우러져 신성공간으로 자리잡은 우리의 전통 민속 신앙이다.

 

마을의 안녕, 무병장수,제액초복, 풍요,기자 신앙을 염원하는 제의 공간이며, 마을의 허한 기운을 비보해주는 기능도 있는 성황당은 새마을 운동이 요원의 불길처럼 퍼져나갈 때 미신이라는 미명하에 가장 많이 훼손된 전통 민속신앙이었지만, 최근에 우리것을 찾는 사람들과, 주민들의 노력으로 복원이 이루어진 것은 여간 다행한 일이 아니다.

 

어제 원주 신림면의 성황림 답사시에 안내해주셨던 마을 노인회장 어르신은 성황당은 매년 4월8일, 9월9일 두차례 왼새끼로 꼰 금줄에 길상지을 꼽아 제를 올린다고 말씀하셨다. 특정 날짜의 의미는 선대로부터 전해와서 이유를 모른다고 하셨지만 사찰의 산신각이 민간토속신앙을 사찰에 습합했듯이 4월8일은 석가모니 탄생일을 선택한 것 같고, 9월9일은 양수에서도 가장 큰 9가 겹친 날을 택일한 것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대부분 지역의 성황당을 비롯 민속신앙에서는 일년중 음기가 가장 강한 정월 보름에 지난해 가장 복을 받고, 흉사가 없는 집안 사람을 제관으로 뽑아 제를 올린다. 멀지 않아 이농으로 젊은 사람이 사라진 마을 동구밖에 성황당만 마을을 지키지는 않을지, 농경사회의 부산물이라도 잊혀진다는 것은 서글픈 일인데...

 

탱크 저지 방어벽

 

감상에 젖은 마음에 긴장감을 조성하려는 듯 탱크 저지 방어벽이 보인다. 25년전 경기도 연천에서 군생활을 했으므로 눈에 익숙한 콘크리트 구조물이지만, 검문소를 통과할 때마다 가슴이 콩닥거리는 그런 느낌이 전신을 휘감는다.

 

우리문화유산에서도 특히 나의 관심분야인 민속의 성황당에 받은 따뜻하고 감상적인 느낌을 접고 경건하고 엄숙한 자세로 미천골 선림원지를 순례하라는 암시는 아닌지?

 

선림원지


길은 고사하고 산짐승도 찾아들기 어려웠을 신라하대에 홍각선사는 무엇때문에 강원도 양양 하늘아래 첫동네 같은 이곳에 가람을 중수했을가? 선사 이전에 가지산문의 종조 도의,염거,이미 장흥 보림사를 창건한 체증선사의 자취를 더듬기 위해서일까?

 

서라벌 제도권에 이입이 힘든 당나라 유학파 스님들도 비록 변방이지만 선종 사찰을 창건하여 제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는데 홍각선사는 호족의 도움도 기대하기 힘들고, 인적도 드문 겨우 손바닥 만한 옹색한 터에 절집을 세운 까닭은 동양제일의 선종 가람을 열겠다는 의지 표출이었을까?

 

폐사지에서의 의문은 끝이 없겠지만, 오대산 상원사에 보관중 6.25 동란 때 불탄 선림원지 동종이 떠오른 것은 현존하는 신라시대에 종이 상원사 동종, 에밀래종 밖에 없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삼층탑


선림원지 주추만 남은 금당터 앞에 자리한 삼층탑은 연화문이 고운 배례석을 갖추고, 상하기단에는 모서리기둥과 한개의 버팀 기둥을 세웠고, 상륜부 노반, 보주가 보이며, 상기단 면석에는 팔부신상이 양각되어 있다. 

 

선종 도입과 더불어 유행한 이형석탑은 신라하대이건만, 동시대 탑은  옥개석 받침이  대부분 4개로 줄어드는데 선림원지 삼층탑은 전성기의 전형인 5개다.

 

하지만 선림원지 석탑이 영원히 기억에 사라지지 않을 것 같은 예감이 드는 것은 바로 '보물 444호'이기 때문이다.

홍각선사 부도 기단


금당터 오른족에 몸돌 위를 잃고 기단만 남은 홍각선사 부도는 화려하다. 안내문에 의하면 부도 중대석에 표현된 운용문의 시원이라고 한다.

 

지대석위에 안상이 새겨진 팔각의 하대석의 복련, 상대석에는 앙련이 모각되었으며, 몸돌 괴임은 2단이며 조성(886년)시기를 알 수 있어 귀중한 부도다.

석등


신라시대 석등 간주석은 팔각, 고복형으로 대별된다. 어떤 까닭인지 부석사 무량수전 앞 석등처럼 팔각원당형은 신라 영토에, 고복형 석등은 백제 옛땅에서  자주 나타난다.

 

즉 지리산 자락 화엄사, 실상사, 동호인들에게 담양 정자와 가사문학 답사시 꼭 들리라고 일러주는 개선사지 석등이 고복형으로 팔각의 화사석,  옥개석 귀꽃이 크고 화려한 공통점도 있다.

 

간주석과, 화사석이 어제 조성한 듯 하얗게 빛을 발하는 선림원지 석등도 고복형 간주, 팔각의 화사석, 귀꽃, 화창이 4개로 화엄사 석등 유형이고, 옥개석 귀꽃만 없다면 안내문에 고복형을 전국에서 유일하게 고동형이라 표기한 해인사 입구 매화산 청량사 석등과 닮았다.

 

일반적으로 석등은 주전각 앞 탑과 일직선상에 배치되는데 선림원지 석등은 금당터와 떨어진, 석축으로 미루어 별도의 영역에 위치하고 있어 선종사찰에서 중시했던 전각 조사당 앞에 불을 밝혔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석등 뒤에는 건물터 주추가 남아 있다.

 

부도비 귀부, 이수


구산선문 사찰 부도비처럼 비신이 멸실된 홍각선사 부도비는 화려한 이수에 홍각선사임을 밝히는 제액이 있으며 귀부는 힘이 넘치고 머리 위에는 뿔을 세웠던 홈 자국, 육각형 문양의 등, 비신받침의 안상, 꼬리는 휘말려 치켜들고 있다.

선림원지 석축


들어올 때는 보지 못했던 석축이 석등이 있는 영역과,  계곡에서 금당터로 오르는 곳에 튼실하게 자리잡고 산지 가람의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제행(諸行)이 무상(無常)하다지만 선풍이 더 높았던 시절에는 가릉빈가 노래보다 아름다운 법음(法音)을 은은하게 울렸을 동종도, 삼층탑 처마끝에서 산새소리, 바람소리 벗삼아 잔잔하게 가람터를 법열로 가득채웠을 풍경도 사라졌지만, 선림원지에서도 한 없는 그리움의 끝을 알 수 없어, 나는 그리움의 여정을 계속할 것이다.

 

2006.03.14

출처 : 저 산길 끝에는 옛님의 숨결
글쓴이 : 선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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