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양양군

[스크랩] 양양 / 진전사지...한없는 그리움으로

임병기(선과) 2008. 6. 6. 0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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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온이 뚝 떨어졌지만 서둘러 길을 나섰다. 텅 빈 고속도로를 달려 넓은 목장이 펼쳐진 대관령을 넘으면서 오래전에 읽었던 이순원 작가의 '아들과 함께 걷는 길'(?)을 떠올렸다.

 

강릉이 고향인 작가가 초교생인 아들과 함께 60리 굽이굽이 대관령을 넘어면서 주고받은 이야기를 소설로 구성한 내용으로 대리만족을 했던 기억이 남는다. 나도 언젠가 아들과 함께 동행하고픈 길이었는데 초교생이던 아들이 고 3이 되었건만 오늘도 못난 아버지는 혼자이다.

 

 

양양 38선 휴게소

 

내륙에 태어난 놈이라서 나이와 무관하게 바다는 늘 새로운 느낌이지만 38선은 더더욱 무거운 느낌으로 다가오는 것은  통일을 기대하는 소박한 마음이겠지.

 

민족의지와 상관없이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제목소리 한 번 내지 못하고 잘려버린 허리를 반세기가 지나도 봉합수술은 커녕 의사놈들의 눈치만 살피고 있는 실정이니...

 

1950년 10월 1일 3사단 23년대가 38선을 넘어 북진한 날짜를 기념해서 국군의 날이 제정되었다는 안내문이 해풍을 동반한 추운 날씨보다도 더욱 나를 초라하게, 춥게 느끼도록 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양양 기사문 바다

 

젊은 날에는 바다보다 백사장이 좋았는데, 언제부터인지 바다뿐만 아니라 멀리서 바라보는 풍경, 시선에 집착하고 있다. 자신감이 부족하고, 주관이 결여되었다는 것이 솔직한 표현일텐데, 깊고, 넓으며,노련하게 생, 삶을 관조하는 시각으로 왜곡, 포장하고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서부 전선으로 부터 155마일 휴전선을 순례한 노산 이은상 선생이 동해안 고성(?) 바닷가에서 더 나갈 수 없음에 초병과 더불어 목 놓아 울었다는 그 바닷가, 그 느낌은 아니라도 소리내어 울고 싶은 까닭을  로맨티스트의 감정으로 여긴다면, 착각일까? 건방일까? 아니면 노망일까?

 


진전사지 삼층석탑/문화재청

 

멍청한 중생!! 분명히 박았건만 3층탑은 박히지 않아 문화재청 사진을 가져 왔다.

 

작년 TV 앞에서 눈물 뿌렸던 낙산사 화재 상흔을 애써 외면하고 진전사 초입에 이른다. 내가 진전사지에 몰입하는 이유가 뭘까? 폐사지는 전국에 산재하고, 이형의 석탑 역시 흔하디 흔하지 않은가? 그것은 우리문화유산에 관심을 가지고 석조미술 공부를 하면서 알게 된 도의선사 부도 때문으로 믿고 싶다.

 

우리문화 매니아들은 익히 알겠지만 선종의 흐름은 종조 달마대사--혜가--승찬--도신--홍인까지는 선맥을 같이 하지만 6조에 이르면 북종선의 신수, 남종선의 혜능으로 분가되며, 신라하대에 혜능의 법종손인 서당 지장에게 공부하고 귀국한 가지산문 도의선사, 실상산문의 홍척선사에 의해 선종이 태동하게 된다.

 

물론, 도의선사는 법제자 염거화상의 제자인 체증선사가 보림사를 창건후 가지산문 종조로 모셨으며, 도의선사 이전에 4조 도신에게 공부한 명랑법사 제자이며 희양산문 개산조 지증 도헌의 스승인 신행선사가 도의선사보다 앞선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내게는  중요한 사실이 아니다.

 

옛님의 숨결 방에서 수차례 언급했지만 신라하대에 도입되어 제도권에 흡수되지 못하던 선승들은 왕권이 약화되어 득세한 지방호족 세력과 결탁 누구나 부처가 될수 있다는 쇼킹하고 센세이션한 이론으로 사세를 넓히게 된다.

 

이러한 선종 사찰 특징이 철불, 조사당, 부도, 이형석탑이며  진전사지 부도가 우리나라 선종의 종조인 도의선사 부도로 추측되고 있기에 내게 늘 그리움의 대상이었는지 모르겠다.

 

삼층탑 상기단

 

신라 전형의 2기단, 3층탑신, 네개의 옥개석 받침을 갖춘 3층탑은 상기단 면석에 2구의 팔부신장이 힘주어 앉아 계시며, 옥개석 처마 반전이 부드러우며, 풍탁 자국이 남아 있다.

 

삼층탑 하기단

 

하기단 면석에는 연화대좌와 광배를 갖춘 비천상이 구름속을 여행하고 계신다.

삼층탑 1층 몸돌


몸돌 면석에는 여래좌상이 좌정하여 중생들을 굽어 살피신다.  몹시도 추운대도 불구하고 진전사지는 따뜻함이 가득 넘쳐난다.

 

傳도의선사 부도


산불감시 초소를 지나 저수지 방죽 맞은편 산길을 오르면 새로히 불사한 진전사 건너 산자락에 눈에 익숙한, 너무도 뵙고 싶었던 부도가   연화문을 양각한 배례석 뒤에 자리하고 있다.

 

傳도의선사 부도로 알려진 진전사 부도는 부처 진신사리, 법신사리를 모셨던 초기 불탑 기단 양식 위에, 스님의 부도를 모신 초기 팔각원당 형태 몸돌, 옥개를 함께 갖추고 천년세월을 간직하고 계신다.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하면 어떤가?

솔바람소리마져 사치로 여겨지는 것을......

 

2006.0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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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여러 이론이 있지만 나는 '도의선사 분사리'라는 최완수 선생 이론을 좋아하는 언양 석남사 부도를 문화재청에서 옮겨오니 우리님들 참고하길 바란다.

 


석남사 부도/문화재청

 

"석남사 동북쪽 언덕의 넓은 대지에 자리잡고 있으며, 일찍부터 석남사를 세운 도의국사의 사리탑으로 불려왔다. 전체적으로 8각의 형태을 취하고 있으며, 8각의 바닥돌 위에 기단부(基壇部)와 탑신(塔身)을 놓은 모습이다.

기단부의 아래받침돌은 8각으로 사자와 구름을 도드라지게 새겨 놓았다. 북모양을 하고 있는 가운데받침돌에는 상·하·좌·우에서 안쪽을 향하여 낮게 솟은 꽃모양의 안상(眼象)을 새겼고, 그 안으로 꽃모양의 띠를 둘렀다. 윗받침돌은 연꽃을 새겨 탑신을 받치도록 하였다.

 

 탑신은 모서리에 기둥 모양을 얇게 새겼고, 앞·뒷면에는 문짝 모양의 조각을 두었는데, 그 중 앞면에만 자물쇠가 새겨져 있다. 문의 양 옆으로 신장입상(神將立像)이 배치되어 있다. 지붕돌은 추녀가 짧고 서까래와 기왓골이 상세히 표현되었으며, 지붕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이 차례대로 얹혀져 있다.

전체적으로 넓이에 비하여 높이가 높은 부재로 구성되어 길쭉해 보이며, 바닥돌의 폭이 좁아 안정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아래받침돌의 구름무늬나 탑신의 신장상이 형식적으로 표현되었고, 특히 가운데받침돌의 안상조각에서 시대가 내려옴을 볼 수 있으나 각 부분이 완전히 보존된 아름다운 작품이다.

1962년 해체, 수리할 당시 기단부의 가운데받침돌에서 사리장치를 두었던 공간이 확인되었으나 사리장치는 남은 것이 없었다"... 문화재청


출처 : 저 산길 끝에는 옛님의 숨결
글쓴이 : 선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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