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영천시

[스크랩] 영천 / 화남동 삼층탑, 석불좌상

임병기(선과) 2008. 6. 6.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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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해가 긴 그림자를 드리울 무렵 이놈은 새벽부터 나선 길이라 서서히 지친다. 익히 아는 길인데도 방향을 잘못 잡은 탓에 전화위복으로 특히 관심이 많은 우리민속인 동리 입구의 조산탑을 발견하고 달구지를 멈추었다.

 

화남동 가는 길 조산탑

 

길을 돌아나오면 한광사 초입에서  권응수 장군 유물전시관이 시선을 끌지만 늘 닫혀있어 화중지병이었는데 오늘은 오히려 닫힌 문이 고맙기만 하다.

 

"권응수 장군(1546~1608)은 조선 선조 때 무신으로 호는 백운재(白雲齋), 시호는 충의(忠毅), 본관은
안동(安東) 이다. 장군은 신녕현 추곡리(현 화산면 가상리)에서 능라군 권덕신의 아들로 태어나 선조 17년(1584)에 무과에 급제하여 43세에 정략장군, 46세에 어모장군이 되었다.
임진왜란 때 경상도 수군절도사 박홍(朴泓)의 막하에 있다가 고향으로 돌아와 의병을 일으켜,크고 작은 전투에서 연전연승한 장군은 영천 지역의병의 연합전선을 구축하고 뛰어난 작전과 용병으로 영천성 탈환에 수훈을 세웠다.


이 후 경주성 탈환전에 선봉으로 참전하였으며, 문경의 당교와 산양 탑전, 안동의 모은후, 구담, 밀양,황룡사,충청도 창암 등에서 왜군의 주력부대와 싸워 대파하였을 뿐 아니라 정유재란 때는 원병으로 온 명 나라 장수를 도와 1, 2차 울산전투에 참전하여 큰공을 세웠다. 전쟁이 끝난 후 선조 37년(1604) 선무공신(宣武功臣)으로 화산군(花山君)에 봉해졌으며, 오위도총부도총관에 이르렀다. 무관으로 전쟁터를 누비던 장군은 선조 41년(1608) 세상을 뜨나 인조 2년(1624)에 의정부 좌찬성겸 판 의금부사에 추증(追贈)되고, 숙종 17년(1691)에 충의(忠毅)의 시호가 내려졌다. 이러한 장군의 빛나는 업적을 기리기 위해 1979년 정부의 호국 위인 유적정화사업으로 유물전시관이 건립되었다."...영천시청

 

권응수 장군 기념관 앞 조산탑


권응수 장군 기념관 앞에도 조산탑이 보인다. 우리 선조들은 이렇게 이중삼중으로 나가 아닌 우리를 위한 마을맥이 액땜 즉 제액, 벽사와 더불어 기복, 풍요를 기원했다.

 

한광사 초입에는 거대한 납골당이 사람을 압도한다. 앞선 분을 위한다지만 산사람 기를 살리는 것이 급선무일텐데...
 

화남동 한광사 삼층탑


달구지가 멈추자 스님 한 분이 급히 나오시며 서울서 오신 분이냐고 물으신다. 괜히 미안함에 반배 올리고 한광사 중정을 올라서니 짧은 동지 마지막 햇볕을 온몸으로 마시며 석탑이 반겨준다.(근데 사진을 보니 삼층탑이 굉장히 피곤한 모습으로 누울려고 하는군 ㅋ)

 

하대석의 복련, 잘라진 팔각원당형 석등 중대석을 벗삼아 삼층탑은 2기단, 4*4*4 옥개석 받침,1개의 상기단 탱주로 미루어 신라 전성기를 지난 탑임을 짐작되며 옥개석 마모가 보이며 상륜부는 멸실되었다. 폐사가 된 한광사 동서탑 중의 하나로 알려져 있다. 

 

화남동 한광사 쌍탑(?)


 옛 한광사 쌍탑중 한 기?  몸돌을 떠나보낸 지붕돌이 처연하게 느껴지는 것은 어지럽게 흩어진 석탑 부재가 토해내는 애닮픔 때문은 아닐까?

 

화남동 한광사 비로자나불


쌍탑을 바라보며 전각에는 비로자나불이 모셔져 계신다. 탑과 동시대에 조성되었다면 나말여초의 불상일테고,  나발 크지 않은 얼굴, 통일신라 전성기 당당한 모습이 둔화된 좁은 어깨 섬약해 보이는 외형이 노스님 처럼 보인다.

 

신녕 역전 선돌


  "찾는 사람 없는 외로운 몸 자네라도 이따금 들리게 들리게 들리게..." 신녕 들녘 입석 외침이 아직도 귓가에 맴돌고 있다.

 

2006.01.21

 






 

출처 : 저 산길 끝에는 옛님의 숨결
글쓴이 : 선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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