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영천시

[스크랩] 영천 / 자양 성곡리...오천 정씨 유허지

임병기(선과) 2008. 6. 6. 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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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양면 소재지 초입 도로변에 오천 정씨 유허지가 소재하고 있다. 무슨 연유인지 영일, 연일이 아닌 오천 정씨 유허지가 음각된 자연석이 세워져 있다. 성곡리 한문표기가 城谷인지 알 수 없지만 안동 댐이 城谷리에 소재하고 있어 우리 조상들의 혜안에 놀란적이 있는데, 자양댐을 바라보면서 추측이 맞았으면 하는 바램이다.

 

안동댐 수몰지역의 문화재가 민속 경관지, 군자리에, 충주댐 수몰지역 문화재가 제천 청풍단지에 옮겨진 것 처럼 영천댐 준공과 더불어 수몰 위기에 봉착한 오천정씨 집안 문화유산을 종중묘가 있는 이 곳으로 옮겨 놓았다.

 

별다른 설명 보다는 없는 것 보다는 좋은(?) 내사진에 영천시청 홈의 설명을 부기하니 훗날 우리님들의 탐승길에 참고하길 바란다.

 

오천 정씨 종중 묘역

 

강호정

 

이 건물은 조선 선조 32년(1599)에 의병장 정세아(鄭世雅)가 임란후 고향에 돌아와 선조 32년(1599) 자호(紫湖) 언덕에 정자를 짓고 여러 교우와 학문을 강론하였던 곳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 홑처마 맞배지붕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양래간(兩來間)은 방이고 중앙칸과 전면 퇴간은 누마루 형식이며 기둥은 원주(圓柱)로 되어있는 익공계(翼工系)의 삼량(三樑)집이다. 1974년에 영천댐 공사로 수몰됨에 따라 용산동 751번지에서 현위치로 이건하였다.


정세아(鄭世雅 1535~1612)
자는 화숙(和叔) 호는 호수, 본관은 오천(烏川)이다.
노촌 윤량(魯村 允良)의 아들로 태어났다.



임진왜란에 공이 분개하여 의병을 일으켜 박연(朴淵)에서 왜적을 대파하니 사졸의 기세가 대진 (大振 )하는지라 다시 7월 27일 영천성 탈환에 혁혁한 공을 세우고 다시 경주의 적을 진공하여 승전하니 이로 말미암아 낙동강 왼쪽이 온전하였다. 명나라 구원병이 평양, 개성, 서울을 회복하니 공(功)과 벼슬을 사양하고자 양서재로 돌아와서 다시 학문의 길을 찾았다. 나라에서 수차 벼슬을내렸으나 나가지 않다가 이원익의청을 이기지 못하여 찰방을 잠시 지내고 돌아왔다. 그리하여 장여헌(張旅軒), 조지산 (曺芝山) 등과 학문을 논하며 조용히 여생을 마쳤다.

 

하천재 신도비

 

이 묘재는 오천정씨(烏川鄭氏) 문중의 묘소와 강의공(剛義公) 정세아(鄭世雅)의 신도비를 수호하기 위하여 진주목사인 정호인(鄭好仁)이 조선 인조 15년(1637년)에 창건하였다고 한다.

강의공은 임진왜란 때 의병대장으로 추대되어 많은 전공을 세웠으나 논공행상에 참여하지 않고 강호정사에서 제자를 기르며 학문을 닦아 덕망이 높았던 선비였다. 현재의 건물들은 후대에 중건된 것으로 보이며 영천댐 수몰지구로 편입되어 1976년 7월 현위치로 이건하였다. 경내에는 추원당(追遠堂), 신도비각등의 건물이 있는데 모두 단순하고 소박하게 짜여져 있다.

 

삼휴정


이 건물은 삼휴 정호신(鄭好信)(1605~1649)이 학문을 연구하기 위하여 조선 인조 13년(1635)에 건립하였다고 한다. 정호신의 자는 덕기(德基), 호는 삼휴(三休), 본관은 오천(烏川)으로 17세때 아버지를 여의었으나 형 섬기기를 부모처럼 하고 스승을 예우함이 모범되었다고 한다.

조부인 호수 정세아가 살았던 곳에 정자를 짓고 그 풍경을 바라보면서 ‘삼휴(三休)’란 시를 지었는데 이로 인해 삼휴당이란 당호가 생기게 되었다. 삼휴당은 소박한 구조의 건물로 전면에만 난간(欄干)을 시설하였는데 영천댐 건설공사 1977년 3월 현 위치로 옮겨 복원하였다.

三休
芳辰賞花 花落則休
良靑對月 月傾則休
閒月得酒 酒盡則休

 

좋은 봄날 꽃을 즐기다가 꽃이 지면 쉬고 맑은 저녁 달을 즐기다가 달이 지면 쉬고 한적한데 술을 덜어 즐기다가 술이 다 되면 쉬노라.


사의당


이 건물은 조선 영조 2년(1726)에 정중호(鄭重鎬) 중기(重岐), 중범(重範), 중락(重洛) 4형제의 우의를 돈독히 하고 유능한 인재를 양성하기 위하여 삼구리에 건립한 것인데 건물이 쇠락하여 순조 2년(1802) 자양면 용산리에 옮겨 지었다가 영천댐 건설로 1977년 3월에 현재의 장소로 이전 복원(復元) 하였다.

 

오회당

 

이 건물은 오회당 정석현(五懷堂 鄭碩玄)을 추모하기 위하여 조선영조 3년(1727) 관찰사 권대규의 후원
으로 건립하였으며, 영천댐 건설공사로 1977년 3월 현 위치로 이전·복원하였다.
소박하게 짜여진 건물로 지붕의 형태는 맞배지붕 좌우에 눈썹지붕을 덧달아 마치 팔작지붕처럼 보이게 하였는데, 이런 형태는 이 지역에는 흔히 볼 수 있다.

 

오회공 종택


이 가옥은 임진왜란때 의병의 활약으로 영천, 경주 전투에서 큰 공을 세운 정세아의 넷째 아들인 수번이 그의 셋째 아들 호신의 분가주택으로 조선 광해군 12년(1620)경에 건립한 것이며 묘우(廟宇)는 효종 6년 (1655)에 세워졌는데 영천댐 건설공사로 1977년 3월에 현 위치로 이전·복원하였다. 주택은 정면 5칸, 측면 1칸의 가적지붕이고, 묘우는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으로 되어있다.

 

2006.01.21


출처 : 저 산길 끝에는 옛님의 숨결
글쓴이 : 선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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