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정사 철불과 담장을 나란히 하여 환구세덕사가 자리 잡고 있다. 사당은 임진왜란시 영천,경주 전투에서 의병으로 참여 혁혁한 공을 세운 후 향리에 돌아와 장혀현 선생과 학문을 논하며, 후학을 양성한 호수 정세아 선생과, 선생의 아들로 경주 전투에서 위기에 빠진 아버지 호수 선생을 구출하고 적에 사로잡혀 생을 마감한 정의번 선생을 배향하고 있다.
호수선생은 벼슬을 거절하고 초야에 묻혀 지냈으며, 의번 선생도 학봉 김성일 선생의 장계로 호조정랑에 추증되었다. 아마 마을 뒤산이 고리를 닮아서 유래된 듯한 환구세덕사는 여느 사당처럼 대원군 서원철폐령에 훼철되었으며 후에 복원되었다.
"영일 정씨는 신라의 전신인 사로의 육부촌중 취산 진지촌장 지백호(智伯虎)가 서기 32년봄 유리왕으로 부터 다른 다섯 촌장들과 함께 사성받을 때 본피부로 개칭되면서 정씨(鄭氏)의 성을 하사 받은 것이 시초가 되며, 그의 원손 종은(宗殷)이 신라조에서 간관(諫官)으로 직언을 하다가 인동 약목현에 유배된후 후손 의경(宜卿)이 영일로 이거하여 호장(戶長)을 지내고 영일현백에 봉해졌으므로 영일정씨로 시적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후의 계대가 실전 되고 고증할 문헌이 전하지 않아 고려 인종조에 은청광록대부로 추밀원 지주사를 지낸 정습명(鄭襲明)을 시조로 받드는 지주사공파(知奏事公派)와, 무를 역임한 정극유(鄭克儒)를 시조로 하는 감무공파(監務公派)로 갈라져서 세계를 있고 있다."...한국의 성씨
요즘도 영일 정씨, 연일 정씨, 오천 정씨로 각각 본을 사용하는지 통일 하였는지 알 수 없지만 수많은 위인 명현 중 우리에게 익히 알려신 분은 포은 정몽주, 송강 정철 선생이 영일이 본이다.
함계정사는 환구세덕사에 배향된 호수 선생의 손자인 호례 선생이 입향한 마을 언덕에 세워진 건물로, 입향조의 손자인 함계 정석달---"정석달(鄭碩達 1660~1720) : 자는 가행(可行) 호는 함계(涵溪) 본관은 오천(烏川) 충무위대호군(忠武衛大護軍) 시심(時諶)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일생에 학문을 탐구하고 그 인품과 덕망이 고을에 높았다. 이갈암 현일(李葛庵 玄逸)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병와 이형상(甁窩 李衡祥)과 횡계 양수와 학문을 토론하며 일생을 보냈으며 후에 문집 3권이 있고 대산 이상정(大山 李象靖)
선생이 서문을 지었다.(영천 시청)"---선생이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 건립한 안락재 였으나, 함계 선생의 손자가 중수하여 함계정사로 명하였다 한다.
함계정사 옆 가정집에는 가는귀를 먹은 할머님이 계셨다. 자물쇠가 잠겼지만 열면 된다는 제스쳐로 할머님은 멀리서도 나를 편안하게 함계정사 옆문으로 안내하셨다. 2층 누각인 정사는 맞배지붕, 연등천장,두리기둥, 누하에 아궁이와 굴뚝, 2층에는 가운데 마루와 양쪽에 방을 두고 전면에는 툇마루를 걸고 계자난간을 설치하였으며, 방 옆에는 쪽마루를 두었고 도리를 길게 한 후 방풍널을 달았다.
무엇에 홀린 듯 동선에 포함하고도 들리지 못한 고택이 선원리 정용준 씨 가옥이다. 선원리는 마을 분위기가 고풍스러우며 안락하고 평온하게 탐승객을 맞아주는 마을이다. 그까닭이 선원리 풍수가 백학이 알을 품고 있는 '백학포란'형국과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2006.0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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