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안동시

[스크랩] 안동 / 태사묘

임병기(선과) 2008. 6. 6. 0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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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주의 본향 제비원의 고장 안동인지라 성주풀이 행사 전야제 준비로 시내 중심가인 북문동은 요란스럽다. 주차공간이 없어 잠시 둘러보고 왔지만 우리님들의 이해를 돕기위해 태사묘에 관해 간단히 알아보자. 태사묘  즉 삼태사묘는 후삼국 시대 고려 왕건을 도와 견훤을 물리친 안동의 옛지명 고창의 성주 세사람을 향사하는 묘우다.

 

고려왕건은 지방호족의 도움으로 후삼국을 통일한 후 그들을 견제하기 위해 통혼을 맺고 성을 내릴 뿐 아니라, 전국의 많은 지명을 개명했다. 고창 전투에서 승리후 동쪽을 편안해졌다는 의미로 안동으로 개명하고 세분의 성주에게 성을 내리게 되니 , 이들이 안동 권씨,김씨,장씨의 시조가 된다.

이 족보에 대해서도 재미있는 이야기를 알고 있지만 언급하지 않겠다. 다만 혹 주위에 안동 권씨가 계신다면 잘 살펴보기 바란다. 왜? 대머리거나 팔,다리에 다른 사람에 비해 털이 엄청 적을 것이다.

 

나의 이야기보다는 삼태사에 대한 자료를 옮겨오니 참조 바라며, 삼태사의 묘는 봉정사에서 제비원 석불로 답사처를 잡으면  중심동선에 있음을 첨언한다.
 

향토를 지킨 삼태사(三太師)

신라 말엽 당시 신라는 국운이 쇠약하여 곳곳에서 도적떼가 성했고, 특히 옛 백제 땅에서는 견훤이 후백제를 세우고 옛 고구려 땅에서는 고려가 일어나 날로 세력이 강성하였다. 927년(경애왕 4년) 포악한 견훤은 마침내 군사를 이끌고 경주까지 쳐들어와서 왕을 자살케 하고 왕비를 능욕하며 재물을 함부로 빼앗아 그 피해가 막심하였으나 힘이 약한 신라로서는 막을 수가 없었다.

이 소식을 들은 고려 태조 왕건은 군사 5천명을 이끌고 구원하러 왔으나 오히려 대구 부근의 공산 동수싸움에서 대패하여 신숭겸, 김락 등 많은 장수와 군사를 잃은 채 겨우 목숨을 부지하여 돌아갔다.
고려 태조 12년 견훤은 승승장구한 여세를 몰아 의성, 풍산 등의 여러 고을을 빼앗고 안동을 공격하여 왔다.

10년전 공산싸움에서 해한 이후 군사를 기르며 때를 기다리던 고려 태조도 이 소식을 듣고 군사를 이끌고 남하하여 안동에서 고려와 후백제의 두 군사는 생사를 건 대 전투에 임하게 되었다. 이듬해 1월 예안에 주둔하고 있던 고려군은 안동 북쪽의 병산(안동시 와룡면 소재)에 진을 치고 후백제군은 맞은 편의 석산(안동시 와룡면 소재)에 진을 치고 대치하였다.

지금까지 승리를 거듭한 견훤의 군대는 병력도 많고 사기도 충천하였으나 고려 태조의 군대는 그렇지 못하였으니 대상(大相) 홍유 같은 이도 전쟁이 불리하면 후퇴할 길을 먼저 닦아야 한다고 태조에게 진언할 정도였다.
당시의 고창(안동의 옛이름) 성주이던 김선평(金宣平)과 권행(權幸), 장길(張吉) 세 분은 일신의 안전만을 위한다면 마땅히 견훤에게 항복하는 것이 옳겠으나 돌아가신 경애왕의 원수를 갚을 좋은 기회로 알고, 또 포악무도한 견훤으로부터 이 고장을 수호하기 위하여 고려 태조에게 귀순하였다.

이에 고려 태조는 크나 큰 힘을 얻게 되었고, 이 고장 지리에 밝은 세 분 태사는 강대하고 사나운 견훤의 군사와 정면 대결을 하여서는 승리하기 어려움을 알고 고을민을 이끌고 고려 군대와 힘을 합하여 저수봉(猪首峰:현 안동시 뒷산)으로부터 밤중에 견훤의 군을 뒤에서 습격하였다.

때를 맞추어 고려 태조가 군사를 이끌고 정면에서 진격하니 견훤은 견디지 못하고 8천명의 군사를 잃은 채 패주하고 말았다. 이로부터 고려의 병력은 날로 강성해지고 청송을 비롯한 안동 주위의 30여 고을과 동해 연안의 여러 고을 등을 합하여 100여 고을이 모두 고려에 귀순하였다.

고려 태조는 이 병산싸움에서 큰 공을 세운 세 분 태사의 공로를 높이 치하하여 선평은 대광(大匡), 행과 길은 대상(大相)을 삼고 태사(太師)의 벼슬을 내렸다. 또 태조는 원래 경주 김씨인 세분에게 선평은 金, 행은 權, 길은 張씨의 성을 내려 주고, 고창군을 안동부(安東府)로 승격시켜 삼태사의 식읍(食邑)으로 삼게 하였다.


 

안동 권씨 (安東權氏)  안동권 홈으로


 1> 시조 : 권 행[權幸]

 2> 본관 및 시조의 유래

     권씨[權氏]는  조선씨족통보 등에  60본까지 기록하고 있으나  현존하는 본관은

     안동[安東]과  예천[醴泉]뿐이다.

     시조 권행[權幸]은 원래 신라왕실의 후예로 본명이 김행[金幸]이었다.

     930년 고려태조인 왕건이 견훤과 대전할 때  이를도와 함께 쳐부수니  태조가 기뻐하며

     권씨[權氏]의 성과 벼슬을 제수한후  고창군[안동의 옛지명]을  식읍[食邑]으로 하사하였다.

     그후 지명이 안동으로 개칭됨에따라  후손들이 본관을 안동으로 삼아 계보를 이어왔다.

 

     권씨는  고려말기에서부터  두각을 나타내어  조선조에 들어와서는  확고하게 지반을 다지고

     제10세를 전후하여  크게 14파로 갈리는데  그중에서 특히 추밀공파복야공파, 좌윤공파

     에서  훌륭한 인물들이 많이 배출되어  가문의 중흥을 이루었다.

 

     인물로는 추밀공파의 파조[派祖]인 수평[守平]이 추밀원부사에 올랐으며,

     수평의 아들 는 문하시중, 태자태사 등을 역임했고,  복야공파의 한공[漢功]이 예천부원군,

     한유[漢有]는 평장사, 중화[仲和]는 조선태종때 영의정, 상일[相一]은 대사헌 지중추부사,

     좌윤공파의 진[軫]은 영조와 이조판서를 거쳐 좌의정까지를 역임했으며  그외에도

     훌륭한 인물들이 너무 많으나  이지면으로는 다 열거할수 없음을 양지하기 바란다.

 

 3> 집성촌

     경북 안동시 법상동

경북 월성군 양북면 구길리

     경북 안동군 와룡면 이하동

경북 예천군 용문면 저곡동

     경북 안동군 북후면 연곡동

경북 영주시 영주동

     경북 청송군 진보면 광덕동

경북 봉화군 봉화읍 유곡리

     

안동권씨시조 권행의 묘

안동권씨의 시조이며

고려의 건국공신이다

경북 안동군 서후면 성곡동 천등산

 

신,안동김씨 (新,安東金氏)

 

 1> 시조 : 김선평[金宣平]

 2> 본관 및 시조의 유래

     안동(安東)은 경북  북동부에 위치한 지명으로 고대의  창녕국이었는데
     신라시대에는
고타야국,·고창군
으로 불리웠고,  고려 태조가 견훤과 싸워 전공을 세움으로써
     
안동부로 승격되었다. 그후 영가군, 복주로 개칭되었다가 1361년안동대도호부로 승격되었다.  

     안동김씨(安東金氏)의 시조 김선평(金宣平)은  신라말 고창군 성주로서  태조 왕건을 도와
     후백제 견훤을 정벌하는데 공을 세워 삼한벽상공신에 책록되고  대광 태사의 벼슬에 이르렀다.  
     그로부터 문호를 개방한 안동김씨는
습돈(習敦)을 1세조
로 하여 세계를 이어오면서
     원손(遠孫)
계행(係行)
이 조선 성종 때 대사간에 오른 것을 기점으로 명문의 기틀을 다지고
     왕실의 외척이 되어 세도가문의 지위를 굳혔다.

 

     광해군때  극효(克孝)는 정3품 도정을 지냈으며 그의 아들  5형제 중 장자 상용(尙容)
     막내
상헌(尙憲)
이 뛰어났다.
     상용은 인조때 우의정에 올랐으며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원임대신으로서 강화도에 들어갔다가
     성이 함락되자 입었던 옷을 벗어 하인에게 주며  
" 네가 만일 살거던 이옷을 내 아이들에게
     전하여 뒷날 허장(虛葬)하는 제구로 쓰도록 하라"
하고 남문으로 가서 화약궤에 걸터앉자
     측근에게
"가슴이 답답하여 담배가 피우고 싶으니 불을 가져오너라"
하여 화약에 불을 던졌다.  
     그의 손자 수전[13세]이 곁에 있었는데 종에게 안고 나가라고 명하였으나  아이는 울면서
     "할아버지를 따라 죽겠습니다" 하며 가지않아 종과 함께 모두 죽었다.

     동생
상헌(尙憲)
은  백부인 대효에게  출계하였으며 벼슬이 영의정에 이르렀고 그는 관직에
     있는동안 강직하기로 이름이 나서 관민들이 아예 부정할 것을 포기했다고 한다.

     한편 안동김씨의 재중흥을 일으킨 수증(壽增)·수흥(壽興)·수항(壽恒) 3형제는
     우의정 상헌의 손자이며 광찬의 아들들이다.  수증(壽增)은 형조와 공조정랑을 지냈으며,
     수흥(壽興)은 숙종때 영의정에 올랐으나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집권하자 장기에 유배되었다가
     배소에서 죽었다.  수항(壽恒)은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을 지냈으며 영의정에 올라
     [현종실록]편찬에 총재관을 지냈다.  

 

     안동 김씨의 <육창(六昌)>으로 일컬어진 수항의 아들 6형제 중 맏아들 창집(昌集)
     숙종때 영의정을, 둘째
창협(昌協)은 대사간을 지냈고, 셋째  창흡(昌翕)
은 성리학에 밝아
     학자로 명성을  떨쳤으며,
창업(昌業)은 문장과  도학으로 창집(昌緝),·창립(昌立)
과 함께
     가문을 중흥시켰다.  

 

     이들 육창의 인맥을 살펴보면 첫째 창집의 아들 제겸(濟謙)이 우부승에 이르렀고,
     손자
이소(履素)가 정조 때 우의정과 좌의정을 역임한후 영돈령부사에 이르렀다.  

     한편 창집의 현손 조순(祖淳)은 양관대제학에 올라 그의 딸이  순조의 비(순원왕후)가 되자
     영안부원군에  봉해져서 철종때의  안동김씨세도정치의 기초를 마련했고 문장과그림에 능했다

     이조 판서 명순의 아들
홍근(弘根)
은  헌종때 공조와 병조판서를 거쳐 좌의정에 올랐으며,
     
응근(應根)
은  형조판서에 올랐다.  
     홍근의 아우
흥근[興根]
은 헌종때 예조 판서를 거쳐  철종때는 좌의정에 이어 영의정에
     이르렀고 고종이 즉위하자 [철종실록] 편찬에 참여했다.

     그외 창집(昌集)의 후손 중에서는 조근(祖根)이 영흥부원군에 봉해졌고, 철종 때 영의정을
     세번 역임한
좌근(左根)은 좌찬성에 오른 병기(炳基)와 함께  이름을 떨쳤다.

 

     거창부사  인순의 아들 수근(洙根)은 헌종때 대사성과 이조 판서를 거쳐 선혜청 당상이 되고
     병조와  형조판서를 역임한 후 한성부  판윤에 이르렀으며, 수근의 아들  
병학(炳學)

     고종때  [철종실록]을 편찬하고 조두순,·이유원 과 함께 [대전회통]을 완성했다.  

 

     창흡(昌翕)의 후손에서는  <초계문신>으로 뽑혔던  달순(達淳)이 우의정에 올랐으며,
     
매순(邁淳)은 문장이 뛰어나서 홍석주와 함께 <여한 10대가>의 한 사람으로 손꼽혔다.

     그밖에  선천부사 익순의 손자 병연(炳淵)이 조선의 이름난 시인으로 전국을 방랑하며
     해학과 재치가 넘친 싯귀로 세상을 풍자하는 작품을 남겼고, 한말에 와서는 개화혁명)의 기수
     
옥균(玉均)과  한일합방의 울분으로 자결한 석진(奭鎭),
 대한독립군을 결성하고
     흑룡강을 무대로 독립군 양성에 전력했던
좌진(佐鎭)
, 만주에서 재만 한족총연합회를 조직하여
     민족운동에 앞장섰던
종진(宗鎭)
등이 명문 안동 김씨의 전통을 살렸다. 
 

 3> 집성촌

     경기도 고양군 중면 일원

충남 논산군 일원

     경기도 화성군 정남몀, 동탄면 일원

전북 순창군 풍산면 일원

     강원도 명주군, 강동면 일원

경북 예천군 일원

     충북 청원군, 괴산군, 음성군 일원

경남 함안군 칠서면 일원

 

안동 장씨 (安東張氏)

 

 1> 시조 :  장정필[張貞弼]

 2> 본관 및 시조의 유래

     안동(安東)은 경상북도 북동부에 위치하는 지명으로, 고대의 창녕국이었는데
     신라 시대에는 고타야국,
고창군
으로 불리웠고, 고려 태조가 견훤과 싸워 전공을 세움으로써
     
안동부(安東府)로 승격되었다. 그후 영가군 또는 복주
로 개칭되었다가 1914년 예안을 통합하여
     
안동군이 되었고, 1962년 12월 안동시
로 개칭되었다.
 
     
안동장씨(安東 張氏)의 시조 장정필(張貞弼)
은 888년(신라 진덕여왕2) 중국 절강성
     소흥부에서 대사마 대장군
원(源)
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원(源)
이 어지러운 난국을 피하여 동래(東來)할때 함께 따라 와 강원도 강릉땅에
     정착,  후에 경북 노전으로 옮겨 살았는데,  930년(고려 태조 13) 고창 성주인 김선평,
     판관 권행과 함께 태조를 도와 후백제 견훤의 군대를 대파한 공으로
     삼한벽상삼대광아보공신태사영운사에 오르고 고창군에 봉해졌다
     그리하여 후손들이 정필(貞弼)을 시조로 삼고,  본관을 안동으로하여 세계를 이어왔다.

 

     장씨(張氏)는 덕수(德水)와 절강(浙江)을 제외하고는 그의 후손(後孫)들이다
     가문을 빛낸 대표적인 인물로는 화령군
사길(思吉)과 그의 아들 철(哲)
이 유명하다.
     사길(思吉)은 1390년 밀직부사로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에 가담하여 공신에 책록되었고,
     1392년 조선개국에 공을세워 개국1등공신, 정사2등공신에 오르고, 화산군에 봉해졌으며,
     이어 첨절제사, 영흥부사에 이르렀다.
 
     한편 학자로 이름난
흥효(興孝)
는 문장과 덕행으로 뒤 에 지평(持平)에 추증되었으며,
     성리학자(性理學者)
세량(世良)
은 효종때 주.군(州郡)의 수령으로 선정을 베풀었다.
     그밖에 영조때 창성부사 겸 방어사 로 변방 방어에 공을 세우고 동지중추부사에 오른
     
천용(天用)이 유명했으며, 순조때 홍경래의 난에 공을세운 몽설(夢設), 낙현(洛賢)
부자가
     명성을 날림으로 가문을 더욱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안동장씨(安東張氏)는 남한에 총 15,086가구,      64,814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3> 집성촌

     강원도 횡성군 횡성읍 궁천리

경기도 양주군 수동면 입석리

     충남 홍성군 홍성읍 월산리

평남 성천군 삼덕면 운봉리

     평북 귀성군 노동면 청룡동

평북 영변군 고성면 사오리

     평북 초산군 초산면 사기덕동

평북 창성군 남창면 낙수동

     평북 삭주군 양산면 원풍동

 



2005.08.27.

출처 : 저 산길 끝에는 옛님의 숨결
글쓴이 : 선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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