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영주시

[스크랩] 영주 / 흑석사

임병기(선과) 2008. 6. 6. 0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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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읍내에서 봉화 방향으로 길을 옮겨 이른바 의상 대사가 부석사 창건전 세운 것으로 알려진 5부석

(초암사,비로사,성혈사,축서사,흑석사)의 하나로 알려진 흑석사에 도착했다.

"흑석사는 임진왜란 때에 소실되어 폐찰로 내려오다가 8.15광복 후 소백산 일대 소개령에 의하여 순흥 초암사에 계시던 김상호 스님에 의하여 초암사 재목을 옮겨와 중창된 것이다".

흑석사란 이름의 유래는 절 가까운 마을 이름을 흑석이라 부른데서 연유하였다고 전해 지는데, 마을 뒷편 산자락에 검은 빛깔의 커다란 바위가 있는데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흑석사의 첫느낌은 무척 빈 듯한 느낌인데도, 아늑함을 동시에 주는 것은 왜일까? 그것은 진입 공간이 우측 산자락의 석조여래좌상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장치로 볼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석조여래가 본래부터 이자리에 계셨다는 전제하에 성립되는 가설이다.

 

독서 삼매에 빠져 흘깃 눈 한번 마주치는 스님에게 인사를 드린 후 극락전에  앉아 계시는 아미타 목조 불상을 바라 보았다. 전란을 피해 법천사,초암사를 거쳐 이곳에 모셔진 아마타불의 복장에서 법신 사리와 유물에 의해 조선 세조 4년(1458)에 조성된  것으로 알려진 목조 불상이다.


목조아미타좌상/문화재청


복장유물에서 명확한 기년이 확인되었고, 다수의 전적과 복장물이 함께 출토되었다. "불상은 계란형의 좁고 살이 빠진 상호에 전체 불신표현도 아담하고 다소 세장한감이 있어 고려 후기의 화려하고 우아한 불상과는 차이를 보인다. 머리는 나발이 뚜렷하고 중간계주와 정상계주가 있으며 수인은 아미타중생인을 하였다."


"옷주름은 신체 표현에 비해서는 높고 큰 편이나 유연하고, 세장한 신체에 동감을 주고 있다. 상체에 비해 하체는 좀더 살이 오른 편이다. 승각기는 수평의 띠처럼 끊어지게 처리되었고 그 아래로 매듭이 처져내렸다. 왼쪽 팔굽에도 Ω형의 겹친 표현이 있으나 고려후기의 불상이 새롭게 변한 새로운 양식의 불상이라 할 수 있다."

 

극락전 앞에는 불상의 대좌가 분명한 석조부재에 석탑 몸돌과 옥개석을 올려 놓아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그냥 그대로 두는 것이 차라리 더 좋을텐데 양복위에 두루마기를 걸친 것과 뭐가 다르랴?

범종각 전각 뒤에 버려진(?) 광배와 조화를 이룰 수 있는 결코 화려하고 장대한 석불이 아니라도 석불좌상을 모셨으면 한다.

 

                                                           복장 유물/문화재청


"확인된 복장물은 『아미타삼존복장기』등 7종, 불상조성권선문, 『불설대보부모사중경목판본』『백지묵서불조삼경합부』『금니묘법연화경권이변상도』『감지은니묘법연화경』3권 등의 전적과 보자기, 번 등의 직물류, 복장용의 사리, 칠약, 오곡 등이다. 불상 좌우에 협시상을 새로 봉안하고 목불상의 광배와 대좌도 후보하였다."


 


석조여래좌상/문화재청

 

몇개의 계단을 올라서면 꽃미남, 청년 부처님이 산아래를 향해 미소를 머금고 계신다. 약간의 손상을 입은 코를 제외하고는 완벽(?)해보이며, 삼도가 뚜렸하나 삼국통일 후 당당한 어깨에 비해 힘이 줄어든 항마촉지의 오른손, 왼손에는 약합을 들고 있어 약사여래불로 보인다.

 

자연 암반이 보개처럼 자리하고, 대좌가 없는 석조여래 뒤에는 광배 대신 기막힌 삼존불이 새겨져 있는데, 본존불은 가슴 이하, 협시불은 목이하를 생략해버려 그 이유가 무척이나 궁금했다. 물론 본존 약사여래불을 고려한 배치로도 보이기도 하다.

 

한참이나 시간이 지났음에도 산아래 스님은 여전히 독서삼매에 젖어 있고, 미련한 답사객은 땀에 젖어 누구를 향한, 무엇을 바라는 것조차 모르는 채 절을 했다.

 

2005.08.27

♬~Willie Nelson - Always On My Mind
출처 : 저 산길 끝에는 옛님의 숨결
글쓴이 : 선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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