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선국사에 의해 풍수가 도입되기 전부터 자생풍수가 있었다고 최창조 교수는 일관되게 주장하지만 꼭 풍수라는 용어이전에 사람들의 믿음 즉, 대자연에 비해 나약한 인간의 존재, 현세의 질곡된 삶에대한 위안을 궁구하려는 그 모든 행위도 일종의 비보로 보면 무리일까?
선사시대의 암각화의 성기,신라토우에 보이는 성기(물론 성기는 강한 권력의 상징,다산, 기자 풍요를 상징하기도 한다)감은사지 기단의 태극문양, 선덕여왕의 지기삼조의 하나인 여근형국의 여근곡의 일화를 미루어 보아 음양오행,자생풍수의 단초를 추론가능할 것이고,도선 이후 고려의 통치이념이 된 훈요십조, 조선조 이중환의 택리지,한말의 대원군은 물론 오늘날 까지 전해오는 풍수의 주된 맥이 형국론이며,음양지맥 즉 남녀성기와 관련된 지세도 그 하나인 것이다.
조선조 영남유생들의 과거길에 피해가는 곳이 경주의 여근곡과,김천의 추풍령(추풍낙엽처럼 낙방한다는 의미로 해석),여성 성기에 해당하는 지세,마을이었다고 하니 깊은 뿌리를 확인할 수 있다. 우리민속에서도 남성성기는 장승과 더불어 액막이,잡귀축출,풍농,풍어,사찰,동리,고을수호·풍수비보염승,기자의 기능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하지만, 음양지맥과 관련된 대부분의 형국은 음양의 조화 보다는, 강한 여자의 기운으로,음탕한 일이 발생한다는 것으로,유교 사상에서 나온 성차별적 지리감응론으로 보아도 크게 틀리지는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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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곡 석우리의 여근형국은 미혼의 총각이 아무리 보아도 안 보인다며 자꾸만 질문을 하는 것처럼 안강의 여근형국에 비해 뚜렷하진 않다. 이몽일 교수님은 여근곡과 조화를 이룬 반대편 들판으로 안내했지만 묘자리도 비보책으로 조성되었다는 신도비도 없다.
고려 개국공신 신숭겸의 후손인 평산 신씨 집안의 묘로 집안에 이어지는 흉사,내분의 방책으로 노스님이 지목한 곳에 신도비를 세우니 그곳이 바로 남성의 귀두부분에 해당하는 자리이며,이로인해 양기누설이 방지되었는지 여성음기가 차단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후손들에게는 심리적으로 위안이 되었을 것이다.
현재 신도비가 사라진 이유가 뭘까?
이몽일 교수님은 중앙고속도,구안국도 확장공사로 인해 음양지세의 맥이 완전히 끊겨, 후손들이 이장을 하면서 신도비도 옮겨 갔다고 짐작하신다.
국토의 허하거나, 강한지세를 보완하여 완전한 땅을 도모하려는 것이 도선국사가 이땅에 풍수를 도입한 큰 이유인데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분별없는 행위는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앗아가 버린다.
"예전에 석우리 마을 앞을 나지막히 아름답게 두르고 있었던 남근지맥이 잘린 부분이 마을에서 보이지 않도록 하루빨리 적당한 장소에 숲이라도 조성했으면 하는 바람이다"라는 교수님의 말씀이 아니라도 자연의 생명력을 앗아가면 우리의 생명도 빼앗긴다는 사실을 잘 알지만, 오늘도 계속되는 '개발과 보존'의 극한상황으로 대치되는 현상은 언제쯤 두손을 마주 잡고 어깨춤을 출 수 있을지......
2005.0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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