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도/담양군

[스크랩] 가사문학권의 정자,원림 / 광주 취가정,환벽당

임병기(선과) 2008. 6. 6. 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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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가정(醉歌亭)


적어도 광주 정신의 원류를 찾아보려면 시작점이라 할 수 있는 소쇄원을 먼저 둘러보거나 식영정을 먼저 둘러보건 간에 이곳의 의미를 알고자 하는 사람은 반드시 보아야 할 곳이다. 소쇄원과 식영정의 중간에 자리잡아 멀다고 생각되는 길을 절반으로 줄여주는 곳이 바로 이곳 취가정이다.

취가정은 광주의 상징길인 충장로로 이름지게 한 장본인인 충장공 김덕령 장군을 위한 정자이다. 호남의 의혼(義魂)을 말할 때 반드시 거명되는 김덕령 장군은 바로 이곳 무등산 자락 석저마을이란 곳에서 태어났으며, 국난에 빠진 민족을 구하기 위해 의병장이 되신 위대한 장군이셨다.

소쇄원에서 나와 취가정으로 가는 길에 뒤돌아 서서 소쇄원을 품고 있는 산을 바라보아야 한다. 고산(鼓山)이라고 불리는 그 산의 8부 능선에 우뚝 솟은 바위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앞서 소쇄원에서 이야기했듯이 의와 충을 배우고 익히는 장소인 소쇄원의 의지를 말하여 주듯이 고산에는 두 사람 정도가 들어갈 수 있는 고암굴이 있다.

고산을 바라보고 나서 무등산 정상 쪽을 바라보면, 이제는 무등산이 보통의 산으로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무등산 자락을 타고 쭉 아래의 산으로 내려오면 과수원과 무덤으로 된 산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지역 사람들은 닭뫼(닭산)라고 부르는 산이다. 여기에서 왜 닭산이라 부르는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지네와 닭은 본시 상극(相剋)이라 한다. 그렇다면 소쇄원의 지네 형국을 견제하기 위하여 닭뫼라고 이름한 것이 아닐까 추측해 본다.

소쇄원을 뒤로하고 식영정 쪽으로 발길을 옮기다 보면 두 갈래의 내(川)가 만나는 곳을 볼 수 있다. 이곳이 바로 삼사계이다. 소쇄원의 물길이 여기로 모여져 삼사계라고 칭했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이사계로 남아 있다.

조금 더 내려오면 가사문학관을 볼 수 있다. 바로 그 가사문학관 넘어 보이는 산을 문필봉이라 칭하고 있다. 붓끝처럼 생긴 산이라 하여 문필봉(文筆峰)이라 하는데 그 산의 모습은 늦은 밤 달빛 아래에서 보면 마치 여인의 젖가슴 같게 보인다. 그 산 아래 마을이 지실마을이다.

취가정에 들어서서 제일 먼저 할 일은 김덕령 장군을 위한 묵념을 하고 무등산을 바라보는 일이다. 누대처럼 서 있는 동산 위에 지어진 정자, 취가정. 취가정의 역사는 이쪽 시가문화권 건물 중에서 제일 나중에 만들어진 정자이다.

김덕령(金德齡: 1568~1596) 장군은 의병장이 되어 29세의 나이에 세상을 하직하였으니 그 분이 어디 정자를 만들만한 시간적, 정신적 여유라도 어디 있었겠는가? 그러함에도 취가정을 김덕령 장군의 유적으로 여기는 데는 그럴만한 연유가 있다.

그러한 연유를 살펴보면 김덕령 장군은 용맹하기 그지없어 광주와 담양 땅에 온갖 전설을 남겨 두셨다. 우리나라 여느 지역과 마찬가지로 비운의 주인공인 애기장수설화의 원형을 잘 간직하고 있다 힘은 장사이며, 거구이고, 겨드랑이에는 용의 비닐이 있으며, 애마와 활을 쏘아 누가 먼저 당도하였는가에 의해 말의 목을 베었다는 등등의 전설 말이다.

김덕령 장군은 1567년(명종 22년)에 태어나셨다. 그 장소는 창평현 내남면의 석저촌이란 곳이다. 기백과 담력이 빼어난 장군은 환벽당의 주인인 사촌 김윤제에게서 공부를 시작하였다. 장군이 25세가 되던 해에 임진왜란이 일어나니 장군은 그의 형 덕홍과 함께 담양에서 창의(倡義)하여 전주까지 진격하였다.

하지만 전란 중에 장군의 어머니의 병세가 악화되어 형이 장군에게 노모를 봉양하라 하여 집으로 귀가하였고 잠시 후 노모가 돌아가셨다. 그의 형인 덕홍도 금산전투에서 세상을 떠났다. 장군은 상중(喪中)임에도 불구하고 병사들을 다시 모아 왜적의 호남지방 진출을 막아냈으며 그의 명성은 왜적들에게 가장 무서운 존재로 각인되었다.

하지만 이를 시기하는 무리들이 있었으니 충청병사 이시언과 경상우병사 김응서 였다. 그들은 이몽학이 난을 일으키자 장군이 그와 내통하여 모반을 획책하였다고 하여 옥(獄)으로 내몰았다. 장군은 옥에서 억울하게 곤형(棍刑: 몽둥이로 맞는 형벌)에 처해져 돌아가시고 말았다. 그 해가 장군의 나이 29세였던 1596년이었다.

이렇게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돌아가신 장군을 신원(伸寃)시킨 것은 현종 2년인 1661년에 되었고, 신원된 다음 병조판서로 추증되었다.
이러한 장군의 아픔을 고스란히 대변한 시가 있으니 김덕령 장군이 석주 권필(石州 權 : 1569~1612)란 학자의 꿈에 등장하여 읆었다는 취시가(醉詩歌)이다. 그 시의 내용은 다음과 같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술취해서 부른 노래

듣는 이 아무도 없구나

꽃과 달에 취하면 무엇하리

공훈을 세운들 무엇하리

공훈을 세우는 것도 뜬구름이요

꽃과 달에 취하는 것도 뜬구름이라

취해서 노래핻 내 마음 누가 알까

다만 긴 칼 부여잡고

임금께 보은할 수 있기만을 원하노라.

이 노래를 들은 석주 권필은 다음과 같이 화답했다고 한다.



장군께서 예전에 칼을 잡으셨으나

장한 뜻이 중도에 꺾이니

이 또한 운명이로고

지하에 계신 영령의 한없는 원한이여

분명 이 노래는 취시가로구나.



결국 장군의 억울함은 후손들에게 억겁처럼 쌓여 있었고, 그의 쌓인 한을 달래기 위해 난실 김만식(蘭室 金晩植)을 비롯한 후손들이 뜻을 모아 고종 27년인 1890년에 취가정이라 하여 이 정자를 짓게 된 것이다.

장군이 젊은 충절의 기개를 갈고 닦았던 무등산을 한 눈에 바라볼 수 있는 언덕 위에 자리한 취가정에서 우리는 호남의 절의와 충에 대한 정신을 다시금 다듬어 보아야 한다. 무등산이 올려다 보이는 취가정의 담백한 정취를, 그리고 비록 장군은 가고 없지만 그의 이름은 아직도 충장로를 광주의 중심으로 여기는 모든이들의 가슴 속에 그리고 호남을 의향이라고 여기는 이 땅 모든 국민들의 가슴에 꽉 차 있을 것이라 믿는다.

아쉽게도 충장공(忠壯公)의 이러한 사연을 지켜주던 정자 앞의 커다란 노송(老松)은 이제 벌거벗은 몸으로 우리를 맞아주지만, 우리의 정신이 바르게 살아있는 한 그 소나무도 또 더 자랄 수 있고 그것도 생기있는 젊음으로 커나갈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취가정을 떠나기 전에 우리는 김덕령 장군의 한과 기개가 들어있는 시를 다시금 되뇌여 보아야 한다.



춘산에 불이 나니 못다 핀 꽃 다 불붙는다.

저 뫼 저 불은 끌 물이 있거니와

이 몸에 내 없는 불 일어나니 끌 물 없어 하노라.



노래 부르는 일일랑 영웅의 할 일이 아니로다.

차라리 칼춤 추며 옥장에서 놀리라.

훗날 병기를 씻고 고향에 돌아가는 날이면

강호에 묻혀 낚시대 드리울 뿐 그밖의 무엇을 구하랴.


환벽당

환벽당(環碧堂)은 지방기념물 제1호로 광주호의 상류 증암천의 언덕 위에 높다랗게 자리잡고 있다.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2칸 골기와 팔작지붕으로 되어있다. 환벽당을 창건한 김윤제(1501~1572년)는 자(字)는 공로(恭老), 호가 사촌(沙村)이며 충효리에서 태어났다. 중종 때 문과에 급제한 후 홍문관 교리를 거쳐 나주 목사로 있다가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고향인 충효리로 돌아왔다.

환벽당은 그가 집 뒤에 지은 별당으로, 그는 이곳에서 자연을 벗삼아 한가로이 지내며 후진을 키웠다. 그러나 이곳은 송강 정철이 27세로 과거에 급제하기까지 10여 년 동안 머물면서 공부했던 곳으로 더 유명해서 송강정, 식영정과 함께 정송강 유적으로 불린다.


어느 더운 여름날, 김윤제는 환벽당에서 낮잠을 자다가 집 아래 용소에서 용이 놀고 있는 꿈을 꾸었다. 그가 잠을 깨고 가 보니 한 소년이 멱을 감고 있었다. 그 소년이 바로 정철이었다. 그때 정철은 식영정 옆 지실마을에 살고 있었는데, 순천 처가에 가 있는 형 정소를 만나러 가던 길에 용소에서 더위를 식히고 있었던 것이다.

김윤제는 이런 인연으로 만난 정철을 환벽당에서 지내게 하면서 공부를 시키고 외손녀 사위로 삼았으며, 관계로 나아갈 때까지 여러 가지 도움을 주었다. 정철은 이곳에서 머물며 기대승, 김인후 등 고명한 학자들에게서 학문을 배우고 임억령에게서 시를 배웠으며 여러 사람을 사귀었다. 그의 「성산별곡」에는 환벽당 주변의 산수경관이 담겨 있다.

환벽당은 비스듬한 비탈에 자연석 축대를 쌓고 지은 남향 건물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로 동쪽 2칸은 마루로 되어 있고, 서쪽 2칸은 방이며 그 앞에 반 칸짜리 툇마루가 깔려 있다. 원래는 정각 형태였는데 후대에 중건할 때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이 집 마루에서는 남쪽의 무등산과 창계천이 잘 내려다보인다.

원래 푸른 대숲에 둘러싸여 있어서 환벽당이라고 했다는데, 지금은 대숲은 없고 집 뒤 비탈과 양쪽 축대 아래의 커다란 배롱나무가 인상적이다. 그 밖에도 집 뒤에는 왕벚나무가 있고, 옆에는 모과나무가 있으며, 또 축대 아래에 느티나무와 벽오동나무 들이 있다.

축대 아래에는 세 단으로 된 화계(花階)가 있고 그 밑에 네모진 연못이 있다. 그것들은 환벽당 마루에서 직접 바라볼 수 없는 위치에 있고 또 그 아래 넓은 터가 김윤제의 집 본체가 있던 곳이니, 별당인 환벽당의 뜰이 아니라 본채에 딸린 후원의 일부였을 것이다.

한편 환벽당 아래 창계천가에는 큰 바위가 하나 있는데, 김윤제와 그의 손님들이 낚시를 즐겼다는 조대(釣臺)로서, 지금은 그 위에 기념비가 서 있다. 그 옆에는 지금도 늙은 소나무들이 기울어져 있어서 조대쌍송(釣臺雙松)을 노래했던 옛사람들의 흥취를 상기시킨다. 여기에서 건너편을 보면 별뫼 봉우리가 삿갓처럼 볼록하게 보인다. 그리고 조대 앞이 바로 정철이 목욕하다가 김윤제를 만났다는 용소이다.

“환벽당(環碧堂)”이라는 현판의 글씨는 우암 송시열이 썼으며, 석천 임억령의 시가 현판에 담겨 있다. 지금은 송강 정철의 후손이 환벽당을 사촌 김윤제의 후손으로부터 사들여 관리하고 있다.

다음의 시는 석천 임억령이 아름다운 주위의 경관을 읊은 것으로 환벽당 벽에 걸려 있으며, 부안 군수 재직 중에 환벽당에 김윤제가 묵는다는 소식을 듣고 면앙 송순이 써 보낸 시 한구절 그리고 환벽당에서 하서 김인후가 읊은 시들이다.

연기의 기운인지 구름까지 겸했는지 烟氣兼雲氣
거문고 소리인지 물소리가 섞이었는지 琴聲雜水聲
석양무렵에 거나하게 취해 돌아오니 夕陽乘醉返
모래길에 대발가마 소리쳐 우네 沙路竹輿鳴
- 석천 임억령



소나무 아래는 맑은 못, 바위 위에 정자 松下澄潭岩上亭
좋다! 맑은 경지 예가 바로 仙庭 十分淸境仙庭
날보고 학들이 놀리고 있지 一來猿鶴爭嘲笑
어찌 속된 꿈을 깨지 못하느나고 其奈人間蒙未醒
- 면양정 송순



푸른물결 맑아 맑아 먼하늘 잠겼는데 綠浪잠碧天
모래톱에 말 세운 적 모르괘라 어느해뇨. 沙邊立馬不知年
다붓 잔디 스스로 한공(韓公)집을 덮었다면 蓬茅自韓公舍
솔과 국화오히려 되령(陶令)밭에 남아있네 松菊猶存陶令田

돌시내 고기새우 굽어 잡게 마련되고 石瀨魚蝦供俯
숲가지 원숭이들 올라 탈걸 잃어쑥려. 林柯猿유失攀綠
어느제나 헌창(軒窓)가에 자리를 맞대고서 何當促席軒窓畔
말 술을 서로 들며 자연에 어울리리. 斗酒相將合自然
- 하서 김인후


2005.03.23

저의 답사기가 아닙니다.
환벽당,취가정 자료는 "광주 북구 지리지" 홈에서 가져 왔습니다.






출처 : 저 산길 끝에는 옛님의 숨결
글쓴이 : 선과 원글보기
메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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