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도/담양군

[스크랩] 가사문학권의 정자,원림 / 담양 명옥헌,송강정

임병기(선과) 2008. 6. 6. 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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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옥헌도 아직 봄내음이 풍기지 않았고,병을 앓고 있는 조경수의 치료가 한창이었다.
송강정 역시 새로난 도로 때문에 눈앞에 두고도 입구를 몰라 헤매이었다. 나의 어줍잖은 답사기보다는 훗날 우리님들이 답사시 참조하도록 자료는 "광주 북구 지리지" 홈에서 가져온 것임을 밝힌다.


명옥헌
: 전남 담양군 고서면 산덕리 513번지, 1652년 - 도 기념물 44호

<명옥헌> 전라남도 지방기념물 제44호로 지정되어 있는 명옥헌(鳴玉軒)은 장계정(藏溪亭)이라는 현판이 걸려있으며, 도장사(道藏祠) 터였기 때문에 도장정(道藏亭)이라고도 한다. 명옥헌(鳴玉軒)이라는 정자 이름은 지금은 수량이 적어 실감은 안 나지만 예전에는 물 흐르는 소리가 옥에 부딪치는 소리 같았다 하여 유래되었다.

이곳을 꾸민 사람은 오명중(1619~1655, 호는 以井)이다. 그의 아버지

오희도(吳希道, 1584~1624 호는 明谷)는 외가가 있 는 이곳에 와 살면서 광해군 시절의 어지러운 세상을 등지고 집 옆에 망재(忘齋)라는 조촐한 서재를 짓고 글을 읽으며 지냈다. 오희도는 인조반정 후에 문과에 급제하여 한림원 기주관이 되었으나 1년만에 천연두를 앓다가 죽고 말았다. 그후 30여 년이 지난 1652년 무렵에 넷째 아들인 오명중이 아버지가 살던 터에 명옥헌을 짓고 아래위 두 곳에 못을 파고 배롱나무를 심었다. 그 후 100여 년이 지나 정자가 퇴락되자 그의 후손 오대경(吳大經)이 다시 중수하였다.

명옥헌 정원은 산기슭을 타고 내리는 계류를 이용한 위 연못과 아래 연못 그리고 아래 연못을 바라볼 수 있도록 북서향으로 앉은 정자로 이루어져 있다. 정자는 정면 3칸, 측면 2칸이며 사방이 마루이고 가운데에 방이 있다. 마루 높이가 다른 정자보다 높은 편인데, 그래서인지 소박한 난간이 둘러져 있다. 그리고 정면에는 2단, 측면과 배면에는 1단의 외벌대 기단을 돌렸다.

동서로 20m, 남북으로 40m되는 네모진 연못 안에 동그란 섬이 있는 아래 연못가에는 묵은 배롱나무가 둘러서 있다. 여름에 이곳을 찾는 사람은 연한 분홍에서 진분홍을 거쳐 보라에 가까운 분홍까지, 보기만 해도 좋은 배롱나무 꽃잔치를 누릴 수 있다. 이 정원은 별도의 담장이 없이 옆으로 벌어진 산자락과 입구의 작은 언덕으로 둘러 싸여 있다. 못의 서남쪽 가에는 늘씬한 소나무 대여섯 그루가 줄지어 서있다. 그 사이로 멀리 무등산이 보인다.

정자건물 서쪽에 있는 위 연못은 자그마한데, 가운데에 바위가 섬처럼 놓여 있다. 이 연못 둔덕에도 역시 배롱나무 고목들이 얽혀 섰다. 산에서 내려오는 계류는 먼저 이 연못을 채우고 다시 흘러서 아래쪽 큰 연못을 채운다. 위 연못 위쪽으로는 암반이 깔려 있고 그중 한 바위에 ‘명옥헌 계축(鳴玉軒 癸丑)’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우암 송시열의 글씨라고 전해진다. 지금 명옥헌에 걸려 있는 현판은 이 글씨를 모각한 것이다

명옥헌 정원은 조선시대의 전통적인 방지중도형(方池中島型)의 지당정(池塘庭)을 도입하였고 지당주변은 수많은 중국 원산종인 자미나무를 심었는데 마치 “도참”의 무릉도원경을 연상케 하는 신선 정원을 전개했다는 것이다. 이 지당은 1979년 하절기에 조사 발굴된 것이다.

본 정원은 조선 시대 중엽의 서민봉산수정원(庶民奉山水庭園) 연구의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송강정
: 전남 담양군 봉산면 고서면 원강리 274번지, 1585년 - 전남지방기념물 1호

<송강정> 송강정(松江亭)은 환벽당, 식영정과 함께 전남지방 기념물 1호로 지정되었으며, 담양군 고서면에 자리하고 있다. 당시 서인 진영에 속했던 송강(松江) 정철(鄭澈, 1536-1593)이 49세 되던 1584년(선조 17년)에 동인의 탄핵을 받아 대사헌직에서 물러난 후 이곳에 와서 정자를 짓고 지내면서 「사미인곡」「속미인곡」을 비롯한 뛰어난 가사와 단가들을 남겼다. 지금의 정자는 1955년에 중수된 것이다.

정자터 아래의 개울이 죽록천이고 부근의 들을 죽록이라 부르므로 죽록정(竹綠亭)이라 하였는데, 이 정자를 후에 정철의 후손들이 중건하면서 송강정이라 불렀다. 지금도 정자 정면에는 송강정이라는 현판과 함께 측면에 죽록정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송강정은 정면 3칸, 측면 3칸이며 가운데에 방이 마련되어 있고 앞과 양옆이 마루로 되어있다. 옆에는 1955년 건립된 사미인곡 시비가 서있고, 뒤편에는 가느다란 대나무들이 얕은 담처럼 둘러져 있다

정철이 담양 창평땅과 인연을 맺은 것은 그의 나이 16세 때였다. 두 누이가 각각 인종의 귀인이자 계림군 유의 부인이었던 덕에 궁중에 출입하며 경원대군(후에 명종)의 동무가 되기도 하는 등, 명문가의 자식으로 유복하게 지내던 그의 어린 시절은 그가 열살 되던 해(명종 즉위년, 1545)에 을사사화가 터지면서 끝이 났다. 계림군은 죽임을 당했고 형은 매를 맞고 귀양 가던 길에 죽었으며 아버지는 함경도 정평으로, 다시 경상도 영일로 유배되었고 정철도 북으로 남으로 아버지를 따라 떠돌았다. 6년 후 유배에서 풀린 그의 아버지는 서울 생활을 정리한 후 온 가족을 이끌고 할아버지의 산소가 있는 창평으로 내려왔다.

창평 생활은 송강의 일생에서 그나마 안정적이고 따스한 시기였다. 열 여섯이 되도록 체계적인 학문을 배울 수 없었던 그는 그후 10여 년 동안 고봉 기대승, 하서 김인후, 송천 양응정, 면앙정 송순 등 호남 사림의 여러 학자에게서 학문을 배웠으며 석천 임억령에게서 시를 배웠다. 또한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과도 사귀었다.

1561년(명종 16년)에 27세로 과거에 급제하면서 시작된 정철의 벼슬살이는 선조 즉위 이후, 시대적 분위기와 더불어 파란만장했다. 수찬·좌랑·종사관 등을 지내다가 40세 때 당쟁에서 밀려 낙향, 43세에 다시 조정에 나가 직제학·승지 등을 지내다가 동인의 탄핵으로 낙향하여 4년간 송강정에 은거, 54세에 우의정이 되어 정여립 사건을 계기로 동인 세력을 철저히 추방, 다음해에 좌의정이 되고 56세에 세자 책봉 문제로 선조의 노여움을 사서 명천에 유배, 57세에 경기·충청·전라체찰사, 이듬해에는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고 다시 동인의 모함을 받아 강화 송정촌에서 쓸쓸히 살다가 58세로 생을 마감하였다.

한편 시문에 있어서 한국 문학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시객이다. 한시, 시조, 가사를 막론하고 시문에 있어서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뛰어나 조선 전체를 통틀어 한 분야에서도 그에 필적할만한 문장가를 찾기 어려울 정도이다.

송강정에서 은거하던 기간동안「사미인곡(思美人曲)」,「속미인곡(續美人曲)」,「성산별곡」등의 가사와 시조들을 썼는데 특히 사미인곡은 이름 그대로 연군지정(戀君之情)을 읊은 노래이며, 그 수법은 한 여인이 남편을 이별하고 사모하는 정을 기탁(寄託)하여 읊은 것이다. 송강 자신의 충정(忠情)을 표현한 노래로 그 완곡한 정서와 세련된 기교가 조선조 시가의 백미라 하겠다.


사 미 인 곡 (思 美 人 曲)

이몸이 생겨난 때 임을 따라 생겼으니
한평생 연분이며 하늘도 모를 일이런가
나 한몸 젊어 있고, 임 한분 날 괴오시니
이 마음 이 사랑은 견줄 데 전혀 없다.

한 평생 원하기를 한데 살자 하였더니
늙어서야 무슨 일로 외오 두고 그리는고

엊그제 임을 뫼셔 仙宮에 올랐더니
그사이 어찌하여 俗界에 내려온고
올 적에 빗은 머리 얽혀진 지 삼년이라

연지분은 있다마는 눌 위하여 곱게 할꼬
마음에 맺힌 근심 첩첩이 쌓여 있어

짓는 것은 한숨이요, 떨어짐은 눈물이라
인생은 끝 있는데, 근심은 끝이 없다.

무심한 세월은 물 흐르듯 하는구나
사철이 때를 알아 가는 듯 다시 오니
듣거니 보거니 감회도 그지없다.

봄바람 건 듯 불어 쌓인 눈을 헤텨 내니
아! 너로구나 나의 말을 들어 보오
내 얼굴이 이 거동이 사랑받게 될까마는
임은 어찌 날 보시고 특별히 여기실 새
나도 임을 믿어 딴 뜻이 전혀 없어
응석이야 아양이야 어지럽게 굴었든지
반기시는 낯빛이 옛과 어찌 다르신고
누워 생각하고 일어 앉아 헤아리니
내 몸의 지은 죄가 산같이 쌓였으니
하늘을 원망하며 사람을 허물하랴
서러워 다시 생각하니 조물의 탓이로다.

그것을랑 생각마오. 맺힌 일이 있나이다.
임을 뫼셔 있어 임을 내 아노니
물같이 묽은 몸이 편하실 적 몇 날인고
봄 추위 여름 더위 어찌하여 지내시며
가을날 겨울날은 누가 또 뫼셨는고
자릿早飯 朝夕식사 전과 같이 올리는가
기나긴 밤에 잠은 어찌 자시는고

임 땅의 소식을 어떻게나 알자 하니
오늘도 저물도다 내일이나 사람 올까
내 마음 둘 데 없다, 어디로 가잔 말꼬

잡거니 밀거니 하여 높은 산에 올라 가니
구름은 고사하고 안개는 무슨 일꼬
산천이 어두우니 해와 달을 어찌 보며
咫尺도 모르거든 천리 먼 길 바라보랴

차라리 물가에 가 뱃길이나 보자 하니
사람은 고사하고 나는 새도 끊어졌다
소湘江 남쪽 가도 추움이 이렇거든
玉樓 높은 곳은 더욱 말해 무엇하리
봄볕을 부쳐 내어 임 계신 데 쐬고저!
띳집에 비친 해를 옥루에 올리고저!
붉은 치미 걷어차고, 푸른 소매 반만 걷어
날 저문데 대를 기대 생각에 잠기도다
짧은 해는 쉽게 지고 긴 밤을 오똑 앉아
청초롱 걸은 곁에 구공후()를 놓아두고
꿈속에나 임을 보려 턱 받고 기댔으니
원앙금도 사늘하다 이밤은 언제 샐꼬

하루도 열두 때 한 달도 서른 날
잠시라도 생각말고 이 근심 잊자 하니
마음에 맺히고 뼛속을 뚫었으니
편작이 열이 온들 이 병을 어찌 하리
아! 내 병이야 이 임의 탓이로다
차라리 죽어져서 범나비나 되오리라
꽃나무 가지마다 앉았다가 가다가
향 묻은 날개로 임의 옷에 읆으리다
임이야 난 줄 모르셔도 나는 임을 따르리라

2005.03.23



출처 : 저 산길 끝에는 옛님의 숨결
글쓴이 : 선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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