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도/담양군

[스크랩] 가사문학권의 정자,원림 / 담양 독수정, 식영정

임병기(선과) 2008. 6. 6. 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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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사일정의 마지막 날은 언제나 그러하듯 마음이 한가롭지 못하고, 담양의 가사문학권에 대한 얕은 지식 때문에 "광주 북구 지리지" 홈에서 가져온 자료이니 답사시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독수정(獨守亭)은 조선 초기에 서은(瑞隱) 전신민(全新民)이 1390년 전후에 세운 것으로서 광주호 주변의 정자들이 16세기 호남 사림의 문화활동의 터전이었던 데 비해 이 정자의 성격은 조금 다르다.

전신민은 고려말(공민왕때) 북도접무사 겸 병마원수를 거쳐 병부상서를 지냈으나 정몽주가 선죽교에서 살해당하고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들어서자 두문동(社門洞) 72현과 함께 두 나라를 섬기지 않을 것을 다짐하여 이곳에 은거하면서 정자를 지었다.


이태조가 등극한 후 여러 차례 불렀으나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두 나라를 섬기지 않을 뜻을 굳히며 ‘伯夷何人 我何人(백이는 누구이며 나는 누구이냐)’하고 충절을 지켰다 한다. 그리고 아침이면 조복을 입고 북쪽 송도를 향하여 곡배(哭拜)했다 한다. 정자의 이름은 이백의 시에 나오는 ‘夷齊是何人 獨守西山餓(백이숙제는 누구인가 홀로 서산에서 절개를 지키다 굶어 죽었네)’에서 따온 것으로 은사(隱士)의 고결한 뜻을 나타낸 것이다.


다음의 시는 독수정을 짓고 나서 전신민이 읊은 시이다.

바람과 티끌은 아득하고 나의 감회는 깊은데 風塵漠漠我思長
어느 깊숙한 곳에 이 늙은 몸을 부쳐둘까. 何處雲林其老蒼
천리밖 강호에서 두 귀밑머리는 흰눈빛이 되고 千里江湖雙雪
백년 가까운 세월에 슬픔만 남아있네 百年天地一悲凉
왕손과 꽃다운 풀은 봄의 한이 서렸고 王孫芳草傷春恨
두견새는 꽃가지에서 달을 보고 우누나. 帝子花枝규月光
바로 이곳에 뼈를 묻히려고 卽此靑山可埋骨
나 혼자 지키며 이 집을 얽었다네. 誓將獨守結爲堂


전신민은 계곡물이 흐르는 남쪽 언덕 위에 정자를 짓고 독수정이라 불렀으며 후원에는 소나무를 심고 앞쪽에는 대나무를 심어 수절을 다짐했다. 독수정은 정면 측면 모두 3칸에 중앙재실이 있는 팔작지붕으로 되어있으며, 원림속에 비교적 잘 보존된 상태로 있어 주위의 울창한 수목과 함께 정취를 자아낸다.

독수정의 좌향은 북향으로 되어있는데 이것은 아침마다 임금님이 계신 북쪽 송도를 향하여 곡배(哭拜)하기 위함이다. 독수정은 자연림 속에 심어져있고 주변의 경관이 매우 아름답다. 진입로에는 중국 원산종인 매화나무와 자미나무 등의 노거수가 심어져 있고 앞뜰에는 자미나무와 매향(梅香) 등의 수목이 심어져 있는데 그 크기로 보아 1890년 중건 당시에 심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조경적인 측면에서 볼 때 인공미가 적은 산수원림에 지나지 않지만 고려 시대에 성행했던 산수원림(山水園林)으로서의 기법을 이 지방에 도입하는데 선구적인 역할을 했었던 것으로 생각되며 무등산 주변의 다른 정자에 영향을 주었으리라 생각된다.

이 원림은 입지적인 면에서는 하나의 산정(山亭)이지만 기능적인 면에서 볼 때는 별서(別墅)로 볼 수 있다. 독수정은 전신민의 13대손이 1891년(고종 28년)에 중건하였던 것을 1913년에 다시 중수공사를 하여 1915년에 완공하였다. 그러던 것을 1971년에 다시 전회종 등이 오래된 건물을 철거하고 재 중수에 착공해 1972년에 준공하였다.


식영정은 송강정, 환벽당과 함께 지방 기념물 제1호로서 동향에 무등산을, 남향에 광주호의 상류를 끼고 담양군 남면 지곡리 별뫼(星山, 뒷산 이름)마을에 위치하고 있으며, 정면 2칸, 측면 2칸으로 정자에는 한 칸 반짜리 방이 있고 너른 마루가 있다.

식영정은 1560년(조선 명종 15년) 서하당 김성원이 스승이며 장인인 석천 임억령을 위해 지었다고 전하며 이때 임억령은 담양 부사(1559~1561년)를 그만두고 이곳에 은거 하면서 김성원, 고경명, 정철 등과 교유했다. 그리하여 이들 네 사람 즉 임억령, 김성원, 고경명, 정철을 식영정 사선(息影亭 四仙)이라고 했으며, 식영정을 사선정(四仙亭)이라고도 불렀다.

임억령의 자는 대춘(大椿), 호는 석천(石川)이다. 어려서 눌재(訥齋) 박상(朴祥)에게서 글을 배웠으며 1516년(중종 11년)에 진사가 되고 1525년에 식년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했다. 1545년(명종 1년) 을사사화가 일어나 그의 아우 백령(百齡)이 소윤(小尹)에 가담하여 대윤(大尹)파의 많은 선비를 추방하자 억령이 글을 보내 경계했으나 듣지 않으므로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왔다.

그러나 다시 기용되어 금산군수로 있었는데 백령이 원종공신(原從功臣)의 녹권(祿券)을 보내오자 그는 산골짜기에 들어가 제문을 지어 고사를 지내고 녹권을 불살라 버렸으며 군수직을 사임하고 해남으로 돌아왔다. 1552년 동승부지, 병조참의 등을 역임하고 강원도 관찰사를 거쳐 1557년 담양부사가 되었으며 1560년에는 김성원이 식영정을 짓고 초청하므로 식영정에 머물면서 도학을 강론하는 한편 시도 가르쳤다.


임억령은 정자 이름을 짓는데도 시인다운 남다름이 있었다. 식영정이란 ‘그림자가 쉬고 있는 정자’라는 뜻으로서, 그가 쓴 「식영정기」에 이런 내용이 있다. “(『장자』에 나온 자기 그림자를 두려워하여 도망치는 사람 이야기를 하고 나서) 그림자는 언제나 본형을 따라다니게 마련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람도 자연법칙의 인과응보의 원리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이다.

그러는 처지에 기뻐할 것이 무엇이 있으며 슬퍼하고 성내고 할 것이 무엇이 있겠느냐, 내가 이 외진 두메로 들어온 것은 꼭 한갓 그림자를 없애려고만 한 것이 아니라 시원하게 바람 타고 조화옹과 함께 어울리어 끝없는 거친 들에서 노니는 것이다. 그러니 식영정이라 이름짓는 것이 좋지 아니하냐"라고 말했다.


“그림자를 내버려두고 그 이전의 경지에서 조화옹(造化翁)과 더불어 노닌다”는 이 유래를 알고 보면 식영정이란 이름은 그저 서정적일 뿐만 아니라 엄청나게 호방하고 무애(無碍)한 경지를 가리키는 이름임을 알 수 있다.


임억령은 성산의 아름다운 풍경을 주제로 식영정 이십영(息影亭二十詠)과 서하당 팔영(八詠)을 비롯하여 수백 수의 시를 지었다.


식영정 이십영에 대해서는 송순은 화답시를 지었으며 고경명, 김성원, 정철은 차운시를 남겼다.
송강(松江)은 이것을 밑바탕으로 하여 전원 가사의 으뜸이 되는 “성산별곡”을 창작하여 송강가사의 산실 노릇을 하였다. 이외에도 식영정을 출입했던 인물들을 보면 면앙정 송순, 사촌 김윤제, 하서 김인후, 고봉 기대승, 소쇄옹 양산보, 옥봉 백광훈, 송익필 등 당대의 명사들이었다.

현재 정각의 뒤뜰에는 큰 나무로 자란 백일홍 10여 그루가 남아있어 옛날의 정취를 되돌아보게 한다. 식영정에서 내려와 왼편 안쪽으로 보이는 부용당은 원래 연못터였던 곳에 새로이 정자를 1972년에 지은 것이고, 그 뒤에는 김성원의 서하당을 새로 복원하였다.

현판에 걸린 송강의 식영잡영십수(息影雜影十首) 중 선유동에는
“그 어느해 해상의 신선이 / 구름 서린 산속에 깃들었던고
발자취 어루만지며 슬퍼하노라 / 하얗게 머리 센 문하의 선비가"

라는 글이 있다.
정송강이 스승이자 식영정의 주인인 석천 임억령을 기리는 글이다. 식영정에 은거하던 스승이 그림자를 거두고 별이 되어 선계로 올라갔다고 식영의 뜻을 옮겨 놓고 있다.
식영정 이십영은 석천 임억령이 성산동 식영정 일대의 절경을 자유롭게 묘사한 시로서, 이것을 모본으로 면앙 송순은 화답시를 지었고, 송강 정철, 서하당 김성원, 제봉 고경명은 차운시를 남겼다. 다음은 석천 임억령의 식영정 이십영과 정철, 고경명 등의 시이다.


석천 임억령의 식영정 이십영과 정철, 고경명등의 시보기


성 산 별 곡 (星 山 別 曲)
어떤 지난 손이 星山에 머물면서
棲霞堂 息影亭의 주인아 내 말 듣소
인간 세상에 좋은 일 많건마는
어찌 한 강산을 그처럼 낫게 여겨
적막한 산중에 들고 아니 나시는고

솔뿌리를 다시 쓸고 대자리를 살펴 보아
잠깐 동안 올라 앉아 주위를 다시 보니
하늘가에 떴는 구름 瑞石臺를 집을 삼아
나가는 듯 드는 모습 주인과 어떠한고
푸른 시내 흰 물결이 정자 앞을 둘렀으니
天孫의 비단폭을 그 뉘가 베어 내어
이엇는 듯 펼쳐 놓은 듯 야단스런 경치로다.
산중에 달력 없어 계절을 모르더니
눈앞의 풍경이 사철 따라 전개되니
듣고 보는 일이 모두 다 仙界로다.

梅窓 아침볕에 향기에 잠을 깨니
산 늙은이 할 일이 곧 없지도 아니하다.
울타리 밑 양지쪽에 오이씨를 뿌려 두고
김매거니 북돋우거니 비온 김에 가꿔 내니
靑門의 옛날 일이 지금도 있다 할다
짚신을 죄어 신고 대 지팡이 흩어 짚으니
桃花핀 시냇길이 芳草洲에 連했도다
맑게 닦은 거울 속에 그린 돌병풍
그림자를 벗삼고 절로 함계 가니

무릉도원 어디냐 여기가 거기로다
蘇軾의 赤壁賦는 秋七月이 좋다 하되
팔월 보름밤을 모두 어찌 기리는고
잔 구름도 흩어지고 물결이 잔잔한데
하늘에 돋은 달이 솔 위에 올랐으니
달 잡다가 물에 빠진 李白 옛일 壯觀일다.

空山에 쌓인 납엽 걷어 치듯 부는 북풍
떼구름 거느리고 눈조차 몰아 오니
조물주가 일을 즐겨 옥으로 꽃을 지어
천만 樹林들을 잘도 꾸며 내었구나
앞 여울 가리워 얼어 외나무 다리 놓였는데
막대 멘 늙은 중이 어느 절로 간단 말꼬
산 늙은이의 이 부귀를 남더러 떠들지 마오
옥 같은 窟 숨은 세계를 찾을 이 있을세라

산중에 벗이 없어 서책을 쌓아 두고
萬古의 인물들을 거슬러 세어보니
성현도 많거니와 호걸도 많고 많다
하느님이 태어내시매 어찌 무심할까마는
時運과 興亡盛衰 어찌 그리 數 없은고
모를 일도 많거니와 애달음도 그지없다.
부처 같은 巢父·許由 귀는 어찌 씻었던고
표주박을 팽개친 후 志操行狀 더욱 높다

人心이 얼굴 같아 볼수록 새롭거늘
세상사는 구름이라 험하기도 험하구나
엊그제 빚은 술이 얼마나 익었느냐
잡거니 권하거니 술잔 실컷 기울이니
마음에 맺힌 근심 다소나마 후련하다

거문고 줄을 얹어 風八松을 타잤구나
손인지 주인인지 모두 잊어버렸도다
長空에 떴는 학이 이 골의 진짜 신선이라
이전에 달 밑에서 혹시나 만나신가
손님이 이르기를 그대 곧 주인이
진짜 신선인가 하노라


☞ 성산별곡(星山別曲) : 성산별곡은 송강 정철이 식영정이십영(息影亭二十詠)을 모본으로 삼아 성산(별뫼)일대의 풍경을 묘사한 가사이다.


2005.3.23



출처 : 저 산길 끝에는 옛님의 숨결
글쓴이 : 선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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