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도/담양군

[스크랩] 별서정원의 백미 / 담양 소쇄원

임병기(선과) 2008. 6. 6. 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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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인들 변하지 않는 곳이 있겠냐만, 소쇄원도 주차비와 입구에서 입장료를 징수하는 등 많은 참배객의 내방을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건축,조경,미술,유교,가사문학 등 다양한 장르의 답사기가 넘쳐나기에 나의 답사기는 의미가 없을 것 같아 자료는"광주 북구 지리지"에서 옮겨 왔다.
다만 소쇄원 설명이 듣고프면 "공휴일 오전 11~12시"를 택하여 방문하면 되며, 다음 카페"소쇄원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도 있음을 첨언합니다.


소쇄원
: 전남 담양군 남면 지곡리 123번지, 1543년경 - 사적 제304호(국가 지정 문화재)

소쇄원은 중종 때 사람인 양산보(梁山甫 : 1503~1557)의 별서정원이다. 별서란 살림집에서 떨어져 산수가 좋은 곳에 마련된 주거공간을 말하며, 이곳에 정자와 더불어 조성되는 정원을 별서정원이라 한다.
양산보는 양사원의 세 아들 가운데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자는 언진(彦鎭), 호는 소쇄옹(瀟灑翁)이다. 소쇄원이 있는 담양군 남면 지곡리는 창암촌이라고도 불렸는데 창암(蒼岩)은 양사원의 호였다. 고향에서 지내던 양산보는 15세 때 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가서 조광조 밑에서 학문을 닦았다.

17세 되던 1519년(중종 14년)에는 당시 대사헌으로 있던 조광조가 신진 사류를 등용하고자 실시했던 현량과에 급제했으나 벼슬을 받지는 못했다. 바로 그해에 기묘사화가 일어나, 조광조는 능주로 유배되었다가 결국 사약을 받고 죽었다. 스승을 따라 능주로 갔던 양산보는 고향으로 돌아왔고 그때부터 55세로 죽을 때까지 고향의 자연에 묻혀 처사(處士)로 지냈다.

소쇄원은 양산보가 30대부터 짓기 시작하여 40대에 완성한 것으로 보이며, 이대 면앙정을 지었던 송순과 김인후가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소쇄(瀟灑)란 공덕장(孔德璋)의 북산이문(北山移文)에 나오는 말로 ‘깨끗하고 시원하다’는 말이다. 양산보는 그 뜻을 따서 정원의 이름을 붙이고 그 주인이라는 뜻에서 자기의 호를 소쇄옹이라고 했다.

1755년(영조 31년)에 제작된 「소쇄원도」목판은 소쇄원의 원래 모습을 알 수 있게 할 뿐 아니라 조선시대 정원을 연구하는 데도 좋은 자료가 되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소쇄원도」목판은 도둑맞아 지금은 볼 수가 없다. 소쇄원 안의 광풍각 방 뒷벽에 「소쇄원도」목판을 복사한 그림이 걸려 있다.

소쇄원의 면적은 4,060㎡로써 자연스러운 한국 조원의 특색을 잘 간직하고 있다. 소쇄원은 멀리 남쪽으로 무등산을 바라보며 장원봉과 까치봉을 잇는 산줄기를 뒤에 업고, 남쪽으로 슬슬 흘러내린 산비탈에 자리잡았다. 이 정원을 이룰 당시 창암촌은 제주 양씨들의 씨족 마을이었으니 소쇄원은 후원적 성격을 띠었다. 뒤편 산에서 흘러내린 물은 폭포와 작은 소를 만들며 정원 가운데를 가로지른 후 대숲으로 빠져나가 창계천으로 합류한다.

계곡물 양쪽 비탈에 축대를 쌓아 꽃계단을 만들고 정자들을 올렸으며, 동쪽과 북쪽, 서쪽 일부에 직선 담을 두르고 남쪽은 틔워놓았다. 들어서면서 바로 보이는 짚으로 이은 정자가 대봉대이고 왼쪽으로 계곡 건너에 있는 것이 광풍각, 그 뒤로 서너 단 높은 곳에 있는 것이 제월당이다.


대봉대는 봉황을 기다리는 곳, 즉 봉황처럼 소중한 손님을 기다려 맞는다는 다정한 뜻이 담겨있다. 대봉대 아래에는 자그만 연못이 있고 입구 쪽으로 좀 떨어진 곳에 조금 더 큰 연못이 있다. 나무 속을 파낸 홈대와 도랑을 타고 온 계곡물은 먼저 작은 못을 채우고, 그 물이 넘치면 다시 도랑을 따라 큰 못으로 흘러들게 되어 있다.

큰 못에서도 넘쳐난 물은 돌로 만든 수구를 통해 계곡으로 떨어진다. 1755년(영조 31년)에 만들어진 「소쇄원도」목판에는 두 못에 물고기가 놀고 못가에 물풀이 자란 모습이 그려져 있다. 두 못을 연결하는 도랑 중간에는 물레방아가 있어서 계곡으로 물을 날리며 시원한 물소리를 냈다.


대봉대를 지나 안으로 들어가는 동안 오른쪽으로 이어지는 동쪽 담에는 ‘애양단(愛陽壇)’이라고 새겨진 판이 박혀 있는데, 이 부근은 유난히 볕이 바르다. 애양단을 지나면서 담은 ‘ㄱ’자로 꺾인다. 그 담에 ‘오곡문(五曲門)’이라 새긴 판이 박혀 있는데, 그 옆에는 담 밑에 구멍이 뚫려서 그리로 물이 흘러들도록 되어 있다.

돌을 섞어 흙담을 쌓고 기와를 얹으며 쭉 이어 오다가 이곳에 이르러 넓적한 바위를 걸쳐 다리를 놓은 후 그 위에 담을 올린 것이다. 오곡문이란 담 아래 터진 구멍으로 흘러든 물이 암반 위에서 다섯 굽이를 이룬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원래는 수구 옆에 일각문이 있었으나 지금은 그냥 트여 있다.

소쇄원에 들어온 사람은 이곳에서 외나무다리로 계류를 건너게 된다. 다리를 건너기 직전에 구부정한 소나무가 있고 아래로 물을 바라보기 딱 좋을 위치에 걸터앉을 만한 바위도 있다. 담 밑으로 들어온 물은 굽이를 이루고 폭포를 이루며 정원 가운데로 흘러가고, 그 가운데 일부는 나무 홈대에 이끌려 대봉대 아래 연못으로 간다. 다리를 건너면 두 단으로 된 꽃계단(花階)을 만난다.

이 같은 단은 보통 비탈의 침식을 막을 겸 쌓아서 바라 보고 즐길 수 있도록 꽃나무를 심어 꾸미는데, 소쇄원에서는 여기에 매화를 심고 매대(梅臺)라 불렀다. 매대 뒤의 담에는 ‘소쇄처사 양공지려(瀟灑處士 梁公之廬, 소쇄처사 양공의 조촐한 집)’라는 송시열 글씨의 글자판이 박혀 있다. 매대 앞에서 위쪽으로 올라가면 제월당이 있고 아래쪽으로 가면 옛적 선비들이 앉아 즐기던 너럭바위를 지나 광풍각이 있다


제월당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왼쪽에 치우쳐서 한 칸 방이 있고, 나머지 두칸은 마루로 트여 있으며, 마루 뒷벽에 활짝 열 수 있는 문이 달려 있다. 이 마루에 앉아 밖을 내다보면 시선이 광풍각 지붕 너머로 쭉 뻗다가 앞산에 가 닿는다.

제월당이 주인의 사생활적인 공간이라면 광풍각은 사랑방 격으로 소쇄원의 풍광을 맘껏 누릴 수 있는 중심 공간이다. 제월당과 광풍각 사이에는 공간을 나누어 주는 얕은 담과 작은 문이 있다. 광풍각에서는 주로 물의 흐름과 폭포, 바위에 부딪치는 물방울, 맞은편에 있던 물레방아의 정취와 물소리 등 수경을 즐기도록 되어 잇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집인데, 가운데 한 칸에 방을 들였고 빙 둘러 가며 마루를 깔았다. 광풍각과 제월당의 현판 글씨는 우암 송시열이 쓴 것이다.


또한 양산보는 도연명을 좋아했을 뿐 아니라 자기 스승 조광조를 따라서 주돈이를 좋아했다. 제월당이니, 광풍각이니 하는 이름도 송나라 사람 황정견이 주돈의 사람됨을 가리켜 “가슴에 품은 뜻의 밝고 맑음이 마치 비 갠 뒤 볕이 나며 부는 바람과 같고 맑은 날의 달빛과 같다(胸懷灑落如光風霽月)”고 한데서 따온 것이다.


이곳에는 고경명, 김인후, 송순, 정철, 김성원, 기대승, 백광훈, 송시열 등 당대의 이름 있는 문인과 선비들이 드나들었다. 그들이 남긴 여러 시문 가운데 고경명의 「유서석록(遊瑞石錄)」과 앞에서 나온 김인후의 「소쇄원 사십팔영」에 소쇄원의 옛 모습이 잘 묘사되어 있다. 그들은 소쇄원 안의 바위 하나, 물굽이 하나에도 따로 이름을 붙이고 그것이 주는 감흥을 즐겼다.

소쇄원 정원은 자연 그대로를 살리면서 꼭 필요한 부분에 적절하게 인공을 가하였다. 그 안에 들어가 이곳 저곳을 보면 함부로 손대는 것을 아꼈을 뿐이지 어디 한 군데도 배려하지 않은 구석이 없음을 느끼게 된다.
계곡을 중심으로 한 바퀴 돌면서 자연 경관을 고루 경험하도록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동선, 적당히 걷다가 멈출만한 곳이면 어김없이 나타나는 눈 줄 곳, 앉을 곳 등 모든 것이 세심하고 철저하게 배려되어 있는 것이다. 자연과 인공의 행복한 조화란 엉성한 자연존중이 아니라 오히려 이러한 완벽한 배려와 애정 속에 인공을 가함으로써 오는 자연과의 동화일 것이다.


양산보는 “절대로 남에게 팔지 말 것이며 하나라도 상함이 없게 할 것이며 어리석은 후손에게는 물려주지도 말라”고 유언하였다. 그 덕에 오늘날 조선 시대 민간 정원의 백미를 비교적 원형대로 볼 수 있게 되었다.

2005.03.23

출처 : 저 산길 끝에는 옛님의 숨결
글쓴이 : 선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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