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남도/밀양시

[스크랩] 밀양 / 표충사...효봉선사를 그리며

임병기(선과) 2008. 6. 5. 1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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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밀양읍에서 구천면으로 향하는 도로변에는 표충사 근처에 개발되는 석산을 반대하는
현수막이 비 오는 오늘도 천성산을 관통하는 고속철을 반대하며 10만인 소송인단을
모집하기위해 단식중인 지율스님을 떠올리게 만들어 나를 미치게 한다.
가자!
그만 가자!
스님의 단식을 멈추기 위해 첫차로 내려오신 속가의 어머님 사진
그 사진이 자꾸만 차창에 어려 마음이 무겁다.
늦가을비에 일주문 비석거리 수충루로 이어지는 대리석 포도에 쌓인 낙엽을 바라보며
지난 추억에 젖어 커피 한 모금을 삼키며 벤치에 앉아있는 몰골이 로맨틱하긴 커녕
처연스럽고 궁상맞게 느껴져 마치 군위 인각사 산신각처럼 생긴 용도를 알 수 없는
전각으로 다가서 민간의 혼을 절에 모시기전 속세의 풍진을 머물게 하는 송광사의
척주각, 세월각 같은 용도려니 여기고 표충사 가람배치의 한 영역인 서원으로 향한다.
가람각 
어느 책에는 중생들의 영혼을 사찰에 모시기 전 혼을 모셨던 전각이라는 설명이 되어
있으나, 일천한 이놈의 상식으로는 통도사의 가람각처럼 가람신을 모신 전각이라는
생각을 가지며, 다른 곳에서 옮겨왔더라도 사찰에 서원과 사당이 공존하는 것은 유례가
없는 서원 기둥에 기대서 잡생각에 젖어 본다.
즉, 소수서원이 숙수사 절터에, 원주 법천사지도 서원에 자리를 빼앗기지 않았던가?
사찰과 부도 석탑 등이 오늘과 같이 상처를 입은 것은 조선의 덜 떨어진 사이비 유생들
이 조상의 묘를 명당에 모시기 위해서 행한 망나니짓의 상흔이지 않은가?
유교와 불교 아니 종교적 갈등을 보다듬고 사찰에 서원 불사를 한 스님의 발원에 깊이
고개 숙이며 사당으로 다가선다.
서원의 전형이라는 전학후묘에 벗어날 때도 되었건만 아직도 얶매여 눈을 굴려보니
많이 동떨어진 것이 보이지만 전면에 퇴주를 세우고 한 칸 뒤로 물러난 사당이 이채
로워 박물관에는 들어 갈 생각도 않고 비가 오거나 말거나 맴돌다 효봉선사의 부도를
친견하러 사찰을 잠시 벗어난다.
단촐하다.
하지만 그 무게에 감히 고개들 수 없는 엄숙함이 배여 나오는 바위위에 얹혀 있는 
자연석으로 조성된 부도를 향해 심연에서 우러나오는 예를 갖추며 예전에 읽었던
효봉선사의 일대기를 더듬어 본다.
[효봉선사(曉峰禪師)는 1888년 5월 28일 평안남도 양덕군 쌍룡면 반석리 금성동(錦城洞)에서 아버지 
수안(遂安) 이씨 병억(炳億)과 어머니 김씨의 사이에서 5형제 중 3남으로 태어나셨습니다. 
평양고보를 졸업한 뒤 일본의 와세다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한 스님은 스물 여섯에 졸업한 후 서른 여섯이
될 때까지 10년간(1913∼1923) 서울과 함흥 등지의 지방법원으로, 평양의 고등법원에서 법관으로 종사하셨습니다. 
1923년 스님의 나이 서른 여섯 살 때 최초로 내린 사형선고 앞에서 몇날 몇밤을 뜬눈으로 지새며 
자기자신의 존재를 회의하고 인간사회의 구조에 대해서 고뇌하게 되었습니다. 
'이 세상은 내가 살 곳이 아니다. 내가 갈 길은 따로 있을 것이다.'라는 
결심을 하고 집을 나와 유랑 생활을 하다가 1925년 금강산 유점사에 들러 가르침을 받을 만한 스승을 
찾으니 신계사 보운암(普雲庵)에 석두(石頭)스님이 계시다는 소리를 듣고 스님을 찾아가게 됩니다. 
이날로 삭발, 석두스님으로부터 사미계(五戒)를 받고 원명(元明)이라는 법명으로 사셨습니다. 
서른 여섯에 오계를 받고 스님이 된다는 것은 불가에서는 '늦깍이'라고 합니다. 
스님은 남보다 늦게 출가한 사실을 염두에 두고, 남들이 쉴 때도 쉬지 않고 잠잘 시간에도 잠자지 
않으면서 분발, 깨달음을 위한 좌선(坐禪)에만 전념했습니다. 
보운암에서 그해 여름과 겨울을 지내고 나서 이듬해 여름에는 선지식을 친견하기 위해 행각의 길에 나서게 됩니다.
그러나 불가의 수행의 일은 남의 말에 팔릴 것이 아니라, 내자신이 스스로 참구(參究)하면서 실답게 
깨달아야 하는 것임을 확신하고 금강산으로 돌아와 정진하게 됩니다.
1930년 늦은 봄 스님의 나이 마흔 세 살 때 깨닫기 전에는 죽는 한이 있더라도 토굴 밖으로 
나오지 않으리라는맹세를 하고 토굴에 들어간 지 1년 반만에 드디어 토굴의 벽이 
무너지고 필사적인 정진 끝에 깨달음을 얻은 바 있었던 것입니다. 
스님의 마흔 다섯되던 1932년 4월 초파일에 유점사에서 동선(東宣)화상을 계사로 구족계와 보살계를 받으셨습니다.
스님이 설악산의 봉정암, 오대산의 상원사 등의 청정한 선원에서 한 철씩 정진하다가 1937년 스님의 나이 
쉰살 되던 해, 운수의 발길이 마침내 조계산 송광사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스님은 선원(禪院)인 
삼일암(三日庵)에서 조실로 10년을 머무시면서 수많은 후학들의 눈을 밝혀주고 길을 열어 보이셨습니다.
그리고 정혜쌍수(定慧雙修)에 관한 확고한 신구도관을 가지게 되셨습니다. 
8.15 광복으로 일제의 탄압에서 풀려나게 되자 불교계도 인재양성을 절감 해인사에 출가 수행승의 종합수도원인
가야총림(伽倻叢林)을 개원하게 되는데 스님은 방장화상으로 추대되어 조계산을 떠나 가야산으로 가시게 됩니다. 
그 후 여러해가 지나 종정(宗正)으로 추대되시어 팔공산 동화사에 주석, 
후학들을 지도하시다가 건강이 악화되어 거처를 밀양 표충사로 옮기시게 됩니다. 
다음과 같은 열반송을 남기시고 1966년 10월 15일(음력으로 9월 초이틀) 일흔 아홉의 나이를 마치셨습니다 
내가 말한 모든 법 (五說一切法 
그거 다 군더더기 都是早騈拇 
오늘 일을 묻는가. 若間今日事 
달이 일천강에 비치리" 月印於千江)]
2003.11.09
http://cafe.daum.net/moonhawje
출처 : 저 산길 끝에는 옛님의 숨결
글쓴이 : 선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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