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안동시

[스크랩] 안동 / 봉정사

임병기(선과) 2008. 6. 5. 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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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정사 
부석사를 개창한 의상대사가 부석사에서 종이로 만들어 날려보낸 봉황이 내려 앉은 
터에 자리 잡았다는 가람으로 길지 임을 쉽게 알 수 이는 절집으로 느낌 좋은 길이었다. 
이번 답사길은 예전과 달리 학봉 종택을 먼저 들렸지만 내가 즐기는 코스는 대구에서 
국도로 와서 의성 탑리 오층탑, 공룡유적지, 목화 시배지, 왕릉, 수정사, 빙산사지,사촌마을 
고운사,소호헌, 권정생 씨가 사는 조탑동, 안동시내 동부동 신세동, 제비원을 거쳐, 봉정사 
학봉 종택, 병산서원, 하회마을 이었었다. 
봉정사는 정확히 언제 들렸는지 기억도 가물가물하지만 영국 여왕이 참배하기 전이어서 
길도 좁았었고 시골의 한가한 전원 풍경과 비포장 도로의 먼지마져 싫지 않았었는데 
전국 어느 가람이 그러하듯 한 낮의 봉정사 길은 저자거리의 흥청거림과 다를 바 없었고 
변화한 가람을 쉽게 보여주지 않으려는 듯 오늘 하루에 세 번이나 들렸으니 원...... 
*사진/ 봉정사 만세루 누하기둥의 목리

역시 봉정사의 맛은 일주문부터 만세루 앞까지 이어지는 길의 참나무, 소나무의 깊은 묵언의 속삭임, 땀을 씻어주는 청량한 바람에 고마움을 느끼는 순간 마주치는 만세루 누하기둥의 세월의 흐름을 간직한 목리(나뭇 결)가 아닐까? 덤벙주초 그랭이 배흘림 기둥 보다 내 눈엔 풍상을 간직한 사그러질 듯한, 일순간 와르르 무너질 듯한 모습으로 우릴 맞이하는 목리가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외형만 추구하는 뭇 중생들에게 목수는 세상 명리에 집착하지 말라는 강한 암시를 남기기 위해 마음 따라 결 따라 대패질을 하였으리..... 사진/ 만세루에서 바라본 대웅전



누하 진입하여 올라가면 대웅전이 마주하고 있다. 봉정사의 가람배치는 대웅전,극락전이 나란히 일자로 서 있고 요사채인 무량수각, 강당으로 쓰였을 화엄강당이 대웅전 극락전 사이에 있으며, 고금당이 극락전을 중심으로 화엄강당과 마주하고 있다. 봉정사는 건축을 전공하는 사람들에게는 퍽 매력적인 답사지로, 길게는 고구려 시대까지 편년을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지만 그분 들의 숙제로 남기더라도 거의 유례를 찾기 힘든 대웅전의 쪽마루, 화엄강당의 짧은 기둥(대웅전 처마 밑으로 용마루를 내어 주전각인 대웅전을 살리기 위함) 측면의 광창,극락전 바닥의 전돌(삼국 시대는 거의 전돌임, 오늘날 부석사 무량수전, 장곡사 등에 남아 있다) 극락전의 어칸에만 문을 설치하고 협칸은 광창을 낸 것은 고려말의 유형이라 하며 이런 사례는 영천 은혜사 거조암에도 볼 수 있다. 극락전 앞에는 내눈에 고려초의 형식으로 보이는 아담하여 극락전과 잘 어울리는 3층 탑이 서 있고 예전에 주전각이었을 고금당이 사연을 간직한 체 측면으로 도리를 길게 돌출시키고 수없이 되풀이되었을 중수, 지금도 계속되는 보수를 말없이 바라보고 있다. 대웅전 앞마당으로 나오자 나이 많은 참배객을 상대로 대웅전의 건축학적 설명을 하시는 분이 계셔서 슬쩍 귀동냥하였더니 대웅전 용마루 중앙의 파란 기와의 의미를 자랑스럽게 설명하시기를 영국 여왕의 방문을 기념하기 위해 여왕의 사인이 새겨진 기와를 올려놓은 것이라 하며 봉정사는 왕건 공민왕 영국여왕이 다녀가신 사찰이라 자랑이 대단하시다. 기가 막히지 않는가????? 왕건도, 비록 홍건적에 쫒겨 피난 온 공민왕도 중생이기에 가벼운 흔적만 남겨 셨고, 대웅전을 비롯 전각에도 왕의 글씨로 현판을 걸더라도 낙관을 하지 않는 것이 예의인데 용마루 위에 여왕의 사인을 남긴 기와라니...... 누구의 발상인지 난 동의할 수 없고 화가 치민다. 스쳐간 여왕이 수키와를 만들기 위해 공덕을 쌓은 기와쟁이의 신심보다 나을 바가 무엇 있겠는가? 역대의 왕도 부처의 영역을 쉬이 여기지 않거늘 우리 모두가 부처의 맘을 간직한 즉 모두가 부처이기에...... 대웅전 중수 시 발견 된 후불 탱화는 강진 무위사의 탱보다 편년이 더 오래된 조선 초의 금어의 작품이라는 설명도, 관세음 보살과 대세지 보살을 협시불로 모신 대웅전의 주불은 유례가 없는 소조불 이란 설명도(부석사 무량수전의 아미타불도 소조불인줄 잊어신 것 같다) 귀에 쉽게 들어오지 않는다, 자꾸만 용마루의 청색 수키와가 어른거려서...... 더욱 놀라운 설명이 이어진다. 대웅전, 극락전 뒤의 천등산 소나무를 가리키며 나무마져도 신성한 금당에 그늘이 드리우지 않기 위해 산 정상을 향해 굽어져 자라고 있다며 참배객 들에게 확인시켜 주시어 쓴웃음 금할 길 없다. 앞뒤가 맞지 않지 않는가? 영월 청령포의 북쪽을 향한 굽은 소나무는 여기에 비하면 넘 기분 좋은 이야기에 틀림없지 않는가!!! 봉정사 대웅전 내부


대웅전 내부는 고주(높은 기둥)를 세워 불단을 벽면에서 앞으로 설치하여 주불 위로소박한 닫집을 만들고 닫집 천장에는 쌍룡이 왕을 상징하는 다섯 개의 발톱을 드러낸 채 공민왕의 행차를 암시하고 있어 고려 황제의 권위를 무색케 하는 여왕의 수결은 나를 미치게 했다. 예전 보다 맛이 없지만 봉정사에 와서 영산암을 답사하지 않는다면 예전에 시골 쇠전에 가서 국밥만 먹고 탁배기 한 주발 드시지 않는 우리 할배의 맘과 틀린바 없으리... 필름이 소진된 상감님은 영산전 진입공간 계단 스케치에 몰입하여 혼자서 시골 외갓집 같은 느낌의 영산전에 들려 요사 쪽마루에 걸터앉아 건축가들이 절묘한 마당의 이분법적 배치의 역할이라는 마당의 소나무를 바라보지만 쉽게 느낌이 오지 않아 울 동호회의 고건축에 조예가 깊은 님들을 떠올렸다. 봉정사 영산암



과연 얼마나 많은 답사객 들이 영산전의 절묘한 배치를 알 것인가? 아니 그런 의미를 사전에 알고 오는 님들이 있을까?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 최근의 동승의 촬영지로 알려져 조용하던 암자는 극장가를 방불케 하고 있어 주석하시던 스님들을 산 넘어 개목사로 몰아내지 않았을까?. 돌려주자! 청계천 복개를 원상 복귀하듯이 참선 공간은 스님들에게 우리 모두 돌려주자. 문경 봉암사, 은혜사 운부암뿐만 영산암도 사시사철 제자리를 하루바삐 선방으로 자리를 찾아주었으면...... 대웅전 뜰로 돌아 나오니 만세루 용마루 가운데에 석탑의 상륜부를 닮은 알 수 없는 조형물이 보여 조금 전 설명하시던 분께 질문을 올렸더니 정확히는 모른다며 풍수의 정중앙을 나타내는 것이라 말씀하시나, 혹 화순 쌍봉사 대웅전, 속리산 팔상전처럼 전각을 탑으로 여겨 상륜부를 나타낸 것은 아닐지..., 만세루 법고와 목어

이것은 나의 숙제다. 답사 후 의미를 알 수 없는 숙제를 하나 가져오는 것이 얼마나 큰 기쁨인가? 또다시 찾아 볼 것이 있고, 공부해야 할 과제가 있음은 알고 난 후 다시 찾고픈 바램이 강하기에...... 답사를 마치고 내려오는 길에 상감님은 필름이 없어 몇캇을 놓쳤다며 아쉬워하더니 기어코 사진기를 들고 오시는 중년의 님에게 필름을 구하더니 날 더러 잠시 기다리라 하고는 다시 오던 길을 되돌아 간 후 난 그 님에게 어찌 쉽게 필름을 융통해주었는지 물었더니 " 척 보면 사진을 전문으로 하시는 사람은 알 수 있다며 자기도 그런 곤궁에 쳐한 적이 있기에 이심전심" 이란다. 이심전심, 직지인심, 불립문자, 염화시중...... 내게는 언제쯤 말 없이도 다가오는, 미혹함이 없는 사찰 답사가 될까? 2003.05.11

출처 : 저 산길 끝에는 옛님의 숨결
글쓴이 : 선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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