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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학준이 누구인가?
그는 경북 예천이 고향으로 학봉종택이 있는 금계가 외갓집으로 그 시대의 풍습에 의해
(맏이는 외갓집에서 낳는다) 외가에서 태어났으니 학봉 집안이 외가의 친척이며 1953년
6.25를 피하여 일본으로 간 후 좌익에 가입 반한 운동을 한 인물로 오랫동안 조총련계에
몸담은 관계로 귀국을 하지 못하였다.
윤학준이 안동지역에 전해 내려오는 현 종손의 선친 김용환 씨의 이야기를 자신의 견해를 덧붙여 1994년 나의 양반문화 탐방기 책에서 '파락호 김영환' 이란 제목으로 글을 실었으니
김시인 어른의 노기도 이해할 만하다.
지루하더라도 끝까지 읽어 주시길 바라며 발췌해서 옮기겠다.
[김용환 씨에 대해서는 나에게도 약간의 기억이 남아있다. 외갓집이 그 곳이기 때문이다
어머니에 치맛자락에 매달려 외가에 갔을 때 길다란 수염을 드리운 할아버지가 벽장에서
곶감을 내주던 것만은 기억하고 있다. 만년에는 아주 점잖고 기풍이 있는 호호야였다고
한다. 그러나 젊은 시절에는 전국에 그 이름을 떨친 방탕아였다.
우리나라에서 말하는 전형적 破落戶(파락호)였다. 파락호는 양반집 자제가 몰락해서 난봉을
피우는 사람을 일컫는다. 나의 해석을 좀 더 보태자면 파락호란 "니힐"을 품은 "로맨티스트"
이며, 호걸인 동시에 지성의 소유자라야만 한다.
김용환 씨는 그런 의미에서는 파락호의 자격을 완벽하게 갖추고 있었다.
술을 좋아하고, 노름꾼이며, 오입쟁이였다. 뿐만 아니라, 언제나 많은 수하를 거느리고 안하
무인 격으로 천하를 누비고 다녔다.
그의 기행 난행을 행장기로 남긴다면 아마 몇 권의 책은 될 거라고 사람들은 말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런 난봉꾼의 행동에 대해서 나쁘게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의 기행과 난행은 학봉의 종손이라는 것을 등에 업고 행패를 부리고 다니는 기미도 없지도 않아 사람들의 비난을 받을 만 한데도 그렇지 않은 것이다.
노름판에서도 예사로 속임수를 썼는데, 그리 변변치 못한 솜씨여서 쉽게 들키고 만다.
상대방이 화를 내어 냅다 따귀를 갈기면 용환 씨는 때린 사람이 아닌 옆사람의 뺨을 냅다
갈긴다. 맞은 사람이 대들면 "아니 이거 돌림매가 아니었던가?"라고 능청을 떤다는 것이다
조상 전래의 논밭이나 산림도 난봉질하는 바람에 깡그리 없어졌다. 조상의 산소가 있는 선산이나 살고 있는 종택을 팔아 먹은 적도 여러 번이라고 한다.
하나의 물건을 되풀이하여 팔아먹었다는 것은 그만한 까닭이 있다.
학봉종택에서는 학봉의 위패를 모시는 사당이 있다. 그것이 남에 손에 넘어갔다고 하면 김씨 일문의 수치이며 체면이 말이 아니다. 또 다른 문중의 눈이 무서워서라도 지손들은 만사 제쳐놓고 돈을 모아 되찾아놓는다는 것이다.
용환 씨는 종가에 보물로 내려오는 학봉이 남긴 유물, 유품... 이런 것들이 전당잡힐 물건으로는 안성마춤인 것이다. 전당포 주인도 이런 것이라면 무제한으로 빌려준다.
돈 떼일 염려는 추호도 없고 학봉 유물이라면 양반의 신분 상징이며 김씨 일문으로서는 더 없는 보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일도 거듭되니, 아무리 종손이라 하지만 자손들도 방어책을 강구한다.
그러면 김용환 씨도 강력한 대응책을 쓴다. 제사를 보이콧하는 것이다. "불초한 이 몸 조상 뵈올 면목이 없다"라며 제법 숙연한 태도를 보이면서 골방에 틀어박힌다.
원래, 명문 집안의 종손에게는 조상의 제사를 맡아 지낸다는 이유로 왕으로부터 종9품의 벼슬인 참봉이 제수된다.
이것을 세습 참봉이라 하는데 용환 씨도 물론 참봉 어르신이다.
이런 중대한 임무를 맡은 당주가 농성을 하게되니 자손들은 꼼짝없이 두 손을 번쩍 들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대행을 세워 제사를 모실 수도 있기는 하지만 , 제주인 종손이 엄연히 있는데도 불구하고 초헌을 하지 않으면 명가로서의 체면이 말이 아니며 권위는 땅에 떨어지게 된다.
권위가 땅에 떨어진다는 것은 양반의 체통이 떨어진다는 것이며, 그들 일족의 생활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는 중대사인 것이다.
결국 타협을 하지 않을 수 없게된다.
영남 벼슬 중에 종손 벼슬이 최고다 라는 말이 있다.
이럴테면 종손이란 에헴! 하고 유세부리면서 떵떵 울리고 지낼 수 있는 신분이라는 것이다.
허기야 종손이라도 불천위 제사를 모시는 종손이라야 그렇지만...
어쨌든 김용환이라는 인물은 근대의 보기 드문 쾌남아 였으며 호걸이었다.
대원군 이하응, 1930년대 형평사 운동의 투사였던 김남수와 더불어 나는 김용환을 근세이후의 3대 호걸이자 파락호로 보고 있다.
'김용환에 대해서 나쁘게 말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고 했는데, 그것은 봉건적인 질서나 유습을 아무 거리낌없이 깨버리는 그의 파격적 행동에 대해서 사람들이 갈채를 보낸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뭐니뭐니해도 김용환씨가 남긴 말 중에 최고는
"할배는 학봉이고 나는 난봉이다. 대대로 봉이 나니 집구석은 되는 집구석이다."라는 말이니
역시 걸물은 걸물이었다.]
근디 윤학준의 글이 왜 노종손의 심기를 건들었을까요?
2003.5.11
그는 경북 예천이 고향으로 학봉종택이 있는 금계가 외갓집으로 그 시대의 풍습에 의해
(맏이는 외갓집에서 낳는다) 외가에서 태어났으니 학봉 집안이 외가의 친척이며 1953년
6.25를 피하여 일본으로 간 후 좌익에 가입 반한 운동을 한 인물로 오랫동안 조총련계에
몸담은 관계로 귀국을 하지 못하였다.
윤학준이 안동지역에 전해 내려오는 현 종손의 선친 김용환 씨의 이야기를 자신의 견해를 덧붙여 1994년 나의 양반문화 탐방기 책에서 '파락호 김영환' 이란 제목으로 글을 실었으니
김시인 어른의 노기도 이해할 만하다.
지루하더라도 끝까지 읽어 주시길 바라며 발췌해서 옮기겠다.
[김용환 씨에 대해서는 나에게도 약간의 기억이 남아있다. 외갓집이 그 곳이기 때문이다
어머니에 치맛자락에 매달려 외가에 갔을 때 길다란 수염을 드리운 할아버지가 벽장에서
곶감을 내주던 것만은 기억하고 있다. 만년에는 아주 점잖고 기풍이 있는 호호야였다고
한다. 그러나 젊은 시절에는 전국에 그 이름을 떨친 방탕아였다.
우리나라에서 말하는 전형적 破落戶(파락호)였다. 파락호는 양반집 자제가 몰락해서 난봉을
피우는 사람을 일컫는다. 나의 해석을 좀 더 보태자면 파락호란 "니힐"을 품은 "로맨티스트"
이며, 호걸인 동시에 지성의 소유자라야만 한다.
김용환 씨는 그런 의미에서는 파락호의 자격을 완벽하게 갖추고 있었다.
술을 좋아하고, 노름꾼이며, 오입쟁이였다. 뿐만 아니라, 언제나 많은 수하를 거느리고 안하
무인 격으로 천하를 누비고 다녔다.
그의 기행 난행을 행장기로 남긴다면 아마 몇 권의 책은 될 거라고 사람들은 말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런 난봉꾼의 행동에 대해서 나쁘게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의 기행과 난행은 학봉의 종손이라는 것을 등에 업고 행패를 부리고 다니는 기미도 없지도 않아 사람들의 비난을 받을 만 한데도 그렇지 않은 것이다.
노름판에서도 예사로 속임수를 썼는데, 그리 변변치 못한 솜씨여서 쉽게 들키고 만다.
상대방이 화를 내어 냅다 따귀를 갈기면 용환 씨는 때린 사람이 아닌 옆사람의 뺨을 냅다
갈긴다. 맞은 사람이 대들면 "아니 이거 돌림매가 아니었던가?"라고 능청을 떤다는 것이다
조상 전래의 논밭이나 산림도 난봉질하는 바람에 깡그리 없어졌다. 조상의 산소가 있는 선산이나 살고 있는 종택을 팔아 먹은 적도 여러 번이라고 한다.
하나의 물건을 되풀이하여 팔아먹었다는 것은 그만한 까닭이 있다.
학봉종택에서는 학봉의 위패를 모시는 사당이 있다. 그것이 남에 손에 넘어갔다고 하면 김씨 일문의 수치이며 체면이 말이 아니다. 또 다른 문중의 눈이 무서워서라도 지손들은 만사 제쳐놓고 돈을 모아 되찾아놓는다는 것이다.
용환 씨는 종가에 보물로 내려오는 학봉이 남긴 유물, 유품... 이런 것들이 전당잡힐 물건으로는 안성마춤인 것이다. 전당포 주인도 이런 것이라면 무제한으로 빌려준다.
돈 떼일 염려는 추호도 없고 학봉 유물이라면 양반의 신분 상징이며 김씨 일문으로서는 더 없는 보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일도 거듭되니, 아무리 종손이라 하지만 자손들도 방어책을 강구한다.
그러면 김용환 씨도 강력한 대응책을 쓴다. 제사를 보이콧하는 것이다. "불초한 이 몸 조상 뵈올 면목이 없다"라며 제법 숙연한 태도를 보이면서 골방에 틀어박힌다.
원래, 명문 집안의 종손에게는 조상의 제사를 맡아 지낸다는 이유로 왕으로부터 종9품의 벼슬인 참봉이 제수된다.
이것을 세습 참봉이라 하는데 용환 씨도 물론 참봉 어르신이다.
이런 중대한 임무를 맡은 당주가 농성을 하게되니 자손들은 꼼짝없이 두 손을 번쩍 들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대행을 세워 제사를 모실 수도 있기는 하지만 , 제주인 종손이 엄연히 있는데도 불구하고 초헌을 하지 않으면 명가로서의 체면이 말이 아니며 권위는 땅에 떨어지게 된다.
권위가 땅에 떨어진다는 것은 양반의 체통이 떨어진다는 것이며, 그들 일족의 생활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는 중대사인 것이다.
결국 타협을 하지 않을 수 없게된다.
영남 벼슬 중에 종손 벼슬이 최고다 라는 말이 있다.
이럴테면 종손이란 에헴! 하고 유세부리면서 떵떵 울리고 지낼 수 있는 신분이라는 것이다.
허기야 종손이라도 불천위 제사를 모시는 종손이라야 그렇지만...
어쨌든 김용환이라는 인물은 근대의 보기 드문 쾌남아 였으며 호걸이었다.
대원군 이하응, 1930년대 형평사 운동의 투사였던 김남수와 더불어 나는 김용환을 근세이후의 3대 호걸이자 파락호로 보고 있다.
'김용환에 대해서 나쁘게 말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고 했는데, 그것은 봉건적인 질서나 유습을 아무 거리낌없이 깨버리는 그의 파격적 행동에 대해서 사람들이 갈채를 보낸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뭐니뭐니해도 김용환씨가 남긴 말 중에 최고는
"할배는 학봉이고 나는 난봉이다. 대대로 봉이 나니 집구석은 되는 집구석이다."라는 말이니
역시 걸물은 걸물이었다.]
근디 윤학준의 글이 왜 노종손의 심기를 건들었을까요?
2003.5.11
출처 : 저 산길 끝에는 옛님의 숨결
글쓴이 : 선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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