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구미시

[스크랩] 초가을 낙동강 자락...선산 / 쌍암 고택

임병기(선과) 2008. 6. 4. 1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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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구가 요란스럽게 짓는 것을 무시하고 주인 없는 바깥 행랑채를 
들어갔더니 근처 논에서 일하시던 어르신이 달려오셔서 우릴 맞이한다.
지례짐작으로 어르신의 함자가 최 상자 학자 이신가요? 여쭈었더니 얼굴 가득 사람 좋은 
웃음 가득 머금으면서 “저는 순자 보자요” 하시며 쌍암고택이 문화재로 지정될 당시 
순보 어른의 선친이던 최상학 어른의 이름으로 지정되어 아직도 그렇게 알려져 있다 한다.
400년 전 지을 당시 집 앞에 큰 바위 두개가 이었다 하나 지금은 보이지 않는 고택의 
사랑채는 막돌헛튼층 쌓기의 기단위에 두리기둥이나 정면의 칸 수가 4칸으로 보여 의아스럽다.
건축에서 칸수는 양의 수 즉 1,3,5,7,9이어야 하기 때문이나 부엌에 한 칸을 더 내어 
눈썹처마로 마감하였다는 어르신의 설명을 듣고서야 수긍이 가지만 고택은 남부 지방의 
유형인 홑집이 아니고 田자를 측면에서 본 듯한 추운 북부 지방 유형의 겹집 구조이며 
모든 문을 들어 올릴 수 있는 장지문이라 완전 개방이 가능하다고 말씀하신다.
또한 안채의 문에는 연경당의 불발기 창과 흡사한 교창이 있으며 이는 고택을 지을 당시의 
어르신이 세자의 스승으로 궁궐에서 오래 생활하여 연경당 건축을 모방한 것이며 툇마루 
앞에도 본래는 마루가 있었다 한다.마당에 흩어져 있는 주추를 보며 용도를 여쭈었더니 
행랑채도 현재는 5칸이지만 원래 7칸이었으며 사랑채 뒤에 있었던 작은 사랑채와 연당의 
부재들이라 한다.
여기서 잠깐 일반 반가에 연당을 조성하는 이유를 살펴보자.
흔히들 불교를 상징하는 연꽃이 집에 조성된 것을 의아스럽게 여기지만 민화에서는 
다산을 상징하고 일반민가에서는 군자를 의미하여 고고한 삶을 살아가자는 자기 암시이며, 
애련설의 주돈이가 “모란은 부귀요, 국화는 은자며, 연은 군자이다”라고 말한데서 
유래하였다 한다. 맞나?????
어르신을 따라 중문을 들어서니 ㄷ자 형의 안채가 중문과 약간 비켜서 자리 잡고 
있지만 헛담 역할을 하는 부엌벽이 짧아 안채공간이 쉽게 눈에 들어와서 슬쩍 
여쭈었더니 예상대로 본디의 구조가 아니라 하신다. 보수전에는 7칸이 중문채 중문
안쪽에 판벽이 있었고 부엌벽에도 안채가 바로 보이는 것을 막기 위해 널판지가 
설치되어 있었다고 말씀하신다.
문화재로 지정되면 보조금이 있느냐고 여쭈었더니 수리보수 시에는 지원금이 있지만 
별도의 혜택은 없고 주인의 필요에 의해 맘대로 증, 개축이 불가능하여 어려움이 
따른다며 안채 뒤로 보이는 사당을 설명하신다.
도로에서 쌍암고택을 안내하는 이정표가 보이지 않았다고 하니 쓴 웃음 지으며 
설치되어있던 입간판이 언젠가 화물차에  소손이 된 후 다시 세워지지 않았다며 
그건 아무것도 아니라 하신다.
구미역 광장 구미시 관광안내도에는 쌍암고택이 최(崔)가 아니라 최(催)로 표기 
되어 고택을 방문하는 사람들이 성씨를 헷갈려 한적도 여러 번이고,  
몇 차례의 요청에도 아직 그대로 수정되지 않고 있다하니......
2003.09.20
출처 : 저 산길 끝에는 옛님의 숨결
글쓴이 : 선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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