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구미시

[스크랩] 초가을 낙동강 자락...선산 / 궁기리 석불, 모례가정

임병기(선과) 2008. 6. 4. 1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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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제 스쳐왔는지 기억도 가물가물한 눈에 익은 주변 풍광에 모례가정(毛禮家井)을 
향한 달구지 차창으로 궁기리 석불 안내판이 보인다.
횡재다!!! 계획에 없던 돌부처는 어떤 분이며 어떻게 모셔져 있을까?


*선산 궁기동 석불좌상(왼쪽) 답사를 하다보면 지역의 산골에 숨어(내동댕이쳐져 있다는 표현이 적절하겠지만) 계시다 초동에게 발견되어 박물관 유리 안, 또는 호흡조차 곤란한 전각 속에 갇혀 있어 안태 고향을 그리워하는 불상이 있는 반면 비록 제자리는 아닐지라도 고향 하늘아래 그것도 꿈이 가득한 아이들이 노니는 교정에 모셔져 있는 불상을 자주 접하게 되는데 궁기리 석불 역시 중학교 교정에 모셔져 있다. 그것도 신라불교 초전의 도(道)를 연(開) 도개(道開)중학교 교정에......




*선산 궁기동 석불좌상(뒷면) 우측의 석불은 하나의 돌로 불신, 주형 거신광배, 대좌가 되어 있으며 작지만 단아한 모습으로 광배에는 넝쿨문, 연꽃, 불꽃문, 화불이 새겨져 있고 더욱 놀라운 것은 내가 한번도 본적이 없는 석불의 왼쪽 손으로는 연꽃 가지의 밑을 잡고 오른손으로는 가운데를 잡은 연꽃이 만개하여 광배에 피어 있는 연꽃 지물이었다.




*선산 궁기동 석불좌상(오른쪽) 비록 얼굴 부분이 훼손이 심했지만 발길 쉽게 떨어지지 않는 보살로 아마 협시 보살로 조성되었던 듯하나 좌측의 석불도 동일하게 연꽃을 들고 있었지만 꽃의 방향이 같아서 고개가 갸웃갸웃, 본존불의 좌우 협시불이라면 연꽃의 방향은 서로 반대이어야 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아직도 땅속에서 숨어 있는 두기의 석불이 더 계시다는 말인가? 아무튼, 우측 석불의 후면에는 지권인의 비로자나불이 선각되어 있어 크기, 지역은 다르지만 남원 만복사지 석조 여래 입상을 떠올리며 아쉬운 발길을 돌렸다. 들길을 달리다 말고 상감마마는 달구지에서 내려 익어가는 들녘을 앵글에 맞춘다. 병도 지독한 중증이다. 내가 예술을 모르는 무식한 놈인가? 신라불교에 불교를 첨 도입한 아도화상이 머슴으로 모례의 집에 머물렀다고 알려진 (설화로만 보자. 역사적 고증은 내게는 무의미하니...) 마을은 초입부터 “문화와 환경이 숨쉬는 모례마을”, 다리는 “모례교”, 마을회관에는 “신라 불교의 초전 마을“의 글귀가 보여 동민들의 자부심이 엿 보인다. 아도화상이 머슴살이 했던 모례의 집터 담벼락은 설화와 관련된 벽화가 가득하고 집터 뒤 마을 가운데는 당시부터 있었다는 우물이 있다.

*전 모례가정(傳 毛禮家井)- 모례집의 우물(井)로 설명문에 의하면 깊이 3미터, 독모양의 원형으로 쌓아 올린 후 윗면은 직사각형의 석재로 마감한 형태로 첨성대를 연상하면 쉽게 이해가 되겠으며 바닥에는 아직도 당시의 목재가 있다고 하나 현재는 폐정으로 남아 있다. 재미있는 이야기 한 자락으로 모례마을을 떠나 도리사로 가야겠다. 우리가 절을 왜? 절이라 하느냐는 물음에 절에 가서 절을 많이 하니 절이라 한다는 이야기 등 많은 설이 난무하나 내가 수긍하는 절의 유래는 신라불교가 처음 도입된 모례에서 태생되었다는 설이다. 즉, 모례(毛禮)의 毛를 이두식의 음만 비려오면 털이고 털이 세월의 흐름에 따라 “털--덜--절”로 음이 바뀌었다는 이야기다. 물론 주워들은 이야기 중 가장 좋아하는 설이지, 근거는 없다. 2003.09.20
사진 상감마마
출처 : 저 산길 끝에는 옛님의 숨결
글쓴이 : 선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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